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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Jan 06. 2021

하늘 위의 달인

어쩌면 나도



어떤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자연스레 능력치가 쌓이고, 우리는 그 능력치를 '노하우'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연히 승무원이라는 일도 하다 보면 나름의 노하우가 생기는데, 어떤 노하우들은 초능력에 가까워 가히 일반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숙련도를 자랑한다.



승무원은 첫 번째 초능력, 바로 '스피드'. 내가 몸담았던 대한항공의 서비스 매뉴얼은 '슬로우', '프리미엄'의 대가라고 불릴 만큼 정성스러운 서비스 매뉴얼을 자랑한다. 식사를 제공할 때만 해도


Step 1. 손님,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Step2. 메뉴 설명 (메인 메뉴, 사이드 메뉴, 소스까지 상세히) 어떤 것으로 드시겠습니까?

Step3. 음료 함께 드시겠습니까? (탄산음료, 과실음료 및 주류 설명)

한 손님에게 크게 3Step을 모두 거쳐야 비로소 다음 손님의 서비스로 넘어갈 수 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또 어떤가.

Step1. 손님, 식사 다 드셨습니까? (맛있게 드셨습니까?)

Step2. 다 드신 식사 정리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Step3. 더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또다시 3 Step을 거쳐야 마침내 트레이 회수가 가능하다. (물론 매뉴얼이고 이를 다 지키지 않는 승무원도 많다.) 그러나 이 스텝이 완전히 무시되는 비행이 있으니 콜드 밀(Cold Meal. 샌드위치, 김밥 등 데우지 않고 곧바로 제공되는 차가운 식사)이 제공되는 '초단거리 비행' 또는 홍퀵(홍콩 퀵턴 비행. 홍콩은 만만석, 인기 노선이라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큰 트레이에 꽤 괜찮은 식사를 제공한다.)과 같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비행'이다. Full Service Carrier인 만큼 예외 없이 모든 비행에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대한항공의 서비스 신념을 따라가려 우리 승무원들은 정말 열심히, 쉬지 않고 일을 했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식사를 소위 '뿌려야' 그나마 착륙 준비를 위해 비행기 바퀴가 나오기 전까지 서비스를 마칠 수 있었기 때문. 아무런 서비스도 제공하지 않는 타 항공사와 달리 대한항공에서는 국내선 비행마저 각종 음료를 제공하는데 그래서 나는 지금도 종이컵을 쫙 깔아놓으면 단 몇 초 안에 주스를 7~8부 높이로 완벽하게 따를 수 있다. 승무원들은 정말 빠르다.



승무원은 '정리의 달인'이다. 갤리(galley), 카트(cart), 아일(aisle), 레바토리(Lavatory) 등등 비행기 머리부터 꼬리까지 활보하며 정리 신공을 펼친다. 갤리 내 저장 공간들은 똑같이 생긴 회색 금속 박스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어떤 박스에 무엇이 위치해 있는지 나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모든 승무원이 딱 봐도 알 수 있게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카트는 또 어떤가. 식사를 마친 후의 폭탄 맞은 트레이를 카트에 욱여넣는 승무원들의 실력은 가히 놀랍다. (승무원 시절 카트를 정리하며 성격이 많이 나빠졌다. 그래서 나는 손님으로 비행기에 탑승하면 식사 후 아주 가지런하게 트레이를 정리한다.) 아일에 떨어진 쓰레기 하나도 용납하지 못해 저 멀리서 달려와 줍고, 화장실 세면대에 물기 하나 없도록 말끔히 정리한다. 그러니 승무원과 결혼하면 어쩌면 조금! 아주 조금! 피곤할지도 모른다.



승무원은 '기억력'에도 일가견이 있다. 대한항공의 가장 큰 비행기인 A380에는 4백여 명의 승객들이 탑승한다. 상위 클래스로 가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이코노미 클래스의 경우 한 승무원이 수 십 명의 승객을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 참 신기한 게 오더(Order)는 특정 시간에 몰아친다. 한 손님이 라면을 주문하면 좁은 기내에 라면 향기가 스멀스멀 퍼지고, 너도, 나도, 여기서도, 저기서도 라면을 주문하기 시작한다. 너무 바쁠 때는 메모지에 손님의 좌석번호를 적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럴 때면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어 마치 컴퓨터처럼 손님의 좌석번호와 오더 내용을 입력하는 것이다. 비행이 끝난 후 '그 손님 있잖아, 첫 번째 식사로 ~드시면서 ~해달라고 하신'와 같은 이야기가 시작되면 모두가 '아! 그 46H 손님?' 하며 좌석번호로 받아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니. 어쩌면 퀸즈갬빗의 여주인공이 머릿속으로 체스판을 그리듯 승무원들은 머릿속으로 기내 좌석을 그리는 것이 아닐까.



이 외에도 좁은 아일에서 손님과 부딪히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는 능력, 어두운 기내에서도 필요한 것이 있는 손님을 찾아내는 능력, 서서 밥 먹는 능력 등 승무원에게는 기이한 능력들이 참 많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이따금씩 시청했다. '달인'이라는 이름으로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기계처럼 1분 만에 똑같은 생김새의 만두를 100개도 넘게 빚는 만두의 달인, 인쇄 일을 오래 해 손으로 대충 집기만 해도 100장의 종이를 딱 맞게 집는 인쇄의 달인. 만두 좀 느리게 빚는다고, 종이 매수를 좀 틀리게 집는다고 해서 생활에 지장 될 일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서 더욱이 달인이란 호칭은 오래 일한, 자기 분야에 자부심과 애착을 갖고 일한 사람들에게만 새겨지는 값진 훈장일 터.



승무원으로 일하며 몸이 축나 병가를 내는 일이 많았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도 쉰 적이 있는데 신기한 건 오래 쉬면 몸이 굳을 만도 한데 비행기를 타는 순간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면 이미 할 일을 끝내고 어느새 보딩 사인을 기다리는 중. 조금만 더 일했더라면 나도 달인이 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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