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울린 사람들
승무원은 감정노동자다. 외국항공사 승무원들의 사정은 조금 낫다고 하지만 적어도 국내 항공사 승무원은 감정노동자 중에서도 '중(重)' 노동자다. 여기서 감정노동의 대상은 손님, 함께 일하는 동료, 회사 등등. 비단 손님에 대상이 국한되는 단어가 아니니 승무원 시절 나는 기내에서, 호텔에서, 나의 방에서 종종 눈물을 흘렸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분노, 화, 억울함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끝없이 소모하고 나면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또 다른 감정들이 이내 채워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이 채워진 감정은 희열, 보람, 자부심, 먹먹함과 같은 또 다른 종류의 것들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울었던 건 OJT(On the Job Training: 정식 승무원으로 비행하기 전 훈련생으로서 비행적합성을 평가받는 비행)였다. 승무원으로 일하며 그만큼 오열했던 적이 있었던가. 지금은 남의 회사 비행기에 손님으로 탑승해도 눈 감고 찾을 수 있는 것들인데. 그 당시엔 똑같이 생긴 갤리에서 뭐가 냉장고인지, 뭐가 Ice Drawer인지, 뭐가 Trash Can인지, 컵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신입 승무원의 비행이니 서투른 것이 당연. 물론 따뜻하고 친절한 선배들도 많지만, 그 날 비행은 유난히 초보 승무원의 잘잘못을 따지려 신경을 곤두세운 선배들만 가득했다. 운이 좋지 않았다고 설명할 수밖에. 손님을 응대하면서도 함께 카트를 잡은 선배의 눈치를 보느라 웃지 못했고, 유연하고 능숙하게 서비스하는 모습을 그렸던 나는
'세윤씨, 비행기에서 문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게 어떤 기분인지 알게 해 줄까?'
라는 어린 부팀장(알고 보니 악질로 유명한 사무장이었다)의 협박에 멘탈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현지 호텔에서 나는 펑펑 아주 펑펑 울었다.
손님 때문에 운 적도 당연히 있다. 아직도 생생한 그 날. 내가 담당한 존(Zone)에는 Unruly Passenger(기내에서 승무원에게 협조적이지 않은 전적이 있는 승객을 일컫는 말. 까다로운 승객이니 주의해서 서비스하라는 의미에서 비행 전 승무원에게 전달되는 승객 정보에 표시되는 손님 유형) 한 명이 탑승했고, 무슨 언짢은 일이 있었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착석한 그는 비행 내내 뚫어져라 나를 노려보았다. 대한항공과 원수진 일이 있는 걸까. 그리고 일은 비행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터졌다. 나는 착륙 준비를 위해 창가 좌석 손님들에게 블라인드 개방을 요청하는 중이었고, 창가에 앉았던 그 손님은 때 마침 잠에 들어 있었다. 중요한 안전업무이기에 깨워서라도 블라인드를 개방하는 것이 매뉴얼.
'손님, 곧 비행기 착륙 예정입니다. 안전을 위해 창문 덮개 열어주시겠습니까?'
나의 정중한 요청에 돌아온 짜증 섞인 고성과 욕설.
'아 진짜! 귀찮게 하네! 에이 C'
동시에 창문 덮개를 부서져라 올리더니 다시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다. 어찌나 소리가 컸던지 기내 손님 대부분의 시선이 내 쪽으로 집중되었고 놀란 마음에 눈물까지 왈칵 터졌다. 부랴부랴 갤리로 돌아와 흘리지 못한 눈물을 마저 흘렸더랬다. 사람이 놀라면 눈물이 나온다더니, 당시 내가 딱 그랬다.
이 또한 나의 신입시절 에피소드. 신입시절에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로 종종 눈물을 흘렸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내공이 쌓이고, 나름 단단해져 나는 웬만한 일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승무원이 되었다. 강철심장까지는 아니지만 심장에 꽤 괜찮은 근육이 생긴 이후, 나를 울린 일들은 지금까지의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방콕 출발 인천 도착 밤 비행. 그 날은 Stretcher Passenger(부상 승객. 좌석에 앉아 비행할 수 없을 만큼 아파 의료용 침대에 누워 탑승한다. 의식이 없는 경우도 많다)가 나의 담당구역에 탑승했다. 부상 승객은 미국 국적의 할아버지 승객이었고 사위와 딸, 비상상황에 대비해 방콕 현지 의료진 2명이 함께 탑승했다. 딸 내외와 방콕에서 휴가를 즐기러 왔다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것. 최종 목적지는 LA였는데 가장 빠른 비행기가 한국을 거쳐 LA로 가는 비행기였다고 한다. 생사가 불분명한 아버지를 옆에서 지키던 딸은 비행 내내 눈물을 쏟았다. 마음이 쓰라렸다. 비행기가 인천에 도착할 무렵 서투른 영어였지만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한국의 속담과 내가 아는 모든 희망의 말들을 메모지에 적어 딸에게 건넸다. 그녀는 나의 메일 주소를 물었고, 실제로 그녀에게 네 달 가량의 시간이 지난 후 메일을 받을 수 있었다. 잘 도착했고 힘든 시간을 이겨내 이제는 완전히 괜찮아졌다는 내용. 그리고 나의 따뜻한 서비스 덕분이었다는 마지막 한 줄. 그때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 흘릴 법한 뜨거운 한 줄기 눈물을 또르르르 흘렸다. '손님을 가족같이'라는 케케묵은 슬로건이 내 가슴에 진하게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눈물은 당연히 마지막 비행이었다. 몸이 좋지 않아 퇴사하는 나를 걱정해 일도 제대로 시키지 못할까, 나는 마지막 팀 비행이 되어서야 팀원들에게 퇴사 소식을 전했다. 팀원들이 좋았던 덕분에 더 빨리 그만두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 정도로 나의 마지막 팀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나의 퇴사 소식에 비행기는 눈물바다. 그 날은 나만 운 것이 아니었기에 울어도 행복했다.
감정노동. 이 네 글자의 단어는 블랙컨슈머, 진상 손님, 컴플레인과 같은 단어들과 항상 붙어 다닌다. 하지만 나는 감정노동을 하며 단단해졌고, 뜨거운 눈물도 흘려봤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나에게 감정노동은 ‘감정을 주고 받는 일’이라는 또 다른 의미였기 때문. 승무원 시절 나의 집 현관 거울에는 '오늘도 웃자, 스마일'이라는 붉은 립스틱으로 쓰인 문구가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승무원으로 일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마음 편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감정노동자로 일하며 나름 행복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