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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의식의 기준(pattern)]

{1. 자유 정신과 마음}

매쉬 아널드는 『종교를 대신하는 것은 시(詩)라 했다.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 결국은 문학의 임무이자 사명이라는 명제 앞에서 종교는 인간 사랑의 헌신에 목표라면 다양한 의견이나 사고는 화려한 문학의 정원을 이룩하는 것에 한국문학도 서로 사랑하는 구원의 메시지를 통해 문을 열어야 할 보편적인 소명이라고 필자는 굳게 믿는다.

그렇기에 마음이란 정신을 나타내는 창구이고 정신은 마음을 움직이는 중추적인 기능을 하기에 마음과 정신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로 통합된 의식이지만 때론 서로 다른 몫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신보다 마음에서 행동으로 전환되는 길이 빠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정신의 중심보다 마음은 쉽게 변하는 과정에 쉽게 접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신의 줄기가 있고 마음에 가지로의 역할을 하기에 쉽게 적응할 수 있지만 정신은 오뇌(懊惱) 고뇌(苦惱)를 통해 마음을 조종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색채가 마음에 반응하는 것은 마음이 앞서고 정신은 뒤에 호불호의 선택으로 남는다. 

정신이 없다는 말과 다르게 마음이 없다는 말에는 거절의 뜻이 함축되었음을 뜻한다. 그렇기에 색은 민족마다 결정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중국은 황하강의 영양으로 황색은 정색이고 우리는 신분 차이에 따라 백색은 백성(피지배층)의 옷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시대는 3가지로 색을 구분하였고 집의 칸도 신분에 따라 달랐다. 100은 완전의 개념으로 왕의 소유라면 99칸은 신분 높은 신하의 집을 상징했다. 색채 또한 이런 원칙에 의해 백색- 백의민족이라는 말은 하층 백성에게 허용된 옷의 색에서 유래했다. 흑심은 백색 바탕에서는 금시 나타나는 번역의 상징 개념을 띠게 된다. 

신석정의 시는 푸른색으로 자유정신을 나타냈고 그 구체적인 암시를 보면 별이나 꿈으로 형상화된다. 신석정의 첫 시집 『촛불』은 30년대 어둠의 일제하에서 어떻게 시인의 의식이 빛 혹은 색채로 지향하는 진로를 설정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상징적인 절차를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운모처럼 투명한 바람에 이끌려

가을이 그 어느 먼 성좌를 넘어 드니

푸른 가을의 대낮을 하얀 달이 소리 없이 오고 가며

밤이면 물결에 스쳐나가려는 바둑돌처럼

흰 구름 엷은 사이사이로 푸른 별이 흘러갑디다     

남국의 노란 은행 잎새들이 

푸른 하늘을 순례한다 먼 길을 떠나기 비롯하면 

산새의 노래 짙은 숲엔 밤알이 쌓인 잎새들을 조심히 밟고

묵은 산장 붉은 감이 조용히 석양 하늘을 바라볼 때 

까마귀 맑은 소리 산을 넘어 들려옵디다     

어머니

오늘은 고양이 조름 짓는

너 후원의 따뜻한 볕 아래서 

횐 토끼의 눈동자같이 붉은 석류알을 쪼개어 먹으며 

그리고 내일은 들장미 붉은 저 숲길을 거닐며 

가을이 남기는 이 현란한 풍경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렵니까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이 작품에서는 많은 색채를 동원했다. “푸른 하늘”의 청색과 “횐 달”의 백색의 대비와 “밤의 어둠 그리고 ”푸른 별과 “ ”노란 은행잎“ ”바람“ ‘붉은 감’ ‘석양하늘’ ‘까마귀’ ‘맑은 소리’ ‘히나 토끼’ ‘어머니’ ‘숲길’ 등 신석정 시인의 색채가 저의 전부 동원하였고, 구체적인 시어가 망라되어 나타난다.      

공간은 가을이고 이동의 메시지를 통해 어둠에서 별이 있는 곳으로 진행하는 시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물론 그 무드는 다소 쓸쓸하고 나이브(naive) 할 뿐만 아니라 순수를 찾아 나서는 나그네 의식을 발동하는 정서가 내포되고, 미지의 공간으로 떠나려 하는 생각이 먼 길로 설정되어 시적 특성을 함축하고 있다.             

신석정은 푸른 하늘과 노란 은행과 바다, 하늘 등 많은 시어에 색채를 담아 자신의 마음을 나타낸다. 이는 시인의 정서가 지배하는 심리적인 현상을 뜻하지만 신석정 시의 독특한 입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푸른 하늘 그리고 푸른 숲과 푸른 바다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어딘가 깊은 공간을 지향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고-

이는 궁극적으로 어머니 즉 어둠이 모태 의식을 지향하는 절차를 수행하기 위해 황혼을 예비하면서 별이나 꿈을 마련하려는 – 신석정의 순진무구한 정서는 때로 나약한 의식으로 유추할 수도 있지만 깨끗함이 곧 아름다움이고 순수가 곧 평화와 안식으로 연결되는 의식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 

신석정의 패턴은 A 자유 의식의 B. 이동의 이미지 C, 황혼의 진입 D. 어둠=어머니 혹은 꿈으로 연결된다.

           

   [2. 기본 정서의 줄기]     


1) 자유 의식     


시인은 자유정신을 구현하는 방법으로 이미지 선택에서 의도를 나타낸다. 물론 의도는 때로 주제를 선명하게 구사하는 핵심적인 발언으로 다가드는 듯하다.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는 바로 독특함으로 형상화한 자기 발언이 시적인 방법으로 발언될 때 – 시는 항상 긴장과 긴축 그리고 함축에 따른 언어의 탄력을 위한 상징에서 시인의 말은 숨겨져 있어 순박하고 검소한 혹은 질박한 표정이지만 그 내용엔 다양한 의미의 줄기가 있어야 한다. 결국 시인이 자기의 말을 고백하기 위해 지난한 시적인 의장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기도 한다.      

신석정의 시는 이미지가 다소 장식적인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언어경제의 문제가 대두되지만 비교적 뚜렷한 의도를 내세우고 있다. 

시어는 하나의 의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엠비규어티(ambiguity)의 특성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는 추상적인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아닌 감동을 수반하는 감수성을 내포해야 있어야 한다고 한다.     

신석정의 시적 의도는 자유 의식- 비교적 선명한 최종 종착지를 갖고 있다. 푸른 하늘 혹은 청색의 이미지로 포장된 낙원 의식 또는 어머니와 별 등 다양한 의미역을 갖고 있으면서 의식의 항해를 펼치고 있는 듯하다.

     

따뜻한 햇볕 물 위에 미끄러지고 

횐 물새 동당 동당 물에 뜨듯 놀고 싶은 날이네

언덕에는 푸른 잔디 해치는 바람이 있고 

횐 염소 그림자 물속에 어지러워     

묵은 밭에 까마귀 그 소리 한가하고

오늘도 춤이 자졌다.. 하늘에 해오리 

이렇게 나른한 봄날 언덕에 누워

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푸른 하늘’이 최종 목적지로 설정되었다. 얘기하자면 청색은 이육사나 한용운의 시에서도 구원의 메시지 역할이 수행한 것 신석정의 시에도 청색(푸른 하늘)은 미지의 공간으로 설정되었고 이 공간은 시인이 안주하려는 최종 거처를 암시한다. 

이는 밤이나 별이 떠오르는 곳 혹은 숲이나 어머니의 의미와 등가를 이루는 점에서 가야 할 곳이면서 시인의 자유의지가 도달하려는 종착지의 상징이다. ‘햇볕’ 혹은 ‘흰 물새’와의 결합에서 밝은 정서의 표정이 2연에 이르면 ‘푸른 잔디’를 헤치는 ‘바람’이 있고 ‘흰 염소’의 결합에서 누른 색채와 횐 색채가 어긋난 암시이지만 밝은 느낌으로써 3연에 전해진다. 즉 까마귀는 신석정의 시에는 불행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친근함을 전달한다. ‘까마귀와’ ‘해오리’의 한가한 춤이 이어지면서 ‘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라는 종착에 이른다. ‘푸른 하늘’은 인간이 도달하려는 마지막 공간이다. 때문에 하늘은 인간이 도달하고 싶은 장소이고 가야 할 미지의 지점으로 설정된 이미지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색채로 표현하면 청색을 바라보는 행복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행복은 누구나 주관적이다. 때로는 시인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의미가 상식적으로 일체가 될 수 없다 할지라도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개성의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개성은 차별화라기보다는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른한 봄날 언덕에 누워/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

는 신석정이 누리는 행복감- 바라보기의 즐거움- 이는 모두가 누리는 행복의 절대 조건은 아니라도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공통된 마음이 아닐까? 한다.     


2) 이동의 이미지 정서     


인간의 의식 세계는 각기 다른 형태로 자기화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환경이나 성장의 여건 혹은 성품 등에 의해서 자기 구축의 방편이 다를 수 있으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3살까지는 무조건 모성 즉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키워야 성년이 되어도 모성애의 사랑이 연결된다는 여러 학설 등이 있다. 그렇기에 인격이란 생물학적인 유기체가 사회적인 세계와 상호 소통 혹은 작용하므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신석정이 그의 고향이라는 공간에서 멀리 벗어난 일생을 살지 않았다는 것은 광장공포증이 심리를 지배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고향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풍광이 인격의 주요 인자(因子)가 되었음을 뜻한다. 시의 내용에서 동양적인 생각을 지녔고 기법에선 이미지스트적 측면을 나타내었으며 시각적인 심상을 제시한 시인이었다는 현대문학 회장이셨던 김용직 선생의 말은 다소 합당한 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어머니

만일 나에게 날개가 돋쳤다면 

산새 새끼 포르르 포르르 날아가듯 

찬란히 피는 밤하늘의 별 밭을 찾아가서 

나는 원정(園丁)이 되오리다 별 밭을 지키는·····

그리하여 적적한 밤하늘에 유성이 보이거든 

동산에 피는 별을 따던지는 나의 장난인 줄 아시오. 

그런데 어머니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날개가 돋쳤다면』 중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고리가 날개로 의미된다면, 시인의 의식을 전달하는 다음 행동의 전달 매개체가 필요한 갈증이겠다. 

만약이라는 가정을 동원하여 <새>처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열망하지만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의 자각처럼 ‘장난’의 방도가 새와는 다른 물상으로 선택되는 듯하다.      


3) 늙음의 진입        


어둠으로 가는 길에 황혼(늙음)을 만난다. 신석정의 시에서 어둠은 안식과 꿈 그리고 별이 뜨는 본향으로서의 귀환을 의미할 때, 전 단계로 황혼은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황혼은 마지막을 장식하는 휘장이지만 역시 아름다움을 부추기는 감각은 사실일 것 같다. 밤의 아름다움을 맞아드리기 위해서는 늙음의 예비가 있어야 한다면 이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시인은 신석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는 거쳐야 하는 절차이며 또 숙명적인 만남을 뜻하는 일도 되기 때문이다. 

신석정의 시에서 색채는 은행나무의 노랑 의미와 푸른 하늘의 청색 그리고 붉은 기미의 황혼 또 밤으로 들어가는 어둠의 검은색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그의 다양한 마음의 풍경화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둠이 침실 혹은 안주의 꿈을 맞아드리는 공간이기에 일제강점기의 어둠과는 다른 공간에 있음을 뜻한다. 즉 천래의 시적 감수성을 아름다움으로 맞아드리는 순수 그 자체라는 뜻으로 사회의식을 시의 전면으로 드러내지 않는 시인은 아닐까. 하는 시인인 것 같다.      


황혼을 전별하고 

밤을 영접할 때 

저 깊은 삼림들은 작은 산새들로 하여금

황혼을 전별하기 위하여 거룩한 음악회를 연다고 합니다.

그러길래 숲을 넘어가던 나의 어린 비둘기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직도 음악회의 구경이 끝나지 않은 게지요.     


                           『밤을 맞이하는 노래에서』 중      


황혼을 전별하고/밤을 영접할 때’를 반복 사용하면서 1연에는 음악회를 구경하느라 돌아오지 않는 비둘기들의 기다림이 있고, 2연에는 구름들이 한가한 여정을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과 3연에 밤이 야회복을 입고 다가오는 환상적인 상상과 하늘에는 별들을 지키고 삼림에 있는 갸륵한 산새들을 추운 날씨로부터 지키겠다는 적극성을, 4연에는 촛불을 켜고 앉아 인생을 사색하는 명상의 시작과 밤의 일과가 끝날 때까지 지켜주는 보호자의 호소로 막을 내린다. 객관적인 위치에서 밤으로 향하는 마음과 스스로를 지켜주기를 소망하는 주관적인 호소가 교차하면서 안주로 가는 길에 황혼은 가교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면서 황혼의 명상의 길을 닦는 임무가 주어지는 인상이다.      


4) 어둠의 변용        


인간의 의식은 반응하는 데서 생의 의미가 담긴다. 그러나 그 반응의 밥법은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속성을 갖는다. 

어둠에서는 정지하고 빛에서는 활동하는 것이 생명체의 대체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어둠을 안식으로 삼는 것은 한낮의 활동을 예비하는 의미도 있지만 신석정의 시에서는 어둠이 다른 시인들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밤이 꿈을 기르는 공간이고 별이 뜨고 안식을 찾는 – 

환영할만한 이름의 어둠이다. 즉 꿈, 별, 어머니를 만나는 일은 어둠에서 불을 켜고 상상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 시의 의미-

때문에 촛불은 곧 시인 의식과 법하는 구체적인 공간이 되는 것이다.     


새 새끼 쪼르르 포르르 날아가버리듯 

오늘 밤하늘에는 별도 숨었네

풀려서 틈 가는 요즈음 땅에는

오늘 밤 비도 스며들겠다.      

어두운 하늘을 제쳐보고 싶듯· 

나는 오늘 밤 먼 세계가 그리워 ····

비나리는 촐촐한 이 밤에는 

왜 감 껍질이라도 지근거리고 싶구나!

나는 이런 밤에 새끼 꿩 소리가 그립고

호인 물새 떠다니는 먼 호수를 꿈꾸고 싶다. 

     

                         『촐촐한 밤』 중에서     


촐촐하다는 것은 배고픔의 기운이 약간 있다는 사전적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식욕으로의 배고픔이 아니라 밤에 대한 간절 성이 느껴진다. 

이는 ‘나는 오늘 밤 먼 세계가 그리워 ·····’ 라며 미지에 대한 그리움을 배고픔으로 나타냈음을 유추하면 ‘새끼 꿩 소리와’ ‘흰 물새 떠다니는 먼 호수’에 대한 그리움에 젖는다. 이 꿈은 소박하고 환상적인 그리움의 대상- 물론 미지의 느낌이 강하다. 시는 일정한 대상을 정해놓고 호소하는 예술이 아니다. 다만 미지의 공간을 향해 상상력의 옷을 입히면 되는 것이다. 신석정의 시는 이런 상상의 여행이 소박하고 다소 수식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밤에 새끼 꿩 소리와 횐 물새 떠다니는 호수-

그런 공간이 어딘지는 모를 일이다. 더구나 비가 땅을 적시는 밤의 고요는 곧 시인의 마음에 담긴 심성과 정서의 그림인 것 같다.      


3. 에필로그 꿈과 행복     


동화의 나라를 꿈꾸는 것은 그만큼 투명함과 순수를 지향하는 시인의 정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이는 시인의 성품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나 느끼는 상상의 모두가 동화적인 아름다움을 이미지로 하여 엮어졌고 『촛불』에서의 시는 전반적으로 현실을 장식으로 치장하여 꿈꾸기에 접근되어 시의 진행은 푸른 하늘을 열망하는 자유정신의 구현에 있고, 이를 위해 이동의 메신저 역할로 바람이나 물- 강이나 호수 혹은 새들의 나래에 시인의 의식을 실어 전달하는 느낌이다. 황혼은 이런 전달의 입구를 장식하는 화려함이고 꿈으로 이동하는 단계로서의 미감이 되는 것 같다. 신석정 시의 종착은 어둠- 밤에서 꿈을 엮는 일에 몰두하고 그 꿈의 인식은 다이내믹함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점에서 소극적 방법으로 일관된다. 이는 시인의 성품을 나타내는 또 다른 고백과 상통되는 점에서 그의 시는 곧 시인의 개성과 일체화를 이루었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신석정 시인의 모든 시를 평할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 맥이 상통되는 점을 느끼고 나간다.  

다시 한번 그의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점을 배우고 익히면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면서 개선할 점이 무엇인가를 섭렵하려 한다.     

 

2024. 0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필자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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