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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 채우기와 울타리 만들기】

(마음으로 가는 길)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1. 시작 들어가기     


시는 언어가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고백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잡다한 요설과 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간명하고 진실한 감수성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응축(凝縮)하는 힘이 들어있는 것이다. 

진리란 복잡하지도 않고 명료하기 때문에 함축적인 의미를 내장할 뿐만 아니라 신념의 힘을 가지고 있어 감동을 전달하는 통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시는 톡특한 언어의 의장(意匠)을 갖추는 기교가 필요한 것이다. 즉 산문이나 일기는 팽창적인 특징 

사실성의 집중화를 필요로 한다면 시는 응축에 필요한 언어의 장치를 갖추는 시적 재능- 

오랜 훈련이 필요하고 습작의 시일과 시의 완성도는 비례하게 된다. 

물론 시의 특성은 상상(想像)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과 변화를 수용하는 재치가 있어야 함도 사실일 것이다.      

그렇기에 시는 고급의 예술이면서 고도한 정신의 위치를 확보한 사람에게만 시가 탄생 되는 이름일 것이다. 적어도 시는 장바닥의 악다구니가 아니라 청산을 건너오는 삽상(颯爽)한 바람이거나 따스한 햇살의 체온을 전달하는 힘을 가진 감동의 산물로 남는 이유가 정서의 고급한 확장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연정의 정서는 포용의 이미지가 가득하고 기독교인이라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시를 일별 했을 때 느끼는 감상이었으며, 자칫 종교인의 한계 -

시에 담는 정서는 천편일률이라는 고정된 생각을 예외로 느끼는 것 같다. 사랑이라는 의도에 충실한 인상이 커버하는 점이다. 이점은 “머리말”에서 포착된다는 점이다.      

삶이 산에 오르는 비유로 시작한 사고는 ‘주고받아야 인생의 살맛’을 감삭할 수 있는 있다는 뜻과 나이가 지긋한 어머니의 고통 어린 노년의 삶에서 수족(手足)을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일이 기쁨이고 행복이란 사실, 타인의 보폭을 맞추고 더불어 체온을 나누면서 사는 일생 – 아가페적인 이타행(利他行)의 강조가 두르러 져 보인다. 이 같은 소회는 시인의 삶의 뜻이요 사상의 고정이라는 점에서 시의 특성과 맞물려 가고 있다. 이제 그의 의식을 따라 정신여행을 해보기로 하자.     


2. 사유의 깊이를 방문하기     

        

1) (휴머니즘     


물은 생명의 진원이라는 점에서 시적 상상의 깊이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가의 윤회 사상을 내포한다. 이는 물리학에서 질량 불변의 법칙을 증명하는 뜻이 될 수도 있고, 노자의 겸손을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로 상징했었다. 땅과 대칭을 이루는 물 또한 온갖 생명을 키우는가 하면 땅에서도 같은 이미지의 이치는 접합된다. 결국에는 땅과 물은 생명체의 고향이면서 원형이정의 순환을 가져온다. 모든 물상은 물과 흙이라는 두 요소를 통해 존재를 형성하고 또 생의 의미를 확장하는 터전 -

물이란 호수, 혹은 강과 바다 등의 이미지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역경과 평화 혹은 격렬한 통증을 비유하면서 인간의 의미를 동반한다. 흙과 물은 변화를 수용하고 거짓의 몸짓이 없다.

모든 생명체는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또 물에서는 용해하고 섞이지만 거부가 없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김연정 시인은 <눈><장마><Como호수><거제 앞바다><장대비><손잡고 가는 길><호수><섬진강><채석강><폭설>등의 시에는 물의 이미지가 변용과 변화를 되풀이되면서 시의 몸체를 건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파도가 출렁이면서 

유희를 즐긴다.     

그리움을 닦고

애환을 녹이고

고뇌를 삼키며

신비로 당긴다.     

너털웃음에

반기는 환희가

단비에 눈물 섞어      

퍼 나르고 

담아 오는 

미지의 꿈을 안고     

허우적거리며

대나무 마디마디에

추억을 담아 

홀로 서려고 

울다가 웃는다.     


           거제 앞바다     


바다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접근된다. 왜냐하면 바다라는 대상은 곧 세상의 중심이고 이곳을 지나는 일은 고통과 환희 혹은 기쁨과 행복이 교차되는 공간으로서 역할이 있다.

오고 가는 일이며 그리움 혹은 허우적거리며 울고 웃는 -

추억을 쌓으려는 발상은 결국에는 살아가는 도정(道程)이면서 일상의 감수성이 교차하는 이미지에 이른다. 시의 상징은 인간의 행위를 사물의 특성에 묶어 하나로의 동화를 이루는 절차로 수용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분이 없는 하나이면서 둘이 포개진 것 때문에 신선감을 고취하는 길을 만들게 된다는 뜻이다. 김시인은 물에서 의식의 전개를 상상의 높이로 지향하면서 지상의 사물에 애정을 투영하는 생각이 두드러진 비유를 구사한다.      

<호수>에서는 안정된 마음의 상징이 따르고 -

‘호수를 따르며 웃는 나팔꽃/거스리는 감정을 휘어잡으니/백조의 몸짓이 찬란하다’와 같이 안정된 호수에서는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고 여기서 ‘백조의 몸짓이 찬란’하다는 화희의 순간을 정밀(靜謐) 감으로 채득 할 수 있는 발견과 ‘휩쓸었다./콸콸 흘러/흐느낌 소리/번갯불 무엇을 했는고’(홍수)에서는 의식이 잠재된 분출을 눈 여기게 한다.     

사물이 살아 생기를 얻는 <장맛비>엔 ‘네가 참 좋다’의 순수한 발언 등 웃고, 울고 혹은 억제를 되풀이하는 물은, 시심(詩心)의 정서를 일괄하는 표상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느낀다.

물론 이동에서 소망을 담는 역할을 한다. 

왜 그런가 하면 머물러 있으면 이미 물이 아니고 부패와 악취를 풍기는 비유가 되기 때문에 이동하고 움직이면서 때로는 홍수 – 안과 겉을 완전히 뒤집으면서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새로운 표정으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장대비 쏟아지는 날이면 

속내를 활짝 열고 

향긋한 여유를 즐기고 싶다.     

합리적인 말이 아니어도 좋고

속을 채우지 않아도 괜찮은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     

따끈따끈한 부침개를 놓고

개구쟁이처럼 당기고 밀치며

웃음으로 먹고 싶다.     

편안한 마음 하나 얹고

구수한 된장국을 퍼 나르며

시간을 굴리고 싶다.     

산골짜기이면 어떠리

초가지붕에 박 덩굴 있어도 좋고

흙 묻은 양말이 모이면 어떠리

가슴으로 둘러앉고 싶다.     


                 장대비


미지(未知)의 세계를 유영하는 의식 여행이다.

이는 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차 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의식을 옮김으로써 새로운 정서를 흡수하고 이를 통해 기쁨과 깨달음을 얻으려는 발상이 엿보이는 듯하다. 1연에 어미 ‘여유를 즐기고 싶다’와 2연 ‘대화를 나누고 싶다’ 3연의 부침개를 ‘웃음으로 먹고 싶다’ 4연 화목한 ‘시간을 굴리고 싶다’ 마지막 연의 소박한 사람의 체온으로 ‘가슴으로 둘러않고 싶다’의 소망 – 싶다 의 희망이 장대비 내리는 날에 다가온 꿈이다.

물리라는 매체를 통해 이루려는 꿈이고, 이는 질박(質朴)하고 소탈한 소망일 뿐이지만 쉽게 이룰 수 없는 공간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한결같이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서민의 생활이라는 점에서 체온에 따스함을 감염받게 된다. 꾸밈이 없는 사람들의 ‘스스럼없는 대화’는 속이고 꾸미는 사람들의 일상을 벗어난 진실의 소망이고 어린 시절에의 순박한 동심으로의 희귀를 가질 때, 진실이라는 힘이 발원하는 웃음과 꿈, 구수한 된장국을 격식 없이 먹을 수 있는 편안함의 공간을 그리워하는 열망이 된다.     

초가지붕 아래 소담한 사람들이 티 없이 맑은 가슴으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공간을 향한 바람-

깎고, 바르고, 꾸미고 - 

사기꾼들이 곡예를 하는 장식의 마을이 아니라 포근한 -

모든 것이 용해되고 용서되는 그런 공간으로의 이동은 장대비를 통해서 이를 수 있다.

이런 꿈을 꾸는 김 시인의 사고에는 신의 음성이 깃든 진실의 공간이 암시된다.

결국 물은 시인의 소망에 이르려는 촉매의 이동을 자극하는 이미지라는 점에서 중요함을 암시하고 있다. 

순수는 깨끗함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눈(雪)은 이런 정서를 자극할 뿐만 아니라 결국 눈물로의 진실을 상징하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세상을 덮어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화목을 상징하게 되고 사람이 도달하고 싶은 이상향의 도달점을 실현하는 색채공간으로 화(和)한다.



무엇을 덮고 싶어

소리 없이

줄을 타고 내려오는고     

아픔을 덮고

얼룩진 얼굴을 지우며

너와 내가 파놓은 고랑을 메우려나     

누구를 위해서 

침묵으로 내리고 

나무 팔에 자꾸 앉나.

가지들의 외침을 삼키며      

새벽을 통통 두드리며 

백지를 선물하려고 

덮고 또 덮으며 

새로움을 열어주나.     

                           ()


김시인에게 비유로의 사물은 시인의 생각을 나타내는 의사물(疑似物)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생각은 사물의 전체 기지를 나타내는 상징의 통로를 확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눈(雪 )은 김시인에게는 두 가지의 역할을 나타낸다. 첫째는 세상에 포장하는 순수의 결정체이고 둘째는 사물을 감싸는 포용의 대체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모성의 발성 곧 시심(詩心)을 전체로 통합하려는 의도와 일치가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시인은 언어를 포장하여 곧 자기를 나타내는 우회의 기교를 사용하게 되는 아주 멋진 은어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2. 울타리 만들기         


휴머니즘은 인간사를 처리하는 처방 약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사는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는 일이 모두이고 이를 벗어나는 일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이 있음은 곧 고통의 물살이 다가오는 일이고 이를 피할 수 없는 숙명 앞에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가의 문제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자세로서의 삶-

이는 전적으로 선택적이다. 에피큐리언에 욕망의 포로도 있고 자타 공존의 에로스적인 삶, 마지막으로 종교의 헌신인 아가페적인 생활 등 이는 전적으로 선택할 문제이다.

문제 앞에 휴머니즘의 명제는 변해왔다. 중세기에는 종교로부터의 인간해방, 산업사회에서는 인간소외와 빈부격차 그리고 작금의 세기엔 인간의 고독과 소외에서 오는 인간이 해방의 주제는 시대의 고비마다 차이가 분명 있었으나 사랑의 자유를 주는 일에 휴머니즘의 몫은 변함이 없었다     

중세기 신의 절대명령을 비판한 소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에서 주인공은 태어나자마자 ‘술이 마시고 싶다’를 말한다. 그리고 29세에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선물로 성(成 )을 물려받고, 그 중앙에 ‘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라는 말을 써놓았다. 이는 모든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암시하는 발성으로 당시의 휴머니즘은 뜻했다. 그리고 현대엔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과학메커니즘에서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이나 『심판』 『단식광대』 등은 소외와 불안과 부조리의 비의(悲意)를 나타내는 작품들이었다. 어느 시대에서나 인간을 사랑하는 명제는 영원의 가치로 승화하는 목록이기에 시는 그런 중심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가슴으로 터진 길 찾아

사랑을 부르고 힘겨움을 떨치며 

곡예사처럼 줄 위를 걷는다.     

치솟으려고 두리번거리다가

속도감이 주는 후련함으로 

짙은 향에 취해 엄마 품 깜빡 잊고     

길을 가로지르는 아가 울음

상처가 내린 차단기

밟으며 지나가려는가     

부리가 뿌리를 잡듯이 

너와 나 손잡고 가는 길에

보폭은 거미줄 위에서 맞추려나   

   

               손잡고 가는 길』   

   

위난(危難)과 어려움이 다가오는 생활은 여유를 갖지 못하고 불안을 증폭시킨다. 일상의 곡예는 항상 엄습하는 이름이고 이를 벗어나는 사위(四圍)의 길은 막혀 있을 뿐 해답이 묘연한 나날에서 삶이란 이름은 고단할 수밖에 없을 때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

종교는 이런 길을 제시하는 임무에서 인간을 위무(慰撫)하는 몫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길을 만들지 않는다면 -

손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다. 즉 ‘뿌리와 뿌리가’ 손을 잡음으로써 너와 나의 사이엔 강물이 없어지고 사랑의 따스함이 서로의 혈관을 이어가는 공간을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다. 

이 같은 울타리는 헌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헌신에는 사랑의 물기가 필요하고 조화의 이룸을 만들 때, 사랑의 영역은 무한의 크기를 자랑하는 일로 돌아간다. 이런 무한의 경지는 ‘짙은 향에 취해 엄마 품 깜빡 잊고’의 집중된 경지를 만들게 되기에 『보듬은 울타리』에서 ‘가슴을 사르르 녹이고/오순도순 알콩달콩/가는 나침판 어디에 있는지’의 녹임과 알콩 달콩의 체온을 교환하는 조화로운 세상을 이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모든 기력이 쇠잔해지고 이로부터 혼자 살아가기 어려워 일정한 의식 처가 더욱 필요해지는 것이다. <잊지 마소서><노인의 바람> 등은 노인에 대한 배려의 정감이 있는 시들이다. 꿈은 젊음의 특권만이 아니라는 『잊지 마소서』/늙은이들의 꿈과 낭만도 /꽃이 지고 또 피어나듯이/그대의 가슴같이 살아있다. <잊지 마소서>를 간곡히 주문하는 시인의 마음은 소외와 고독에 대한 성찰이 아니면 찾기 어려운 말이다. 평등심은 참된 사랑이고 그 사랑에는 신의 뜻이 들어있어 따스함을 배가하는 에너지를 느끼게 하고 있다      

잡으려는 용트림으로 

이웃에게 짐이 되지 않고

선구자의 길이게 하소서     

눈으로 바라보이는 끝자락이

정으로 얽으려는 욕망덩이를 

들꽃으로 살게 하소서.     

           노인의 바람 중에서』      


‘이웃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소서 의 바람은 건강이 해결할 일이지만 한계 앞에 이르면 처참해지는 에필로그를 맞아야 한다. 그렇기에 노인의 문제는 해답이 묘연하며 방황하게 된다. 결국 김시인의 처방전인 ‘선구자의 길이게 하소서’의 소망이 불을 켜야 할 것이다. 

아울러 노년의 삶이 싱싱하고 향기 높은 ‘들꽃으로 살게 하소서’의 기도문은 노인 누구나가 가져야 할 이름이라면 희망의 높이는 찬란할 것이다. 울타리 만들기는 의식과 보살핌의 사고는 김시인의 정서 속에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자리하면서 시의 부축을 받고 있는 느낌이 강한 것도 종교적인 헌신과 일치하는 강하게 드는 느낌이다.           


3. 에필로그 하면서      


아직도 수많은 김시인의 주옥같은 시는 많지만 일일이 열거할 수 없어 의미가 넘치는 시만 빼내어 나름대로 유추하였다.

한 사람의 시에는 그 사람의 세계가 보편성을 확보할 때, 감동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김연경 시인의 시에는 신을 신봉하고 있고 편견의 늪을 빠져나온 데서 투명하고, 누구에게나 사랑을 전달하는 에너지로의 힘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는 그만큼 시적인 재능이 상징의 숲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만드는 일이 되는 것이다.

물이 시적인 정서를 이루면서 이동하는 메시지로의 작용을 하는 일면 눈(雪)이 사랑과 헌신으로 시인의 의도를 나타내는 이미지의 역할에 헌신하는 상징이라면 보살핌의 울타리 만들기는 현실의 어둠에서 희생으로서의 기독교의 정신으로 수행하는 시인 스스로 암시를 주고 있다고 본다.

길이 아가페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일이라면 꿈과 갈증을 갖는 것은 현실에 사랑을 베풀려는 모성애적인 헌신을 달리 표현하는 시적 묘미가 된다. 

지금까지의 논지를 종합하면 김연경 시인의 시는 사랑을 어떻게 실현하는가의 대한 고민이면서 실천에 대한 예지적인 고뇌를 언어로 포착하여 풍경화 같은 시를 쓰는 시인이라 하겠다.   


  

2024. 05.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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