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이상과 창백의 표정]

1. 시심의 창조 발동

by 이승섭 대중문화평론가

창조의 기교와 표정 만나기는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눈으로 보고 오는 것인지 아니면 구불구불한 길에서 오는지 그것도 아니면 직선의 고속도로 길에서 오는 것인지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이렇게 물으면 보일 것도 같고, 올 것도 같지만 사실은 그런 대답은 불가능의 안갯속에서 모호를 헤매는 일로 끝이 난다. 시인들 누구나 자기 시의 행로를 의문으로 설정한 경우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또는 어느 순간에 시심의 발동이 시작하고 얼마 동안 의식의 중심 안에서 느닷없이 사라지는가를 헤아리기 위해 고심하고 곰곰이 않아 정좌를 해보았을 것이다. 만약 그런 고뇌의 길을 한 번도 갖지 않았다면 그 시인은 쓰는 일에만 머물고 말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를 알고 또는 정립하면서 진로를 설정하는 행로에는 어긋남이 없지만 무작정 길을 가는 나그네는 초라한 행로의 비틀거리는 주인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원래 고민의 산물일 뿐 아니라 때로는 환희의 풍선을 타고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하는 이중적인 표정을 관리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시는 소설과는 달리 의식으로 엮어가는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인의 이름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무의식에서 충만함이 들어온, 경우도 있고 더러는 의식의 명확한 눈으로 바라보는 하이퍼의 섬세함도 구분되어야 하는 그런 알 길이 없는 단애의 벼랑에서 건져 올리는 시심도 있고 또는 평온하고 느긋한 행복 속에서 향기를 피우면서 나오기 때문에, 시는 예측 불허의 심연에서 확실히 만나는 것이기에, -

아울러 정의하기 어려운 이름일 것이다. 어떻든 시는 순간보다 빠른 찰나를 가로지르는 섬광 같은 이름이라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토마스만은 예술가의 임무는 즉 생기(to animate)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예술은 선에 가깝고 친절성에 뿌리가 있으며 화합을 위해 위할 뿐이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시가 거창한 목표에 헌신하는 것도, 아니며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기력한 허무주의자의 독백도 아니다.

생기와 발랄, 위해서 즐거움을 이어주는 때로 단순하기도 하고 더러는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성을 대변하는 임무에 헌신하는 일이 시인의 역할이다.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삶의 이야기에 목적이 뚜렷하고 상상으로 떠나는 이상의 꿈이 첨가될 때 조미료의 맛깔스러움은 배가 될 것이다. 언제나 시인은 심심풀이가 아니라 꿈을 담아 대상에게 즐거움을 주는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한다.

2. 그렇다면 몇 가지 조건이 수반된다.


관(觀 )이란 “보다” 자세히 보다. 보이다. 드러내다. “명시하다.”의 의미가 들어 있다.

누가 일을 할 경우, 우선 정립되어야 할 것이 대상에 대한 목적의식이 선명할 때 결과는 더욱 명확한 답안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것도 목적에 대한 정립이 확고할 때의 경우와 없을 때의 경우가 확연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언어의 조합일 뿐 이리저리 무엇을 시로 표현하려는 목적성에 대한 헷갈림이 나타나고 후자의 경우엔 비록 짧은 응축의 경결함의 언어에 의미의 숲을 이룩할 수 있게 된다.

무작정 길을 걷는 나그네와 목표를 정하고 길을 가는 비유와 다름이 없다는 뜻에서 대부분의 시에 함정은 단순히 언어의 유희에 빠진 나그네들이 많다. 왜 시를 쓰는가. 그리고 무엇을 의미로 구축하는가의 대한 자문자답이 있고 난 후에 대상을 관찰하고 투시하고 난 뒤에 문자로 의식을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이가 깊어지면 과거 지향형으로 바뀌고 앞에 있을 것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과거 추수의 길을 확대하는 경향이 다분하여진다. 그러나 지나치면 나태의 그물에 걸리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개성의 문제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아, 고향에 돌아와 혼자 여기 서 있네.


신중신 <귀향 시초> 중


어린 시절 기억이 깊은 나이임에도 기억에서 여전히 흔적에 매몰된 시심이 아쉬움으로 나타난다. 넓고 컸던 골목이 기껏 스무 걸음 남짓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어 파릇파릇하게 고개를 쳐들었네. 의 현상으로 다가와 문을 두드린다.

시의 중심은 “혼자 여기 서 있네”에 모아들고 지금은 “목이 쉰 노래”를 허공에 빛바랜 꿈의 파편으로 회상의 길목을 지키는 오늘의 모습이 처연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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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금요저널 주필. 칼럼리스트. 대중문화평론가 전(사) 한국 한울문학 예술인협회 회장 3년 역임. 한국 예술인협회 사무총장 역임 (작가나 시인이 되고자 하시는 분만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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