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적인 정서의 흐름
시는 어디서 오는가에 대해 우리는 의문에 꼬리를 달지만 모두가 의문이다?
시의 출현은 누구도 해석과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시가 상상의 길을 달려서 문자로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은 궁극적으로 모호의 숲 속에서 의미를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 밀레토스학파의 아낙 시 메네스(Anaximenes)는 제일의 실체를 공기라 말했으니, 영혼은 공기이며, 불은 희박해진 공기이다. 공기가 응축되면 처음엔 물이 되며 더욱 응축되면 흙이 되고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돌이 된다고 주장했으니 이는 서로 다른 물질 간에 차이가 응축의 정도에 따라 양적인 차이로 변하는 주장에 쉽게 동화되는 이론은 아니다.
시의 경우도 독일어로는 응축이라 한다.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에 따라 한 편의 시는 판도를 결정하고, 표정을 만들고, 사물의 형상을 축조하여 독자를 감동으로 만들 때, 시의 길은 확실하게 있지만 정작 어떤 경로와 설계에 따라 다가오는 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탄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부유(浮遊)의 공기에서 변화하여 돌의 마지막 경결(硬結)의 경지로 얼굴을 내보이는 일은 철학이 주장하는 창조의 문법이지만 시에 대입해서는 설명이 용 이해, 결국 시인은 공기에서 물 혹은 불 더러는 돌이라는 이미지의 구축을 통해 자기만의 세계를 보여주는 존재-
창조자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인은 문학에서도 가장 맨 앞자리에 놓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창조라는 말에 근접한 이유에서이다. 이는 정신과 신념의 문제로 바라보는 결과에서 존엄의 가치를 획득하는 이유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제 식물 정서의 이영신 시집을 한번 들여다보고 그의, 정신의 가치를 보고자 한다.
그의 시집을 들여다볼 때 전체의 인상과 세밀한 분석의 두 가지를 통합으로 보면 시인의 정신을 정확히 추측할 수 있다면 이영신의 시는 식물 정서와 정신의 흐름은 그런 방향으로 진행됨을 의미에 두고 싶다. 대체로 본다면 내적인 정서의 충실도가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들어 있는 듯하다.
그리고 삶의 무게 또한 무탈하게 넘어간 관찰법이 우선하며 작고 섬세한 정서가 많은, 비중을 감당한다면 시인의 시는 거칠고 황량한 도시 메커니즘의 요소와는 반대로 솔직하고 담백한
전원 정서의 흐름이라 보겠다. 반짝이는 시냇물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2. 정서와 그 표정들
우리는 마음이 어디 있는가를 묻게 되면 늘 곤경에 처하고는 한다. 동료나 후배들이 가끔 마음이 어디에 있는 것이냐고 물을 때면 그렇다면 마음을 가져오라고 한다. 깨달음을 위한 비유이겠지만 여기서 인간의 마음이나 대기의 공기나 공(共) 히 없는 것 같지만, 있음으로 인정을 말하는 것은 가장 확실한 비유가 아닐까?
사람이 길을 가면서도 마음이 가는 것인가 아니면 두 발이 가고 있는 것인가를 묻는 일은 너무도 싱겁고 웃기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지시에 따라 발은 수행의 임무를 다하는 이치에 이르면 마음은 분명 인간을 조종하고 또 무언가 큰 역할 수행하는 이름에 다름이 없다는 뜻인 것이다. 여기서 정신과 마음은 하나이면서 다른 이미지로 시의 생산에 개입하게 된다. 마음은 정신의 흐름이고 정신은 줄기를 형성할 때, 비로소 일체화(ldenttity)된 이미지의 대상과 시인의 마음이 하나로 통합되어 시의 근간을 이룩하게 된다.
<봄이 마음에 가득> <아직 때는> <봄에 피는 꽃> 또한 <봄은 주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을 감각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키다리 앉은뱅이 나무에 핀 꽃
화려한 색깔과 향기로
봄이 왔다고 나팔을 불어대며
벌과 나비와 사람을 유혹한다.
가냘픈 줄기 끝에 앙증맞게 피어난
작디작은 꽃 수줍은 색깔로 미소 짓는다
마음 눈 밝은 사람에게...
<봄에 피는 꽃>에서
사물은 마음에서 보이는 것이지 눈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지시에 따라 사물은 제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시적 소재로 이름을 올린다. ‘마음 눈 밝은 사람에게’라는 전제하에 봄의 봄의 모습은 다양한 이름을 갖추고 시로 출몰한다. ‘화려한 색깔’ ‘향기’ 그리고 ‘나팔을 불어대며’ 유혹의 손길을 넓힐 때, 시인은 작은 꽃에서 의미를 발굴하고 거기에 마음을 보태는 행위가 아름다움을 내세운다. 다시 말해 ‘작디작은 꽃을’ 발견하여 ‘수줍은 색깔’과 ‘미소’를 만드는 행위는 마음이 밝은 사람이라야 가능한 종점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시는 시인 마음의 행로를 따라 문자화의 길을 개척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고 또 현재를 어찌 살고 있는가에 여부는 결국 시와 형상화로 의해 나타난다. ‘작디작은 꽃’에 시선을 한정시키며 이영신의 정서는 ‘수줍다’와 ‘작디작은’ 수식에서 시인의 모습이 투영된 마음의 표백이다.
봄이 보고파 조급한 마음에
길가의 잡초에게 아직도 자는가, 묻고
개나리에게는 앙상한 가지가 볼품이 없다, 흉을 보았지요.
아파트 앞뜰의 목련에게 동사하지 않고 살아있느냐고
걱정스러워 물었지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느긋하게 기다리라 하네요.
<봄은 아직 때가>
휴머니즘이란 인간미를 강조한다. 이는 비단 인간만을 위함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물상에 대해 애정을 갖고 바라보는 태도에서 사랑에 따른 애정은 나오는 것이기에, 이영신 시인도 잡초의 안부와 개나리의 앙상한 가지 그리고 목련에 애정의 눈빛을 보낼 때, 그 걱정은 애정의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의 마음이 우선하는 것이다. 어떤 무생물조차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대면의 방법은 달라진다. 아니마(anima)의 깊이를 방문하면 모든 물상은 살아있는 물활론의 근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느긋하게/기다리라 하네요’. 의 반응은 시인과 꽃과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바라보는 소통의 마음에서 비롯된 상상의 산물이다.
시인은 사물에서 상상의 옷을 입혀 세상을 따스함으로 감싸는 의복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시인이 우선순위의 높이에 있는 이유가 그런 주술적인 발성에서 미지의 문을 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때로는 시인은 주술사의 임무가 부여된다.
왜 그런가 하면 정상적인 정신으로는 엑스타시(extasis)의 고조된 마음에서 두려움이 없는 경지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누구나 절벽이나 벼랑 앞에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오금이 저리지만 시인은 무당처럼 작두날 위에서 걸음을 걷는 신명에 들어가야 참된 시의 경지를 방문하는 이치가 된다.
시인은 아마도 그런 경지는 아닐지라도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이 투명함에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 득의(得意)롭고 특별한 듯하다.
2) 봄의 정서
사람은 계절의 순환을 거치면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진행한다. 오는 것도 그렇고 가는 것도, 결국은 계절 속을 벗어나는, 경우는 없다. 계절이라는 사다리를 오르고 내리고 가 일생이 된다면, 이는 자연의 순환이라는 바퀴에 실려 가는 의미이면서 이를 벗어나는 것은 종착역에 이른 생(生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울러 좋아하는 계절 감각이 선호로 표출된다. 시인마다 다 다르지만 대체로 봄날의 호감도가 높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 시인은 전체의 시 중에서 가을이 <늦가을 비가> <가을 만남에> <가을 인연> <오색 단풍> 등 가을 정서가 나타난, 반면 봄은 압도적으로 등장한다. <봄에 피는 꽃> <봄 눈> <이른 정원의 봄> <양귀비꽃> <봄을 기다리는 자> <봄의 전령> 등 가을과 다른 많은 숫자의 의미는 봄이 시인에게 정서의 제공처가 된다는 의미이다.
올해도 봄을 기다린다
지난해도 기다렸다
다음 해에도 기다리겠지
왜 해마다 기리는가?
언 땅과 마른 가지를 헤쳐내는 새싹들
밝은 연둣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산의 나무들
살얼음 갯가의 버들강아지와 춤추는 올챙이들
회양목 꽃향기에 잠이 깨어 붕붕 대는 꿀벌들
따뜻한 이부자리 박차고 일어나
창문 열어젖혀 가슴속 찡한 내음 들이마시며
구태에서 벗어날 힘과 용기를
자연에서 얻으려는 무의식 속마음의 소리 때문일까?
소한 대한 지나면 입춘을 기다리다
정월 대보름달 품어 안고
우수 추위 경칩 추위마저 기다리는
마음이 마냥 즐겁고 가볍다.
<왜, 봄 기다리는가.>
아마도 봄은 시인에게 기다림의 계절이고 이 계절의 기운을 받아서 삶의 에너지를 공급받는 이미지가 드러난다. 왜냐하면 자연의 상승에 따라 새싹이나 연둣빛 나무들 혹은 춤추는 올챙이들과 꿀벌들의 움직임에서 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박차고 일어나’ ‘가슴속 쨍한 기운을 받고’ ‘구태를 벗어나 힘과 용기를’ 마음속으로 받아 드리는 이유이기에 ‘입춘을 기다린다’와 마음이 마냥 즐겁고 가볍다는 발성이 시심을 자극한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 시인의 봄은 힘과 용기 받아 드리는 에너지 공급의 계절이기 때문에, 봄이 특별한 의미로 작동되는 것 같다.
이로부터 텃밭은 가꾸고 정원에 가지가지의 싹을 키우고 바라보는 재미를 갖고 자라나는 식물에서 정서의 상승을 시로 표현하는 자연과의 한 몸인 듯한 시인이다.
추운 겨울 이겨낸 외로운 들판에
민들레, 꽃다지, 냉이 꽃이나
팔랑팔랑 봄 나비를 하늘하늘 맞이한다.
향을 맡아 마음 설레며
흥겨운 벌들의 노랫소리 찾아 듣고
풀꽃과 봄 나비의 춤사위에 빨려든다.
<이른 봄날>에서
봄은 자연의 기운이 일어나는 이미지가 역동적인 느낌을 발산한다. 들판에 안개가 피어오르듯 자연의 기운은 생명의 약동을 위해 싹을 틔우고, 또 꽃이 되고 나비가 팔랑이는 것은 곧 시인의 정서가 활동의 역동성으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노래와 춤사위로 흥을 돋우면서 생의 행복을 발견하는 공간으로 지정된다. 여기서 이 시인은 비로소 생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시의 표현에 몰두하는 봄날의 시인이다.
3) 생의 색깔
누구나 자기 삶의 색깔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악착한 운명을 이끌기 위해 땀을 흘리는 경우도 있고 더러는 순수를 지키기 위해 생의 목표를 설정한 사람의 경우도 있다. 어떤 것이든 삶의 방법에서 자기를 위한 노력이 땀을 흘리는 일이 다반사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만의 색채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예술은 인간의 생을 그리는 작업이다. 어떤 방법으로 표현하는가는 개성이 만드는 삶의 표정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살아가는 이야기의 전개는 음악이나 미술 혹은 문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어떤 전개 방식을 선택하는가는 작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는 삶의 방법과 밀접한 연결 고리를 갖고 나타난다. 평탄한 삶을 살아간 사람은 그런 색깔의 진행이 보이고 역경에 빠진 사람의 경우는 그런 굴곡이 표현의 과정을 이어간다. 이 시인의 시는 아주 평탄하다. 말을 바꾸면 그의 삶은 참혹하거나 굴곡의 계곡을 지나온 느낌이 아니고 비교적 안온한 도정이 시로 환치된다.
오색 단풍잎처럼
자기 색깔대로 살며
만족을 느끼며 사는 삶이 있을까
오색 단풍잎처럼
전체의 조화로움 속에
자신을 묻어 버리는 삶이 있을까?
오색 단풍잎처럼 사그라지는 것도 모르고
온몸으로 불태우는 삶이 있을까
오색 단풍잎처럼 오유지족(五唯知足) 하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색 단풍처럼>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힘겹고 어려운 삶의 벌판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위해 독특한 개성의 색채를 향유한다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리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개성의 표출이라 하지만 개성은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했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는 우회적인 표현이라 한다. 직접 표현은 도덕 교과서의 지시문이기 때문에 시의 표현은 항상 Amdiguity의 영역에서 허용치 많은 자유를 누리는 특색이 있다. 이는 시인의 시가 우회적인 자기표현의 방도로 시심을 자극하는 것은, 설명하기 위함이다. ‘오색 단풍잎처럼’에는 화려한 이미지가 담겨 있다.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를 염원하는 시인의 마음에는 화려한 생의 색깔이 펄럭인다. 꾸밈이 없는 단순함 속에서 나타난 수수 함이고 아름다움이다. 이런 미를 구축하기가 가장 어려움일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함 속에서 의미를 담는 일은 원숙을 지나냐 가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릇에는 크기가 있다. 비단 용량의 문제를 벗어나 생의 질을 거론할 때, 작은 그릇은 작게 쓰이고 큰 그릇은 큰 음식을 담을 때 쓰이는 것처럼 그릇은 결국 자기의 삶의 방법을 선택하는 의미로 결정될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며 받아 든
보이지 않는 빈 그릇 하나
이마에 땀 흘려 물 주고 잡초 뽑으며
자신만의 색깔과 향과 모양으로
정성껏 멋스럽게 가꾸어 가는 인생살이
깡충거리는 토끼
엄금 거리는 거북이 부러워 않고
자신의 속도를 즐기며 채워간다.
<빈 그릇>에서
인생은 누구나 빈 그릇으로 태어난다. 불란서의 장 쟈크 룻소가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살아가면서 교육과 체험, 지식 등의 따라 평등의 기준이 무너진다는 말- 시인의 주장처럼 빈 그릇으로 태어났지만 살아가면서 그릇의 용량이나 담기는 내용의 가치 등에서는 차이가 난다. 이 주장은 옳은 일이다. 평등이란 찾아가는 것 혹은 확보하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일 때는 이미 불평등을 조장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력해야 하고 또 땀을 흘려 공부해야 한다는 명제가 성립된다는 뜻도 첨가된다. 시인은 빈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또 그런 생을 살아온 느낌을 준다.
2연은 아마도 생의 의미를 압축한 시적 표현이다. 땀 흘려 물을 주는 주도적인 삶의 태도인 ‘잡초 뽑으면’의 능동적인 개척의 생, 이런 생을 산다면 자신만의 색과 향기를 발휘한다는 주장은 가장 합리적인 인상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속도 즐기며 산다’는 확신이 설득력을 갖는다. 결국 태어나서 땀과 노력으로 자신의 생을 채워나가는 보폭에 ‘즐기며 산다’는 이치에 적극적으로 공감의 뜻이다.
인생의 구분에는 비극과 희극으로 나뉜다. 물론 이 둘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그 비중에서 어느 쪽에 가까운가를 가늠하는 일은 일생의 삶으로 정리된다. 결국 빈 그릇의 상태를 얼마나 만족으로 확충하는가에 여부에 따라 비극과 희극의 판별이 나타난다면 이 시인의 땀과 노력으로 일군 생의 이미지가 화려함으로 채색된다.
여행의 설렘에 대한 <짐 꾸리는 재미>와 배움을 강조하는 <배움의 장 고속도>등을 읽으면 노력하면서 꿈을 키운 역정이 남다름을 인식하게 된다.
4) 인연의 줄기
순리는 삶의 방법이다. 그 과정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반복이 삶이라는 줄을 이어 나가는 길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쪽에서 감기면 다른 쪽에서는 되감기고의 인연은 결국 태어남에서 죽음에 당도할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세계 內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 공간에서 사람은 인연의 줄에 자기의 운명을 싣고 따라가는 것이다. 이 시인 정신에는 비록 두드러진 의미는 아닐지라도 인연의 강조가 바큇살을 굴린다.
모든 만남을 섭리함은 하늘이나
매일 자유로운 선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남을 귀하게도 천하게도 아름답게도 만들어 가지요
오늘 만나는 사람 인연으로 맺어졌음에 감사하며
호기심이 아닌 관심으로 바라보면
험난한 미지의 길 안내하는 길잡이일 수도
아전인수보다는 역지사지하며
동병상련하는 동반자일 수도 있어요.
길잡이나 동반자가 되거나 되어주는
기쁨과 보람 속에 아름다운 만남이 익어 가지요.
<아름다운 만남>에서
만남에는 기쁨이 있고 그 끝이 불행한 만남도 있지만 이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의 몫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인연이란 좋은 결과를 말하는 것이기에 인연에 감사하는 시인의 마음은 보살도를 실천하는 순수함을 바라보게 된다. 이는 나를 버릴 때 나를 얻는 일이고 나를 무심으로 흘려보낼 때, 나는 다시 살아 돌아오는 대면의 기쁨이 있을 것이다. 이런 태도는 ‘역지사지’라는 입장으로 바꾸어 생각할 때, 사고의, 넓이가 감동을 불러오는 이유가 된다.
이런 생활의 태도는 종교적인 발상이기보다는 삶의 자세가 ‘나보다는 타인을 생각’하는 인자함의 이유로 돌리면 아름다운 만남이 꽃이 되는 것 같다. 인간이 꽃이 되는 경우는 마음의 꽃이 피는 것이라 가정한다면, 이를 위해 향기 나는 삶을 사는 길을 갈 수 있을 때, 그 자신이 향기를 품은 꽃으로의 존재가 될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향내가 있다. 이는 자기가 느끼기보다는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 나오는 향기일 것이다. 나를 위한 이기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타 공존의 태도를 목표로 할 때, 향기는 강한 전파력을 갖고 기쁨을 만드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 시인의 정신 속에는 이런 요소들이 시의 이미지 구축을 실현하는 맛깔스러운 시로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우연히
인연이 닿아 필연으로 맺어진 사람들
새로운 끈 잇기를 시작한다...
민낯을 보고 보이며
미운 정 고운 정 매듭지으며
끈을 이어간다. 5년 10년...
얽히고설킨 매듭들
감사 보자기에 주워 담으며
대를 이어간다. 50년 100년...
<인연의 끈 잇기> 중에서
사람은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왕래의 삶을 살아간다. 어느 것이 우연인지 또 어느 것이 필연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만남을 소중하고 아끼면 필연이 되고 필연은 곧 자기 삶의 확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부여된 생을 성실히 혹은 아름답게 가꾸면 필연의 벌판은 넓고 푸른 생의 일름이 될 것이다. 부대끼고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인연의 필연일 것이다. 시인은 ‘얽히고, 설킨 매듭들/ 감사의, 보자기에 주워 담으며’ 오랜 시간을 이어갈 것을 주문하는 뜻에 생의 의미를 간직하고 싶은 발상이다.
여기서 우연인가 필연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필연의 줄기를 잇고 싶어 하는 진정한 마음의 표현이 더욱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 강조가 된다.
지란지교를 꿈꾸며 아끼듯
새로운 만남에 마음 설레며
책 속의 사람 찾아 등불 밝히고
자연의 지혜 마중하러 들로, 산으로 나간다.
<만남의 계절>
지혜로운 삶이란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을 뜻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오늘을 버릴 수 없고 더욱 소중하게 바라볼 때, 삶의 모습은 진실을 담아내는 것이다. 서로를 아끼는 우정의 소중함에서 인연은 내일을 약속하는 공간이 만들어지고 여기서 내일로 다리를 놓아 더불어 사는 화목한 공간에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상징에서 이 시인의 마음은 ‘길고 짧은 인연의 끈’에서 어머니와 같은 자애의 시심이 나오는 것 같다.
3. 시심의 그림
시는 시인의 마음을 그리는 표현이라면 모든 시는 그런 공식적인 표현에서 개성이 담긴다. 어떤 시인은 추상화나 난삽함이 얽히기도 하고 더러는 구체적인 풍경이 아름답게 정리된 풍경화도 그려진다.
이 시인은 구상화의 세밀함과 정서의 강물이 시원하고 따스함을 간직하고 계곡과 들판을 흐르는 다정한 감수성이 인상적이며 마음이 풍부한 그런 시인-
이는 오랜 연륜의 깊이에서 나오는 사근사근함이 부드러운 손길로 만든 경치이다.
그런 시를 그리는 아주 온화하고 봄날의 따스함을 보여주는 그런 시인이다.
2025. 10.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시인
[필자의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