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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Jun 02. 2023

'시니어 사절 카페'



 ‘노 시니어 존’ 카페라고? 5월 초 등장한 뉴스였다. 카페 유리문에 써 붙인 60세 이상 어르신 출입제한이라는 괄호 안 글자들이 선명했다.      


 설마 60세 이상 모든 인간을 못 들어오게 하려는 건가? 몇몇 진상 손님 때문에 신분증 검사라도 하겠다는 건지? 아니나 다를까 노인 차별이라는 반론이 제기됐다. 한편 누군가는 카페 운영자의 영업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냈다.     


 그리고 들려온 이야기 하나. 카페 여사장을 향해 일부 노년 남성 고객들이 성추행적  언어를 지속적으로 구사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노 시니어 존’으로 쓰고 ‘노 꼰대 존’으로 읽어야 하는 게 사태의 본질이었던가. 씁쓸하다.     


 그렇다고 그런 극단적 구호를 내건 카페 측을 지지할 생각은 없다. 특정 사례에 일반화로 대응한 방식이 과연 적절했을까? 또 다른 한편, 개별 카페의 영업 방침에 흥미 위주로 접근한 미디어의 관점이나 뉴스 소비자들의 과잉 대응도 못 마땅하긴 마찬가지. 이를 둘러싼 논쟁으로 이 시대 뇌관이 되어가는 세대 갈등에 트리거가 될까 두렵다. 개별적 노인 차별 선언 사례가 노인 혐오로 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격앙됐던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내게 묻는다. 나는 어떤 노인인가? 어떤 노인이 되고 싶은가? 어떤 노인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초고령사회  진입이 코앞인 이 나라의 거대한 노년 인구 집단이 함께  묻고 대답했으면 한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지금의 60대들이 태어난 1960년대 초반, 일인당 소득은 100 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엔 일인당 4,435 달러. 그리고 2018년 일인당 소득은 마침내 30,000 달러를 돌파했단다.      


 다시 말하자면 이 나라의 65세 이상 인구집단은 후진국에서 태어났다. 나처럼 서남부 곡창지대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거의 농경시대에서 보낸 이들도 숱하다. 30대와 40대들은 개발도상국에서 중진국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던 나라에서 태어났다. 20대들은 태어나 보니 거의 선진국인 나라의 국민이었을 터. 각각 다른 나라 출신인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국민소득은 한 나라를 설명하는 여러 개 지표 중 하나일 뿐이겠지만.      


 모두가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서로 많이 다르다. 살아온 시대가 달라서 경험치가 다른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인정해 왔다. 지구상 유례없는 압축 성장으로 이 나라를 제법 괜찮은 나라로 만든 주역들이 60대 이상임을. 그들의 땀방울과 헌신은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얼마 후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 듣는 이를 지루하게 하는  중·노년 투 머치 토커들이 가정과 직장에 창궐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과잉 신뢰하며 상대방에게 자기 기준을 강요하는 꼰대 고발 사례가 잇따랐다. 마침내 ‘꼰대’는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됐다. 그리고 공영방송 BBC는 2019년 9월 23일에 ‘오늘의 단어’로 꼰대를 선정 발표했다. 웃픈 쾌거다.  

   

 내가 아는 60대 이상 한국인들은 유교적 상하 위계가 분명했던 20세기 중반 출신답게 연장자들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익혔다. 그 위계의 틀 안에서 그들은 안전했다. 체제 순응자들은 시간이 흐르기만 하면 연장자로서 군림할 것도 확실했다. 그러나 세계는 변했다.     


 중진국과 선진국에 태어난 후배와 후손들은 더 이상 옛 시대 게임의 규칙을 믿지 않는다. 국민 소득 3만 불에 진입하면 어느 나라 국민이든 더 많은 개인주의 욕구가 분출한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위계서열 상의 위치보다는 평등 시민이라는 신분을 정체성의 기본값으로 인식한다.     


 입만 열면 전성기 시절의 영웅담을 늘어놓는 이가 있다. “왜 나처럼 못 하느냐?”고 후배들을  깎아내리며 잘난 척을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초중반, 취직 걱정을 할 필요가 없던 대 호황기에 직업 시장에 진입했던 이들이 요즘 취준생들의 좌절과 스트레스를 이해할 수 있을까? 상황이 다르고 맥락이 다른데 산업화시대의 문제 해결방식이 먹히지 않는 조직의 현실을 정확히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자기중심적 사고와 시야협착증이 문제다.      


 퇴직 후 온갖 모임에 빠지지 않는 시니어들 중엔 취미가 자랑인 이들도 꽤 많다. 딱하다. 돈 자랑, 부동산 자랑, 자식 자랑 밖에 할 이야기가 없다니. 이런 경우, 자기 삶의 콘텐츠가 너무 없어 보여 자칫 불쌍해 보일 수 있다.     


 직장 후배들이나 사회 모임의 손아래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이들을 많이 본다. 상대방이 먼저 “말씀 내리십쇼”라고 말하지 않은 경우라면 이건 결례다. “말씀 내리십쇼”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도 존댓말을 쓰는 게 합당하다고 본다.      


 존댓말과 반말은 두 사람 사이의 권력 관계를 일정 부분 반영하기 마련이다. 오랜 관행이라지만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적은 사람에게 반말을 할 권리 같은 건 없다.  반말을 듣는 상대방이  불쾌하다고 느낀다면, 반말은 무례함이다. 연장자들이 무심코 저지르는 언어 갑질 행태, 되돌아봐야 한다.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어”라고 탄식하는 시니어들, 자신의 매너도 이 참에 점검해보는 게 어떨까? 무심코 하는 지적질에 상대가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 또는 요청받지 않고 늘어놓는  충고가 내심 반발을 부른다는 생각도 해보는 게 좋다. 젊은 상대방의 무례가 발생하기 전 혹시 내가 먼저 무례를 저질러 그의 무례를 유발하지는 않았을까? 되돌아보자.      


 내 미국인 친구 하나는 길에서 만난 초딩들에게 존댓말로 길을 물었단다. 서울로 부임하기 전 워싱턴 D.C. 소재 한국어학당에서 정중한 한국어만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자 초딩들은  그를 5분 거리 목적지로 안내한 뒤 일제히 배꼽인사로 정중하게 작별을 고하더라나. 반말 불가 언어생활자의 이 사례는 뭔가 시사점이 있다. 오는 말이 우아하면 가는 말이 고급지다는 것.    

  

 지하철 속 65세 이상 공짜 승객들의 매너도 이야기해보자. 지하철 내 시니어존에는 대개 여섯 사람이 앉는 좌석이 있다. 물론 넘쳐나는 시니어들로 자리가 모자라기 일쑤. 일반석 유료 승객의 좌석을 버젓이 차지한 공짜 승객들이 보인다. 이 부당한 점령을 그저 말없이 참아주는 선량한 유료 승객들. 놀랍지 않은가? 무료 승객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유료 승객들까지 있으니 황송하다. 이처럼 선의를 베푸는 이들에게 “감사합니다” 한 마디는 필수가 아닌가? 아무 말 없이 양보 받은 자리에 불쑥 앉는 노인들을 보는 건  불편하다.     


 지하철 속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노인들은 또 어떤가? 높은 데시벨의 전화 신호음이 끝없이 울려 퍼지는데도 느릿느릿 전화를 받는 이들. “점심에 뭐 먹었냐”는 통화 내용이 다 들리는 것도 민망하다. 귀가 어두워 큰 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으니 양해해 달라고? 천재지변이 아니라면 부디 용건만 간단히 해주시길 바란다.      

 

 최악은 술자리나 사석에서 서슴없이 성적 농담을 유머랍시고 구사하는 시니어들이다. 상대방이 느낄 모욕감이나 불쾌지수는 그들의 안중에 없다. 반발하거나 항의하는 이에겐 듣는 이를 기분 나쁘게 할 의도가 없었다느니, 상대의 넘치는 매력을 칭찬했다느니, 하나마나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부디 자신의 언어생활이 선을 넘지 않았는지 성찰해 보시라. 


또한, 젊은이들 뿐 아니라 자식들과 조카들에게도 예의를 갖춰 대하는 시니어가 되면 좋겠다. 잘못했으면 반드시 사과하자. 아비 어미의 위엄이 훼손될까 걱정된다면 더욱 먼저 사과하자. 딸이건 아들이건 그들은 내가 이 땅에 초대한 귀한 백년 손님들! 마땅히 고운 말과 축복의 언어를 써야 하지 않겠는가? 잔소리도 줄이자. 아들과  딸에게 투하하는 잔소리 폭탄은 상대를 못 믿겠다는 의사 표현이 아니겠나. 

    

 한편 주저하지 말고 젊은 후배들과 아들딸에게 지도편달을 요청하라. 디지털 지진아답게 배우고 싶다고 겸손하게 말하라. 지자체나 동네 문화센터가 마련한 스마트폰 사용법 강좌에 등록해보자. 모바일 뱅킹이나 KTX 티케팅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는 게 자식들에게 민폐를 줄이는 한 방법이다.  

     

 독일인 영성가 안젤름 그륀 신부의 한 마디를 인용한다.      

 “우리 생애의 저녁에 이르면 얼마나 남을 사랑했는지로 심판받을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축복을 주는 존재였는가? 나는 누구에게 도움을 주었는가? 나를 통해 희망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가? 나는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었는가?” 

-책 <노년의 기술>     


 정말이지 나이 먹는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나의 친애하는 시니어 시티즌들에게 다시 한 번 간곡히 요청한다. 20세기 매너에  21세기 매너를 보완해 나가자고. 예의를 젊은 사람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요구하지 말자고. 쌍방적 예의, 상호주의 매너가 동방예의지국의 예의범절이 된다면 더 명랑한 나라가 되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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