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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Jun 25. 2023

사전의료의향서를 등록하다


 내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집에 도착했다. 딱 신용카드 크기의 플라스틱 카드. 생의 마지막 단계에 회복 가능성이 없을 경우 원하지 않는 생명연장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내 의사를 공식적으로 담고 있다. 우송된 의향서와 설명서를 읽고 난 내 남편, 예상대로 많이 놀랐다.     


 “아니, 이런 큰일을 왜 미리 의논하지 않은 거요? 함께 토론하고 결정할 사안인데.” 불편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본다.     


 “이거, 만 65세 기념으로 하려던 건데 자꾸 미루다가 이제야 등록한 거예요. 미리 상의 안 한 건 미안해요.” 사과를 했지만 남편은 입을 비쭉거리며 불만을 표시한다.    

  

 한 달 전, 나는 선릉역 건강보험공단에 갔다. 오래 미뤄왔던 이 ‘거사’를 위해서다. 

    

 먼저 내 신분증을 제출한다. 만 67세임을 확인한 담당 직원이 1대1 설명을 시작한다. 의학적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을 경우에만 적용되는 제도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임종 과정에 접어 들었을 때 심폐소생술이나 혈액 투석, 인공호흡기 등의 인공적 생명 연장 시술을 받지 않거나 중단하겠다는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미리 기록해두는 게 목적임을 강조한다.       


 설명을 마친 직원은 거듭 내게 ‘자기 의지에 의한 결정’인지를 묻고 확인한다. 두 차례 서명하고 스마트폰 번호까지 입력하면 끝! 한 달 후면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의 DB에 등록되고 본인과 가족의 열람이 가능하단다. 이 모든 게 거의 빛의 속도로 진행되니 왠지 살짝 허탈하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내 말에 담당 직원이 대답한다.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게 숙제죠.”      


 빗속을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후련하다. 내 생애 중 스스로 내린 가장 훌륭한 결정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이 의향서가 법적 효력을 가지게 되는 시점은 ‘생의 마지막 단계’라는 판정 후부터다. 그리고 이 판정은 담당 의사와 전문의 한 사람의 의학적 판단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한편, 의향서를 작성한 후, 언제든지 변경, 취소, 철회가 가능하다는 사실도 설명서에 명시돼 있다.     

 

 내 의향서를 손에 쥐고 계속 들여다보는 남편에게 의향서 등록을 권했다. 예상대로 “좀 생각해 봅시다.”라는 답변.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 톨스토이 선생이 말씀하셨대요. 사람들이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요. 우리가 미리미리 입장을 정리해 놓으면 나중에 아이들의 걱정이 줄어들 것 같지 않아요?”      

 “......” 남편은 대답이 없다. 성격 급한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그가 의향서를 작성하려면 최소 5년은 걸릴 것 같다.     


 최근 92세 친정아버지를 여윈 친구 하나가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1년 전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담당의사는 항암제 투여나 방사선 치료가 무의미해진 시점이라는 소견을 보였단다. 그러자 의사인 맏아들이 병원 치료 대신 집으로 모시자고 형제들을 설득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날들이 고통이 적기를 바랐던 형제들, 모두가 찬성했다.       


 당번제 방문 활동이 시작됐다. 아버지의 빛나던 청년 시절, 첫 사랑 이야기도 최소 열 번 이상 들어가며 아버지 곁을 번갈아 지켰다. 노래방 기계를 새로 들여놓고 주말 노래와 춤 경연을 아들딸들과 손자손녀들이 함께 벌였다. 입맛 없어진 아버지를 위해 포장이나 배달로 온갖 맛집 메뉴가 차려지는 파티가 이어졌다. 

     

 간암 발병 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한 아버지는 일체의 생명연장 치료를 사절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한 달 동안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으신 뒤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를 잘 보내드려서 우리 모두 슬프면서도 마음이 평안해. 생각해 보니까 이게 모두 아버지가 병원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확고하게 지키신 덕분이더라고. 사전연명치료의향서의 힘을 실감했지. 그래서 우리 5남매도 모두 의향서를 작성했어.”    

    

 각자 결혼으로 멀어졌던 5남매는 아버지의 마지막 일 년을 통해 어린 시절의 우애를 거의 회복했다는 게 친구의 평가.     


 “자주 모여 웃는 얼굴로 떠들어 대는 자식들에 둘러싸여 있는 게 제일 좋다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어. 아버지 곁에 둘러앉으니까 옛 이야기를 서로 많이 하게 됐지. 언니랑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잠이 들어버려 한밤중 돌아오는 통에 부모님께 혼났던 일, 5남매가 모두 눈 다래끼에 걸려 학교를 못 가던 날, 눈탱이가 부어오른 얼굴을 서로 놀려대면서 종일 재밌게 놀았던 기억까지. 그러다 보니 옛정이 새록새록 돋아나더라.”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그런 순간들이 생전 이별 파티 같은 느낌이야. 아버지가 병원에 계셨다면 갖지 못했을 시간 같아. 아버지의 마지막 일 년이 준 큰 선물이라고 생각되는 거 있지.”      

  

 또 하나의 소득. 5남매가 자주 모인 덕분에 그들의 아들딸들은 덩달아 사촌 간 찐한 우애의 맛에 눈을 뜨게 됐다나. 급기야 사촌 대화방이 열리고 각자 부모의 흉을 보며 날로 친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조만간 친구들 모임에 내 사전의료의향서 카드를 들고 나가 자랑할 생각이다. 의향서 등록을 망설이는 이들에게 아마 제일 잘 먹힐 부분은 마지막 순간에 아들딸의 고민 부담을 덜어준다는 점이겠다. 어쨌든 지금부터 부부 사이나 가족들 간에 의향서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의향서를 작성하고 난 다음엔 어떻게 살 거냐고? 그냥 조금 더 명랑하게 살면 되지 않을까. 의향서가 효력을 발휘할 그 마지막 순간까지는 누구나 시한부다. 이번 생에서 좋은 인연으로 만난 가족이랑 친구들과 재밌게 살면 되는 거다. 괴로울 때 울고 기쁠 때 웃으면서 이번 생의 여정은 쭉 계속 될 것이니. 

    

 이미 노화 과정에 접어든 몸이 온전할 리 없다. 하지만 온전치 않은 채로 온전하게, 괜찮지 않은 채로 괜찮게 살면 된다. 조금 부족한 채로 넉넉하게 느끼면 된다. 아프다고 징징대지 말자. 딱해 보인다. 아프다면 명랑한 투병을, 외롭다 느낀다면 명랑한 외톨이가 되기를 추천한다. 남의 눈에 너무 훌륭하지 않아도 되는 노년을 살아가는 즐거움을 발견할 게 분명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 성인은 누구든지 신청 가능하다. 보건소나 건강보험공단에서 등록하면 된다.  아예 스마트폰 안에 저장되는 모바일 방식도 병행되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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