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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Jul 20. 2022

나를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에, 뭉클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서점이나 가볼까 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서점 나들이를 가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는데, 휴직 후에는 이상하게 잘 안 가게 되었다. 시간이 많다 보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더 게을러진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나갈 준비를 마치고 택시 앱에서 목적지에 서점 이름을 입력했는데 검색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나의 단골 서점은 집에서 거리가 좀 멀어서 주로 택시를 타고 간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터넷 검색창에서 검색을 해보니 글쎄, 얼마 전 폐업을 했다고 한다.


코로나 여파였을까? 몇 안 되는 나의 힐링 장소 중 하나가 없어지다니... 단골집을 잃은 슬픔에 잠시 멍하니 있었다. 요즘은 약국 자리를 찾고 있어서 그런지, 이렇게 폐업한 가게를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아 마음이 안 좋다.




이미 나갈 준비는 했으니 어디라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집 근처의 다른 서점으로 행선지를 바꾸었다. 그 서점은 카페도 같이 하고 있어서 카페인 섭취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카페에서 읽을 책 한 권을 챙겨 집을 나섰다. 카페에 도착해 좋아하는 바닐라라떼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에어컨을 풀가동했는지 잠시 앉아있었을 뿐인데 팔에 소름이 돋았다.


곧 커피가 나왔고 한 모금 마셨는데 음? 내가 생각한 그 맛이 아니다. 메뉴판에 보니 직접 만든 바닐라빈 시럽을 사용한다고 적혀있던데 그것 때문인가 보다. 내 입은 정형화된 바닐라 시럽 맛에 익숙해져 있어서 수제 바닐라 시럽 맛이 낯선 것 같다. 그래도 얼음이 조금 녹아 맛이 희석되니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펼쳐 읽었다. 오랜만에 읽는 마스다 미리의 책, <뭉클하면 안 되나요?>이다. 저자가 일상 속 남자들에게서 뭉클함을 느낀 순간을 담아낸 에세이집이다. 가끔은 피식 웃음이 나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담을 읽다 보면 '아니 뭐 이런 것까지 뭉클해?' 하는 순간도 있고, '오~그래 이건 좀 공감!' 하는 순간도 있다.


개인적으로 뭉클함을 느끼는 순서대로 나열해봄..ㅎㅎ


개인적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주는 건 약간 뭉클, 먹기 편하게 음식을 덜어주면 좀 더 뭉클, 조심하라고 팔을 잡아주면 좀 많이 뭉클하다..ㅎㅎ

 

저자는 '뭉클을 믿고 주위를 둘러보면 뭉클하게 만드는 남자가 사방에 널렸습니다'라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책을 읽다가 괜히 주위를 한번 둘러보게 되었다.


다음은 서점 탐방을 할 차례. 서점 특유의 분위기와 새 책 냄새를 좋아한다. 서가에 가득 꽂힌 책들을 볼 때면 어린 시절 종합과자 선물세트를 받고서 어느 걸 먼저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다.


천천히 코너별로 돌면서 관심 가는 책들을 살펴본다.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을 골라보는 것도 즐겁지만, 서점에서 누군가 큐레이션 해놓은 책들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중에서 내 취향의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마치 숨겨놓은 보물을 찾은 느낌이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속에서 놀다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개국병이 걸린 요즘, 길거리를 다니면서도 습관처럼 어디 약국 할 자리는 없는지 두리번거린다. 주변 건물을 올려다보며 걷고 있던 중,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신호를 기다리는 차 안에서 누군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거리가 있는 탓에 나는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큰 소리로 자기 이름을 밝히는 친구. 그제야 '아~' 하며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다. 재수를 하던 20살 때 알게 된 친구였다.


재수반은 남녀 합반이었는데 여중, 여고를 나온 나에게 남자란 다른 행성의 사람들 같았다. 원래 성격도 내형적인 데다 재수를 해야 된다는 좌절감에 빠져있던 때라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학원을 오가던 그때, 나에게 먼저 살갑게 다가와준 친구였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각자의 삶을 살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며 연락을 이어온 친구.


뭔가 신기했다. 내가 그 거리를 지나가던 시간에 때마침 차를 타고 그곳을 지나간 것도, 그 먼 곳에서 나를 알아본 것도, 그리고 신호를 받은 틈에 창문을 내리고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준 것도.(너무 크게 불러서 살짝 부끄럽기는 했다...ㅎㅎ)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은 탓일까,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리 긴 세월은 아니지만 인생을 살아오며 얻은 깨달음 한 가지는 인연은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억지로 붙잡는다고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만나게 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흐름대로 살다 보면 인간관계도 저절로 정리되는 것을 느낀다. 서로 결이 맞는 사람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곁에 남는다.


각자의 삶을 사느라 바빠서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오랜만에 만나도 반갑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몇 명만 있다면, 인생은 살 만하다. 멀리서도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를 만나고 나니, 그래도 나 그럭저럭 인생을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단골 서점은 하나 잃었지만 오늘 다른 서점에 갔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친구.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전화 통화도 했다. 앞으로도 이런 뭉클한 순간을 만들어 줄 내 주변의 인연들을 잘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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