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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Jul 29. 2022

당근의 추억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다는 중고거래. 필요한 물건을 저렴하게 살 수 있고, 더 이상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직접 판매할 수도 있다는 장점 때문에 많이들 이용한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찜찜함과 귀찮음이 그 이유였다. 입금을 하고 택배를 받았는데 벽돌이 들어 있었다거나, 돈만 받고 연락이 끊기는 등 사기를 당했다는 중고거래 괴담을 심심찮게 들어서 찜찜했다. 그리고 물건을 팔기 위해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구매자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신경을 써야 되는 일련의 과정이 귀찮았다. 


그래서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돈을 좀 더 주더라도 새것으로 샀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냥 버렸다. 




하루는 오랜만에 대청소를 하며 집안 구석구석에서 있는지도 몰랐던 물건들을 발견했다. 한때 나에게 기쁨을 주었고 아끼는 물건들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아이들. 상태가 괜찮아서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들이 많았다. 새삼 그 물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말로만 듣던 당근마켓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약간의 귀찮음을 감수하더라도 물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첫 시작은 엄마의 밍크재킷이었다. 몸통 부분은 알파카, 넓은 칼라 부분이 밍크털로 된 재킷이었는데, 더 이상 입지 않아서 드라이한 상태로 옷장 구석에 계속 걸려 있었다. 비싸게 주고 산 거라 아깝기도 하고 아직 말끔한 상태라 누군가 가져가서 잘 입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치 쇼핑몰 사장이 된 것처럼 여러 각도에서 예쁘게 사진을 찍어 상세한 설명과 함께 당근마켓에 올렸다. 직접 만나 물건을 확인하고 돈을 받는 게 여러모로 확실하고 좋을 것 같아서 직거래를 원한다고도 적었다. 당근마켓은 동네 기반 시스템이니 근처에 사는 사람과 직거래를 하면 될 것 같았다.


엄마랑 둘이서 '너무 비싸게 올린 건 아닐까?' '그래도 원래 가격이 있는데 그 정도는 받아야지' 이런 말들을 주고받고 있던 중 채팅 알람이 울렸다. 마음에 들어서 사고 싶은데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 그러니 택배로 보내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가격 흥정을 하면 어떡하지? 좀 깎아줘야 되나?'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비싼 옷 같은데 저렴하게 올려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셨다. 애초에 직거래를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멀지 않으면 갖다 줄 생각으로 위치를 물어보았다. 마침 퇴근길에 지나치는 장소라서 다음날 퇴근길에 가져다주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옷이 들어있는 종이 가방을 들고 약속 장소에 갔더니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서 계셨다.  

"혹시.. 당근이세요?"

조심스럽게 다가가 여쭤보았다.

"네~ 이렇게 갖다 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주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셨다.

"여기.. 옷인데 한번 확인해보세요."

나는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아주머니는 가방 안을 슬쩍 보더니 봉투를 건네셨다. 꽃무늬가 그려진 봉투였다. 예쁜 봉투를 골라 돈을 넣어오신 아주머니의 마음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예쁘게 잘 입으세요."

"고마워요."


훈훈하게 마무리를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엄마에게 예쁜 봉투에 담긴 돈을 전달하고 이야기를 하던 중, 엄마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옷장으로 가더니 서랍에서 니트티를 하나 꺼냈다.

"이 니트티, 그 밍크재킷이랑 같이 입으려고 샀던 건데 몇 번 입지도 않았어. 가격도 안 깎고 돈도 이렇게 예쁜 봉투에 넣어주셨는데 이것도 그냥 줄까?"

엄마도 예쁜 봉투에 담긴 아주머니의 마음이 느껴졌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네, 색깔도 그렇고 같이 입으면 예쁠 것 같은데... 한번 물어볼까?"

니트티 사진을 찍어 아주머니께 채팅으로 여쭤보았다.

'오늘 사신 밍크재킷 안에 입으면 좋은 니트티가 있어서 엄마가 드리고 싶다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내일 갖다 드릴까요?'

곧이어 '주시면 저는 너무 감사하죠'라는 답변이 왔고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다음날 다시 만난 아주머니는 양손에 뭔가를 들고 계셨다. 니트티가 담긴 종이 가방을 드렸더니 저녁에 가족들이랑 먹으라는 말과 함께 두둑한 비닐봉지 두 개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이게 다 뭐냐고 여쭤보니 별거 아니라며 가게에서 좀 싸왔다고 하셨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잠시 서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다. 


집에 와서 풀어보니 초밥 2인분에 미소장국, 매운탕까지 아낌없이 포장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매번 만나던 장소가 초밥집 근처였는데 그 초밥집 사장님인 것 같았다. 뭔가를 바라고 드린 건 아니었는데 이런 깜짝 선물을 주셔서 놀라기도 했고 감사했다. 덕분에 부모님과 맛있는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고 채팅으로 한번 더 감사 인사를 드렸다.



성공적인 첫 중고거래 이후 자신감을 얻어서 가방, 동전 지갑, 좌식 의자, 원피스, 화장품 진열대 등 다양한 물건들을 팔았다. 그동안 아까워서 버리지는 못하고 가지고 있자니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한 물건들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좋았다. 구매자 중에는 약속 시간을 자꾸 바꾸거나 가격을 흥정하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좋은 분들이 더 많았다. 동전 지갑을 사 가면서 금방 뽑았다며 따뜻한 가래떡을 주고 가신 아주머니, 좌식 의자를 사 가면서 꼭 필요한 물건인데 싸게 사서 좋다며 편의점에서 산 커피를 주고 가신 남자분.




물건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올리고, 채팅을 통해 약속을 잡고, 만나서 판매를 하기까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는 작업이라 효율성만 따지면 그냥 버리는 것이 편한 건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그동안 중고거래를 안 했던 건데 막상 해보니 그렇게 많이 귀찮은 일도 아니었다. 


약간의 귀찮음만 감수하면 기분도 좋고 뿌듯하고 심지어 재미도 있었다. 나에겐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지만 누군가에겐 필요한 물건이 되어 떠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쓸모를 잃고 잠들어있던 물건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물건을 버리지 않으니 쓰레기도 줄어들고 환경에도 좋은 일을 하는 느낌이라 뿌듯했다. 적은 돈이지만 쏠쏠하게 수입이 생기니 재미도 있었다. 마치 공돈이 생긴 느낌이랄까. 물론 원래의 가격을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 거지만, 집에만 있었다면 그만큼의 가치도 인정받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요즘은 온 가족이 눈에 불을 켜고 팔 물건이 없나 찾아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그동안 참 많은 것들을 쥐고 살아왔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이제 무언가를 사는 데 있어서 좀 더 신중해져야겠다고 반성도 했다.


중고거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게 해 준 당근의 추억. 요즘도 한 번씩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며 혼자 웃는다. 세상이 각박하다고 말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생각보다 따뜻한 이웃들이 많고, 그래서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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