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공휴일이었던 어제, 나는 하루 만에 16명의 상대와 소개팅을 하는 신선한 경험을 해보았다. 아, 물론 실제는 아니고 MBTI 소개팅이라는 가상 소개팅이다.
개인적으로 MBTI에 과몰입하는 편은 아니지만, 예전에 유행했던 혈액형이나 별자리에 따른 성격 특징보다는 훨씬 과학적이고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심리테스트 같은 것도 좋아하는 편이라 이런 종류의 새로운 검사가 나오면 재미 삼아 해보곤 한다. 친구들과 서로의 결과를 공유하며 이야기하는 재미도 쏠쏠하기 때문이다.
민트색을 좋아해서 그냥 민트라고 닉네임을 넣어봤습니다..ㅎㅎ (성은 민씨 맞아요!)
본인의 성별, 이름과 MBTI를 입력하면 '과모립'이라는 MBTI 요정이 16주 동안 각 유형별로 한 명씩 소개팅을 시켜주는 방식인데 나름의 스토리텔링도 있어서 흥미로웠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나의 MBTI는 INFJ다. 예전에 했을 때는 ISFJ였는데 얼마 전 새로 해보니 다른 결과가 나왔다. 성격이 바뀌기도 하는 것처럼 MBTI도 바뀔 수 있다고 하더니 그런가 보다.
각 유형별 상대와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실제로 만남을 갖는 상황까지 경험해볼 수 있는, 나름 신박한 가상 소개팅이었다. 당연한 거겠지만 각자 성향과 직업, 대화 내용이 모두 달라서 흥미진진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상황에 몰입하다 보니, 내 스타일의 인물을 만나면 실제 소개팅을 하는 것처럼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러다 가끔 정신을 차리면 현타가 올 때도 있었지만..ㅎㅎ
하지만 16명이나 만나야 하니 후반부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처음에는 꼼꼼히 대화를 읽으며 집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대충 읽고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기계적으로 화면을 탭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소개팅을 하기 전 미리 약속을 잡는 것부터 시작하여, 만나서 밥을 먹고 때로는 2차까지 갔다가, 집에 돌아와 마무리 카톡까지 하고 나면 실제로 소개팅을 하고 온 것처럼 진이 빠졌다. 일주일에 한 명씩 만나면 16주, 무려 넉 달이나 소요되는데 하루 만에 다 보려고 하니 힘들 수밖에..ㅎㅎ(역시 16명과 소개팅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I성향인 나에게는 실제로도 매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한창 소개팅을 많이 하던 20대에는 실제로 이렇게 만난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그때 잠깐이었다. 30대가 되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소개팅 자체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가상 소개팅을 하고 있는 슬픈 현실.. (아... 갑자기 눈물이...ㅋㅋㅋ)
소개팅의 전체적인 대화나 상황은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진행되지만, 중간중간 내가 선택해야 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 선택 결과에 따라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서로의 호감 지수도 변한다. 호감 지수가 높아지면 애프터를 받기도 하고, 계속 어긋나면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선택을 거듭하며 소개팅을 진행하던 중 문득 어릴 때 즐겨보던 <이휘재의 인생극장>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며 순간의 선택에 따라 다른 미래가 펼쳐지는 것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어릴 때였지만 인생에서 선택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프로그램 다들 기억나시죠?ㅎㅎ 너무 어린 분들은 모르시려나....)
16명 중 11명과 애프터에 성공했으니 나름 선방한 건가?ㅎㅎ
16명을 다 만나고 나면 궁합 점수를 볼 수 있는데 나와 가장 궁합이 좋았던 MBTI는 ENFJ였다. '과모립'이 말하기를 이상형계의 유니콘이라더니 정말인가 보다! (모두가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흔하지 않은 유형이라 만나기가 어려워서 붙은 별명이라고 함.)
ENFJ는 16명 중 유일하게 동갑이니 말을 놓자고 먼저 제안했던 캐릭터였다. 다른 상대들은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마지막까지 서로 존댓말을 했다. I성향의 특성상 낯을 가리는 편이라 처음 보는 사람과 말을 잘 놓지는 못 하지만, 몇 번 대화가 오고 가면서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게 되었다. 말을 놓아서 그런지 서로 장난도 치고 오가는 대화가 편안한 느낌이었다.
ISFJ는 대화를 할 때는 꽤 어려운 상대라고 느껴졌는데 점수는 의외로 높게 나와서 조금 의아하다.
아무튼 16명의 남자와 가상 소개팅을 하며 나의 성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1. 소개팅을 하기 전 불필요한 대화를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카톡으로 스몰 토크를 하며 친밀감을 쌓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기간이 길어지면 막상 만났을 때 할 이야기가 없어서 어색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2.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J유형이라 예상치 못한 즉흥 만남은 아무래도 좀 불편하다. P유형의 몇몇 캐릭터들은 갑자기 연락해서 오늘 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해왔다.
친한 사이라면 당일 연락해서 갑자기 보자고 해도 반가울 수 있지만 처음 보는 사람과, 그것도 소개팅 상대와 그렇게 만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개팅에 나갈 때는 그래도 최상의 모습으로 나가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데, 옷이나 머리 화장 등 그날 상태가 그렇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일에 시달리다 퇴근한 후라면 피곤하고 초췌한 모습일 수도 있으니... 아무래도 소개팅은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주말이 좋은 것 같다.
3. 나도 J유형이지만 너무 극단적인 J는 싫다. 나 역시 매일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지만 모든 걸 계획대로 해내야 된다는 강박이 있는 것은 아니고, 하루를 좀 더 알차게 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의 일정을 빈틈없이 짜 놓고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불편해하는 극단적인 J도 있다. 소개팅 상대 중에 실제로 이런 캐릭터가 있었는데 대단하다는 생각보다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굳이 그렇게까지... 를 선택했다;;
식당을 알아보고 예약하는 준비성 정도는 좋지만, 1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서 식당을 가보고 주변까지 둘러봤다는 말에 조금 뜨악했다. 뭘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이었다. 나 같은 경우 J지만 P에 대한 약간의 동경 같은 것도 있어서 심하지 않은 P와는 잘 맞는 편이다. P와 함께 하면 계획대로만 한다면 느낄 수 없을 색다른 즐거움을 경험을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인생은 때론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의외의 즐거움이 생기기도 하는 법이니까. 아, 물론 너무 자유분방은 P는 나도 좀 힘들다.
4.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사람보다는 능숙하게 대화를 리드하는 사람이 좋다. 나도 낯을 좀 가리고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닌데 상대도 어찌할 바를 모르면... 이건 뭐... 파국이다..ㅎㅎ 그래서 그런지 I유형의 남자들보다는 E유형이 편하다고 느껴졌다. 엄청난 인싸에 항상 약속으로 바쁜 사람은 좀 부담스러웠지만, 적당히 친화력이 좋은 E유형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져서 좋았다.
5. 적극적으로 호감 표현을 하는 사람에게 끌리지만 나름의 '선'이 있다. 담백하게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은 좋았지만, 첫 만남인데 얼굴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는 과함은 부담스럽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정하고 사소한 배려에 감동하는 편이다.
선 지킴이..ㅎㅎ 선 중요합니다.
6. 자기계발에 진심인 편이다. 나에게는 성장과 발전이 중요한 키워드라 상대도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약속이 없는 주말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상대에게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나도 집순이 성향이 있지만 누워만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합이 가장 좋다고 나온 ENFJ도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같은 상황, 전혀 다른 생각.
아마 가상 소개팅이 아닌 실제 상황에서도 나는 저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귀고 좀 더 친해지면 바래다 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첫 만남이고 시간도 늦었으니 얼른 들어가서 쉬라는 배려의 마음에서 말이다. 그런데 상대는 뭔가 마음에 안 들어서 칼 같이 헤어지려고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서운함을 느낄 수도 있고, 오해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다투기도 한다. 아무리 서로를 좋아해도 각자 다른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결국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알아가는 경험이 쌓여서, 나중에는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말 역시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한 시간 넘게 눈이 빠져라 폰을 들여다보며 16명과 가상 소개팅을 마친 스스로에게 잠시 현타가 왔지만, 덕분에 나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유형과 잘 맞는지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