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들여다보며 시청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한방 강의를 몰아서 듣다가 눈이 피곤해서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목도 뻐근한 것 같아 이리저리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던 중, 문 밖을 보니 종이가방을 들고 약국 쪽으로 걸어오는 외국인이 보였다.
근데 저 외국인.. 낯이 익다. 분명 어제 우리 약국에서 약을 사갔던 것 같은데..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든다. 약국 종이가방을 들고 다시 온다는 건 뭔가 좋지 않은 징조이기 때문이다. 교환 또는 반품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약국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어제 나 여기서 약 사갔는데 여기 돼지고기 들어있어. 나 무슬림, 무슬림 돼지고기 안 돼요. 모르고 이건 한 알 먹었어요."
아.... 전혀 예상치 못한 반품 사유다.
어제 오후였다.
"약 주세요."
건장해 보이는 외국인이 약국으로 들어와 서툰 한국어로 말하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을 보니 번역어로 '담낭 소화제'라고 적혀있었다.
'담낭 소화제? 담즙 분비가 잘 안 되나? 쓸개 수술을 한 건가?'
내가 혼자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니 그가 부연 설명을 했다.
"나 아파서 약 많이 먹었어요. 입에서 쓴 맛이 나고 소화도 잘 안 돼서 검사했더니 간 조금 안 좋대요. 간 안 좋아서 걱정돼. 간에 기름도 있대요."
"간에 기름? 지방간이요?"
"아, 맞아요. 지방간. "
"혹시 술 많이 마셔요?"
"아니 나 술 안 마셔. 담배도 안 피워요. 그런데 간이 안 좋대요."
체격이 좋은 걸로 봐서 술은 안 마시지만 잘 먹는 편인 것 같았다. 지방간은 말 그대로 간에 지방에 쌓여있는 질환인데 알코올성 지방간도 있지만 비알코올성 지방간도 있다.
비알코올성 지방간은 대사 질환의 일종으로 중성 지방이 과도해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잘못된 식습관과 운동 부족으로 비만, 고지혈증, 당뇨병 같은 대사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비알코올성 지방간 환자도 늘어나는 추세다.
가끔 나는 술도 안 먹는데 왜 지방간이 있냐고 억울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이유 없는 질환은 없다. 술은 안 먹지만 분명 다른 걸 많이 먹었을 것이다. 과도한 탄수화물은 에너지로 이용되지 못하고 지방으로 전환되어 우리 몸에 저장된다. 흰쌀밥, 면이나 빵 같은 밀가루 음식, 과자 등의 간식을 많이 먹는 경우에도 중성지방 수치는 높아질 수 있다. 이 남자도 그런 케이스인듯했다.
"술 안 마셔도 다른걸 많이 먹으면 지방간이 생길 수 있어요. 밥, 빵, 과자 같은 거 많이 먹어요?"
"아~ 나 밥 많이 먹어요. 빵도 좋아해요."
겸연쩍은 듯 웃으며 그가 말했다.
짧은 한국어였지만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우선 먹을 소화제를 챙겨주고, 지방간도 있고 간수치도 안 좋으니 영양제를 챙겨 먹으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좋은 거 있어요?"
걱정이 되어서 그런지 그가 관심을 보였고, 간 수치를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간영양제와 중성지방을 낮추는데 도움이 되는 오메가 3을 같이 권해주었다. 그는 가격을 물어보고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을 한 듯 우선 한 달 분씩만 달라고 했다. 그래서 작은 통 한 개씩만 꺼내어 용법을 적어주며 잘 챙겨 먹으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쿨거래를 하고 갔는데... 오늘 다시 온 것이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아니 그럼 어제 무슬림이라고, 돼지고기 든 건 안된다고, 미리 이야기했어야지... 왜 아무 말 없이 갔다가 심지어 한 알은 먹고 와서 이러는 거냐고....
보통 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캡슐 기제로 돈피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돼지고기 함유라고 적혀있는 약들이 많다. 요즘은 식물성 연질캡슐도 출시되고 있으나 여전히 동물성 캡슐이 많은 편이다.
'믿는 자들이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부여한 양식 중 좋은 것을 먹되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만을 경배하라.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에는 죄악이 아니라고 했으니 하나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신 분이니라.'
궁금해서 찾아보니 꾸란에 이렇게 적혀있다고 한다.
휴... 내 입장에서는 황당한 반품 사유지만 그의 종교적 신념과 원칙은 지켜줘야 하니, 약국에 있는 약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돼지고기가 함유되지 않은 식물성 캡슐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간장약은 식물성 캡슐을 찾았으나 오메가 3는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나 오메가 집에 있어요. 돼지고기 안 든 거 있어서 필요 없어요."
아니 그러니까 그런 말을 어제는 왜 안 했냐고....
결국 오메가 3은 환불해 주고 간장약은 교환해 주는 걸로 마무리했다.
한 알 먹고 들고 온 간장약은 어째야 하나... 내가 먹어야 하나.... 이제 외국인이 약 사러 오면 무슬림이냐고도 물어봐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