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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날개 Dec 20. 2020

[산티아고 순례길]  언제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13일] 나헤라(Najera) 가는 길

.

천사


길 위에서 만난 또 다른 메디, 그녀는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지닌 호주 아가씨다. 기다란 팔다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 걸음 속도에 맞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친구다. 구름 위를 걷듯 가벼운 발걸음, 배낭이 가벼운 건가 살폈더니, 아주 큰 배낭이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메디는 사람 말에 귀 기울이는 연습을 많이 한 듯하다. 남과 어우러지는 에너지를 가졌다. 상대가  술술 얘기할 수 있게 배려하는 방식으로 대화의 장을 열었다.

인생 그릇이 커 보였다. 오죽하면 세미와 내가 힘들었던 까미노 얘기를 그녀에게 쏟아냈을까! 그녀는 자신도 겪은 일이라며 우리를 위로해줬다. 어린 친구에게 얻는 위로라 더 감동적이었다. 나이를 떠나 우린 서로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천사의 속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메디는 얼마간 함께 걸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당연히 되죠! 메디는 천사니까!”

“와우,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디는 내 허물없는 농담에 개구쟁이 표정으로 좋아라 했다. 앞 뒤로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혼자 걸을 때보다, 세미가 있어서 좋았고, 한 사람이 더해지니, 더 든든했다. 혼자 걷는 길은 좋으면서도 고독하기에!


날이 흐려서인지, 하늘 높이 치솟은 십자가가 더 슬프게 느껴진다.


신비의 관문처럼 예술작품이 길 위에 서있다.





중간에 세미와 나는 오늘 아침을 부실이 먹어서인지,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메디도 함께 먹겠다며 카페가 있는 언덕으로 오르려는데, 어? 어제 만났던 출입구 2층 침대, 까칠한 그녀가 길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진작 앞서간 그녀였는데, 작은 마을에서 쉴 곳을 고민하던 중이라고 했다. 같이 카페에 가자고 했더니, 따라나섰다. 메디는 친절한 웃음으로 그녀와 인사를 나눴지만 세미는 별로 반가워하지 않은 눈치였다.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대하는 세미가 무슨 일이지? 무릎이 아파서 힘든 걸까?


카페 밖 테이블에 앉아있던 순례자들이 메디를 보자 심하게 반겼다. 메디는 짧은 인사 동안, 진심을 전하는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웃음으로 그녀를 안아주었다. 사랑이 많은 천사라도 만난 듯! 천사가 사람으로 돌아다니면 저런 모습일까? 그녀의 사랑이 듬뿍 담긴 느린 말투가 한동안 우리를 지배했다. 상대가 이야기할 때,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눈웃음은 기본, 애처로운 내용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슬픈 표정으로 이미 대답 전에 위로를 건네고, 상대의 대화가 끝나면 싱긋 웃어주며 사랑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메디였다. 온전히 상대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아는 그녀를 누구나 예뻐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카페든 비탈길에도 야외 테이블은 놓인다. 날이 춥다.


고양이와 커피


카페에는 간단한 오믈렛과 빵 정도만 있어서 다들 차만 마시고 가자고 했다. 어차피 점심 때도 안 되었으니 조금 쉬다가 가자는 것! 배낭을 바깥에 내려두고 무슨 차를 주문할까 고민 중이었다. 당연히 커피를 시킬 줄 알았는데, 주스니, 코코아니, 다양한 것들만 시켰다. 세미의 주문이 남았는데, 카페 앞 길가에서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보니, 쪼그려 앉아 고양이를 만지고 있었다. 고양이를 안아 올리더니 사진을 찍어달란다. 고양이도 어미 품처럼 안겨있다. 새하얀 새끼 고양이, 정말 예쁘다. 메디도 그새 뛰쳐나와 "오 마이 갓"을 외치며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나는 일단 사진부터 찍어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정신이 팔려 계속 고양이만 쓰다듬는다.

"먹고 가야지, 여기서 살 거야?”

"커피 시켜줘!"


메디는 카페로 돌아와 함께 주문했지만, 세미는 여전히 고양이만 안고 있었다. 커피가 나왔을 때 오라고 불렀더니, 자기 커피를 그리로 가져다 달란다. 고양이 곁에서 먹겠다는 것! 안 하던 짓을 하네? 혹시 까칠한 그녀 때문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걸까? 날이 흐려서 무릎이 더 아픈가? 어쨌거나 뭔가 위안이 필요한가 싶어 세미에게 커피를 전달했다. 뒤늦게 커피 값을 내민다. 이미 주문할 때 지불했다고 해도, 그냥 후불로라도 주겠단다. 세미가 어째 오늘은 퉁명스럽다. 뭔가 불만이 있는데? 어쩌라고? 나도 걷느라 힘들거든! 무언의 텔레파시로 '확 그냥, 막 그냥'을 했다.


카페 앞에 앉아있던 새끼 고양이, 얼마나 피곤하면 고단한 순례자의 품에서 잠들까.

다시 길을 걸었다. 까칠한 그녀도 함께 걸었다. 이 조합? 함께 사진도 찍고, 즐거워하는데, 뭔가 어색하다. 까칠한 그녀가 빨리 걷고 싶다고 했다. 당연히 우리도 빨리 걷고 싶지만 현실은 달팽이! 메디에게도 먼저 가라고 했지만, 우리와 저금 더 걷겠단다. 이 친구도 사람 좋아하는군! 그 마음이 전해져 사람들도 메디를 좋아하는 게로 군! 오죽하면 까칠한 그녀도 메디에게 '정말 예쁜 사람'이라고 표현했을까! 메디는 그야말로 순례자들의 천사였다.


누군가 돌멩이로 하트를 만들고, 그 안에 낙엽을 얹었다. 정성이고, 기도이고, 사랑이다.


수확을 끝낸  포도나무에  메마른 포도알들이  달려있다. 곧 땅에 떨어질 녀석들! 포도밭에서는 기웃거리지 말고 그냥 지나가자.


순례길은 아무리 익숙해져도 늘 눈부시게 아름답다.


행운


얼마간 걷던 메디가 역시 먼저 갔다. 나헤라에 도착하면 같이 식사를 하자고 약속했다. 세미와 한참 걷다가 작은 공터에 앉아 쉬기로 했다. 한쪽에 투어 팀들이 막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머물던 자리에 먹을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였다.  

“맛있겠다.”

“배고파!”

뷔페처럼 차려진 음식이 신기루처럼 보였다. 바람은 왜 갑자기 부는지, 처량한 포스로 진입하라고? 뒷정리 중이던 담당자가 갑자기를 우리를 부른다. 배낭을 내려놓고 낄낄 대며 쉬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녀는 우리에게 음식들을 권했다.

“덜어먹은 거예요. 좀 드세요. 다음 투어 장소로 가야 하는데, 새로 준비할 거예요. 원하시면 싸가도 돼요.”

“와우! 우리에게 이런 행운이! 감사합니다.”


어차피 남은 음식이라 버리기도 하겠지만, 다시 보관할 것들도 보였다. 가벼운 샐러드와 샌드위치 종류들과 과일들, 우리에게는 훌륭한 음식이었다. 뷔페처럼 차려진 음식이었기에 꺼리길 것도 없었다. 담당자가 자기는 급히 떠나야 한다며 우리에게 음식을 덜어먹고, 싸가기도 하라며 일회용 식기를 주었다. 자꾸 더 많이 싸가서 다른 순례자들과 나눠 먹으라는데, 배낭 때문에 오지랖까진 어려웠다. 그나마 차려진 음식들 몇 가지만 챙겼다. 세미와 난 먹으면서 춤추듯 신나 했다. 때 놓친 점심을 먹어서? 물론 그것도 이유지만, 행운이 주어져서 감탄한 것이다.


담당자는 기분 좋은 웃음으로 우리에게 행운을 빌며 벤에 음식을 싣고 떠났다. 이건 판타지다. 꿈처럼 저 너머를 갔다 온 판타지 주인공, 이건 과연 꿈이었을까? 할 때 바라본 손에는 '음식이 딱!' 고로 이것은 현실! 정말 찰나의 연이었다. 투어팀이 먹을 때 지나가도 우리에게 권하지 못했을 것이고, 뒷정리를 하고 떠났어도 못 만났을 것이다. 저 자리를 지날 때,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세미와 난 음식과 행운을 잡았다는 생각에 신나게 다시 걸었다. 음식과 행운 앞에 어찌 즐겁지 아니할까? 가만 보면, 세미도 이럴 때 생기가 살아난다. 나랑 같은 '과'가 맞다!


날이 흐리자, 곧바로 자리를 뜬 투어팀, 덕분에 우리에게 행운이 왔다.



배회


나헤라에 들어섰다.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다가 세미를 잃어버렸다.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휴대폰이  말썽이었다. 사진 찍고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그녀를 놓쳤다. 세미는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먹을 때만 잠깐 신났었지! 여느 때와 달리 내가 오는지 살필 겨를 없이 앞으로  가고만 있었다.  역시 생각 없이 계속 다리를 건너다가 끝까지 도착, 골목까지 직진했. 가다 보니, 세미가 사라진  알았다. ? 어디에서 묵을지 정하지 못했는데! 공립 알베르게인 무니시팔로 가자고 했지만 그곳에 자리가 없을 경우로 다음 숙소를 얘기하다가 말았다.


<알아두면 좋아요>

나헤라(Najera)는 나헤리야 강을 중심으로 구 시가지와 신 시가지로 나뉜다. 과거 기독교 왕국과 이슬람 왕국 사이에 있었다. 로마 시대에 세워진 이 도시를 아랍인들은 ‘바위 사이의 도시’라는 의미로 '나사라'로 불렀다.  나헤라는 왕국의 수도이자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지나는 도시로 발전했다. 산따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 같은 훌륭한 건축물이 많고, 서른 명 가량의 왕의 무덤이 있다. 아로의 포도주 박물관과 에스까라이 산에서 즐길 수 있는 스키와 스노보드, 장대 춤으로 유명한 안기아노 축제, 사도 요한과 베드로를 기리는 축제, 순교자 요한과 산따 마리아 라 레알의 축제도 있다. 송어, 게, 과일, 포도주가 유명한 곳이다.

-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고 -


하와이 같다. 산도 나무도 신비로웠다. 날씨마저 달라져서 더 그렇다.


조용하고 깨끗하지만 활기 넘치는 나헤라, 도시 자체가 평화로웠다.


강 따라 낭만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넋 놓고 사진 찍다가 길을 잃었다.


탕자


다리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누군가 심하게 아는 척을 한다. 손까지 휘저으며 인사하는데, 꽤 적극적이다. 다가오는데, 모르겠다. 누구시더라?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음, 어디지? 그때 떠오는 생각, 앗! 성경 아저씨다. 비아나 응달 골목에서 하염없이 수다를 떨던 아저씨! 자기만 커피 마실 테니 못다 한 얘기 좀 들어보라던 아저씨! 결국 성경구절을 마구 투척한 아저씨! 반가울 리 없는 아저씨! 숙소를 찾아야 하는 이 정신없는 상황에 나타난 아저씨! 아저씨는 용케도 나를 알아봤다. 손까지 흔들며 오는 걸 보면 마치 ‘아이고, 정사장~! 반갑구먼, 반가워!’  인사를 하는 듯했다. 나는 적당한 웃음으로 그와 인사를 나눴다. 이번에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고 입술을 들썩이고 있는지! 머리에서 빠르게 메시지가 스쳐갔다.

‘튀여!’


그의 입에서 뜻하지 않은 말이 나왔다.

“나 봤다. 네 친구! 너, 지금 친구 찾지?”

“엥? 내 친구를 기억해?”

“기억하지. 아까 저리로 가더라, 너 찾고 다녔어.”

아, 다리에서 아래 계단으로 빠져야 하는 걸 내가 한눈팔고 쭉 가서 그랬구나! 나는 그저 세미가 증발했다고 생각했는데!

"저기 있네!"

그가 가리킨 곳을 보니, 세미가 아니었다.

“아닌데?”

“엥?”

그가 한가롭게 땅콩 까먹다가 놀란 사람처럼 엥? 돌아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아냐, 아까 네 친구 맞아. 뭔 코미디야? 어디서 스탠딩 코미디를 하고 있어? 아저씨, 내가 가는 길목에 대기하듯 나타난 게 수상해! 나한테 추적 장치 달고 기회를 노린 거야? 뭔가 사기 스멜이 나는 것 같아서 다시 경계 모드! 세미를 본 것도 아니면서 괜히  어리바리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나를 발견하고 접근한 것 같은데?

“정말 내 친구를 봤어?”

“어, 봤어!”

말과 달리 자기도 뭔가 헛것을 봤나? 하는 확신 없는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이 아저씨, 아무래도 다단계야. 치밀하진 못하네? 일단 튀고 볼일이다.

"어쨌든 고마워요. 찾아볼게요!"


아저씨에게 얼버무리며 현장을 벗어나려던 찰나!

“어디 있었어?”

반가운 목소리! 돌아보니, 세미다. 골목 끝에서 정말 세미가 나타났다. 아저씨가 가리킨 쪽이 맞았다.

“와, 정말이네? 하하하”   

“흠, 정말이지! 하하하!”

헛것을 본 게 아니라서 기뻤는지, 아저씨도 함박웃음이다. 이제는 팝콘 각 이다. 아저씨 눈에 흥미가 철철 넘친다.

“여태 너 찾고 다녔어. 아래로 내려갈 줄 몰랐지!”

“따라오는 줄 알았어. 갑자기 없어져서 계속 찾고 다녔어.”


아저씨는 싱글거리며 웃고만 있었다. 전도(?)라는 본업을 망각한 채 친구의 우정이 담긴 드라마를 시청 중이시다. 이 아저씨, 너무 적극적인 게 흠이지만 고마운 사람이었다. 내가 긴장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갈 때 일부러 다가와 말을 걸어줬다. 설마, 길  찾아주고 수수료 챙기려 건 아니었지? 인도에서 겪은 ‘선 친절, 후 대가’ 신공 때문에 신경 쓰이네? 근데 아저씨, 순례자는 맞아? 어째 땀 흘려 걸은 힘든 기색이 없네? 현지인처럼 동네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게 지난번과 비슷해! 설마 버스 타고 다니며 순례자들을 따라다니는 건 아니지? 아저씨, 어쨌든 고마워!

 

나는 그에게 무례하게 대하진 않았지만 오해하고 피하려던 마음 때문에 미안했다. 호의를 내 멋대로 해석한 결과다. 살면서 이렇듯 놓친 진실들이 얼마나 또 많을까! 애써 알려주는 길을 외면하며 꾸역꾸역 내 길이라 고집했던 일들! 한참을 돌아오고 나서야 도움을 주려던 사람의 호의를 거절한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던 일들! 나는 미안한 마음에 그에게 주스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마침 주변에 카페도 있었다. 그런데 생각은 그렇긴 한데 입이 안 떨어졌다. 그의 모닝에 진저리 치던 날이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지금은 더 체력이 바닥난 상태! 수다를 받아낼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애써 찾아낸 말이 "다음에 또 만나면 차 한잔 해요!"였다. 중요한 건 ‘다음에’라는 거다. 다음 언제냐고 집요하게 묻기 없기! ‘다음’은 다음인데, ‘우연히’라는 게 핵심! 혹시라도 약속 같은 거 잡기 없기! 나는 열정을 담은 그의 성경구절을 지금 들을 자신이 없었다. 그냥 돌아오지 않은 ‘탕자’로 여겨주시오! 언젠간 때가 돌아가지 않겠소? 언제? 언젠가! 역시  '다음에'처럼 기약할 수 없는 그 '언젠가' 말이오!


한편에 산책로가 이어진다. 푸른 잔디와 나무들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무니시팔


공립 알베르게, 무니시팔! 처음에는 욕 같아서 민망했지만, 나중에는 쩍쩍 달라붙는 말이 되었다. 나헤라는 며칠 묵어갔으면 좋을 곳이다. 앞에 작은 강이 흐르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온갖 편의 시설도 가까이 있고, 순례자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활발히 오가는 곳이었다. 성당도 중심부에 있어서 미사를 드리고 오는 길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행자들은 홀로 책 읽고, 차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 참 좋은 곳이었다.


알베르게 접수처에 있는 휴게터에는 큰 나무 테이블이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그곳에 웰컴 주스와 수박이 있었다. 공립 알베르게에서 이런 준비를 하다니, 전무후무한 일이다. 무니시팔에 이미 사람들이 많았다. 방 하나에 90명이 들어갈 규모다. 2층 침대들이 기숙사처럼 빼곡히 들어차서 거울 속 거울처럼 끝없이 나열되었다. 샤워실과 화장실은 고작 두 개인데, 언제나 줄 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부엌도나 코딱지 사이즈, 한 두 명 들어가면 꽉 찼지만 서로 인사하며 알아서 준비한다. 이곳은 마치 순례길에 있던 사람들을 압축해 쏟아부은 듯 북적였다.


사람들이 많았지만 세미와 나까지도 1층 침대를 잡을 수 있을 만큼 큰 규모였다.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는 알베르게는 처음이었다. 보통은 등록하며 숙박료를 지불하지만, 이곳에서는 원하면 나갈 때 기부금을 내도 상관없다고 했다. 일단 북적대는 접수처에서 벗어나 주는 게 도와주는 일 같았다. 그래!  만족도가 높으면 5유로 이상 넣을 수 있지! 얼마간 짐도 덜어내기 위해 새 제품을 과감히 기부도 해야겠다. 큰 기부박스가 놓인 걸 보니, 이 지점에서 덜어내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나도 더는 버티지 말고 내놓야 할 시점이다.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가져갈 수 있게 하려면 많은 사람이 머무는 이런 곳이 좋다.


나는 침대에 배낭을 가져다 놓고, 일단 빨래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햇빛이 아직 가냘프게 뻗어 있어서 마당 건조대에 빨래를 널었다. 이미 널어진 다른 사람의 옷 사이로 교묘하게 너는 신공! 처음에 널었던 사람들은 여유롭게 널었지만, 차차 밀려서 결국 촘촘히 빨래들이 널리기 마련이다.


무니시팔 마당에서 빨래를 말리면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 담배를 피우고, 서로 깔깔 웃으며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어쩐지 히피들 같았다. 안쪽으로 웰컴 차와 수박도 있고, 햇살도 적당히 비추는 이 무니시팔은 평화가 깃든 자유 그 자체였다. 아무래도 관리하는 사람들이 신경을 쓰는 곳 같았다. 그 마인드에 따라 알베르게 분위기도 사뭇 다른 듯하다. 사람들은 큰 나무 테이블에 앉아서 쉬다가 마당에서 쉬다가 바로 코 앞 산책로 거닐다가 동네 슈퍼와 바 같은 곳을 전전한다. 어쨌든 낭만이 있는 곳이다.


숙소 앞으로 이런 길들이 이어졌다. 거닐기만 해도 치유가 된다.


타인의 이야기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메디와 다시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이게 누구인가? 영국 뉴스 아저씨가 따악! 메디와 일전에 함께 길을 걸었단다. 친절한 우리의 천사 메디는 분명 그의 BBC급 인터뷰에 성실히 임해줬을 게다. 메디가 조심스레 영국 아저씨가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해도 되겠냐고 묻는다. 그도 메디와 저녁을 먹고 싶었을 텐데, 우리와 식사 약속 때문에 같이 왔던 것 같다. 당연히 환영을 해야 했다. 그런데 영국 아저씨가 어째 내 눈치를 본다. 설마 나를 어려워하는 게야? 식탁에 마주 앉은 엄마가 '밥알 흘리기만 해 봐' 하며 내가 벼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 좋다. 차리라 잘 됐다. 여러 소리 없으니 마음 편했다. 메디가 성의껏 그와 대화를 나눠주는 게 고마웠다.


우린 각자 피자와 파스타를 시켰다. 영국 아저씨가 갑자기 와인 한 병을 사겠단다. 아마도 메디에게도 고마웠지만 우리가 함께 걸어줬던 것도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순례자 코스가 아니기에 와인은 별도로 사 먹어야 하지만 부담 없는 가격이라 모두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한 모금도 마시는 않는 나도 고맙다고 했다. 속으로는 '콜라는 안 되겠니?'라고 말할지언정, 그의 마음은 고마운 것이니까!   


성경 아저씨도 영국 뉴스 아저씨도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자기 얘기를 하고 싶고, 이해와 위로를 받고 싶은지 모르겠다. 많은 얘기 보따리 중 한 두 개만 성의껏 들어줘도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다. 나는 왜 이들의 이야기보따리를 떠안지 못했을까? 이야기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들어야 할 사람이 난데 말이다.

나는 이미 내 안의 이야기들로 힘들어하고 있다. 떠올리기 싫은 수많은 아픔과 후회, 무력감들로 얼마나 많은 시간 작아졌던가! 나는 지금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할 힘이 없다. 아니, 자격이 없는지 모르겠다. 자기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건지 모르겠다. 타인을 이해해야만 들을 수 있는 진실, 그 이야기를 마주할 자신도, 자격도 내게는 없다. 나는 아직도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 중일 게다.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 나아가야 길이다. 언제 즈음, 나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언제 즈음, 그래도 된다고 여겨질까! 언제 즈음!


주차장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이미저 풍경이 되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먹어도 이상하지 않다.


숙소에서 가까워 멈춰 앉은 곳! 걷는 걸 최소화하면 선택이 쉬워진다.


추천할  정도의 맛집은 아니지만, 벗들과 함께 하기에 좋다.




누군가의 원수
해가 지기 시작하자 알베르게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저녁을 먹고 들어온 사람들부터 이제 막 먹으려고 슈퍼에서 음식을 사 와서 준비하는 사람들, 저녁 약속을 해서 친구들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더 꽉 찼다. 한쪽에서 노트북으로 일하는 남자도 있고, 여기저기 아는 사람 없나 기웃 거리는 사람도 있고, 모두 나무 테이블 근처에서 앉거나 서성이며 이 축제 같은 밀집을 즐기는 듯했다.


갑자기 한 여인이 나타나 봉지를 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디밀었다. 뭔가 싶어 궁금하던 차에 그녀가 봉지를 내밀었다.

“머리끈이야! 제발 가져가 줘! 무거워서 덜어내야 한단 말이야. 제발!”

빌다시피 엄살을 부리는 그녀의 표정 때문에 모두가 까르르 웃었다. 머리끈이 얼마나 무겁다고 저러나 싶기도 했지만. 준비랍시고 괜한 걸 가져와 후회와 반성의 시간을 가진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기에 웃었다.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고무줄을 집다가 겨우 한 두 개만 쓱 꺼냈다. 머리끈이 필요 없는 사람들도 그녀를 놀리느라 그랬다. 다시 한 바퀴 돌아서 또 내게로 왔다.

“제발 팍팍 가져가 줘! 10개 더 가져가 줘!”

나는 도널드 덕처럼 머리를 빠르게 내둘렀다.

“아니, 아니, 아니! 더는 사양하겠어.”

모두 “케케케” 웃어댔다. 그녀의 머리 끈은 여전히 많이 남았다. 아무래도 내일 기부박스에 놓일 테다.


한참 앉아있으니, 많이 본 사람들이 나타났다. 우선, 백발 여인의 등장! 라바라떼에서 마늘 타령하던 그 할머니가 뒤늦게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등장한 또 한 사람, 내 아래층 침대에 있던 프랑스 청년이었다. 그가 언제 왔었는지, 밖에서 놀다가 들어오면서 아는 척을 했다. 자기는 공립만 이용할 거라더니, 역시 일찍 와서 놀다가 온 것이다. 그는 껄렁하게 생겼지만 무척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마늘 할머니의 말도 진지하게 듣고 공감하는 눈빛이 ' 나 착해'였다. 그러고 보니 마늘 할머니는 프랑스 사람이었군! 그 밤에 이 드러내 놓고 웃던 모습과 달리 프랑스 청년과는 정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다. 생각만큼 이상한 사람은 아닌 듯한데, 왜 마늘 타령을 했을까? 까칠한 여인을 빗댄 인종차별적 망언이 아닌, 정말 레스토랑에서 나는 마늘 냄새를 말한 것이었을까? 어찌 되었든 나는 마을 할머니에게서 일정한 거리 두기를 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노인을 정성껏 대하는 프랑스 청년이 기특하다. 그 마음 씀씀이가 좋아 보였다. 어쩌면 이 할머니는 까칠한 그녀와 전생의 원수였는지 모르겠다. 다른 이들에게는 정상적인 반응이다. 나에게 조차! 세미가 마늘 할머니와 프랑스 남자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미의 결론은 그 노인네가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 까칠한 그녀가 예민한 것 같다고도 했다. 하지만 까칠한 그녀가 괜히 그런 말을 했을까? 정말 마늘 할머니가 사악한 마음으로 조롱한 거라면?  왜 세미는 그토록 까칠한 그녀를 싫어할까? 혹시 상사와 닮았나? 궁금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괜히 남의 뒷얘기처럼 되어버릴 수 있기에!  



축복


세미와 나는 낮에 투어팀에게 얻어온 간식들을 사람들에게 건넸다. 배낭에 잘 넣어온 보람이 있었다. 모두 하나씩 간식을 집었다. 다들 마다하지 않고 맛있게 먹는다. 이것은 순례자의 정신이로세! 세미와 저녁에 미사를 가기 전에 슈퍼에 들르기로 했다.
늦은 시간이라고 해서 여유를 부리며 슈퍼에서 오는데, 미사가 '롸잇 나우!'라는 것! 미사에 간다는 아주머니들에게 낚여 슈퍼 봉지를 펄럭이며 달려갔다. 고요한 미사에 참석은 했으나, 부스럭부스럭,  비닐봉지 소리 어쩔 거야? 이럴 때는 천천히 조용히 움직여서 신경을 오래 쓰이게 하는 게 좋은 건지, 에라 모르겠다 시끄럽게라도 해서 얼른 자리에 앉는 게 좋은 건지! 어쨌든 죄송스러운 마음 반, 참석해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마음 반이다.


어, 메디와 영국 아저씨가 이미 미사에 참석했다. 함께 밥 먹으며 미사 얘기를 했는데, 그들도 오겠다고 했던가? 그들은 개신교인이었다. 서로 통하는 게 많은 듯했다. 다른 나라로 봉사활동도 다닌 듯했다. 둘 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듯했다. 그런데 개신교인인데, 천주교에서 왜 성체를 받지? 그러고 보니, 순례길에서 개신교든 무신자든 일단 미사에 참석하기도 하던데, 성체도 다 받았던가? 까미노에서 ‘영발’을 제대로 받고 싶은 마음에 성체를 모시기도 하지만 원래는 천주교 신자만 받도록 되어 있다. 세미가 내게 물었을 때 그리 말해줬는데, 메디와 영국 아저씨를 보니, 그냥 세미도 모른 척 받으라고 할 걸 그랬나 싶었다.


나도 여행 중에 티베트 불교사원이든 힌두교 사원이든, 시크교 사원까지, 온갖 ‘복’은 다 받고 다녔다. 세미에게 눈짓으로 '너도 줄 설 거냐?' 했더니, '아니!'라고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미사로 발 하나 걸쳤으면 됐지 뭘 굳이 성체까지 받을 필요 있냐는 표정이었다. 이래저래 나도 헷갈렸다. 복 받는 거라면 다 받으면 좋긴 한데, 특히 까미노 길에서는 성체의 의미는 더 크지 않을까? 그러니 순례자들에게 따로 축복 기도도 해주시지! 어쩌면 성체도 눈감아주시지 않았을까?


미사 후 신부님이 순례자들을 따로 모아서 축복을 해주셨다. 성모상이 새겨진 목걸이 알(?)과 순례자를 위한 카드도 주셨다.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며 하나하나 축복 인사를 건넬 때 감동했다. 우린 성당 밖으로 나와서도 다른 순례자들과 감동을 나눴다. 내 마음이 바뀐 건지, 영국 아저씨가 나를 조금 더 편하게 바라보는 듯했다. 메디는 여전히 천사의 날개를 숨긴 채 사랑이 담긴 미소였다. 세미 역시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편한 표정이었다. 뭐가 됐든 미사에 참석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나 같은 날라리 신자를 따라다니며 말이다.


우연히 한국 남자도 우리와 같이 있었다. 미사 드리면서 서로 알게 되고, 성당 밖에서 인사를 나눈 것이다. 그는 정말 신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순례지에 도착하면 우선 미사에 참례한단다. 길을 걸으며 묵주 기도는 기본으로 드리는 사람들이다.  남다른 신앙심이 느껴졌다. 어쩌면 수도자의 길을 고민하는 사람이 아닐까? 다음에 우연히 만나면 또 인사 나누자고 했다. 그는 한적한 곳에 있다는 숙소로 먼저 향했다. 잘 가시오. 그 길에 축복이 함께 하시길! ‘부엔 까미노!’

우리도 각자 헤어지기로 했다. 메디와 영국 아저씨는 다른 숙소에 머물렀다. 어디선가 들었나? 이 많은 사람들이 묵는 공립에서 묵으려면 잠자는 건 각오하라고?


성당 내부가 깔끔하다. 순례지들은 뒷자리에 앉아 미사 후 축복을 얻기 위해 기다린다.


흔들리는 침대


역시 그 큰 방에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잘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수선한 소음에 코 고는 건 애교다. 하필 천둥소리 내는 사람이 내 옆 옆이라는 것만 빼면! 불안이 밀려왔다. 밤을 새우면 어쩌지? 그런데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잠 못 잘 거란 불안은 금세 가셨다. 더한 인간이 나타났다. 어린 녀석들! 수련회에 온 것처럼 날 뛰고 있다. 말 그대로 지상과 침대, 2층 침대 사이를 원숭이 떼들처럼 건너 다니며 날 뛰고 있다. 하필 내 앞과 위와 옆, 나를 포진한 무리들이다. 남녀가 한 무더기로 친구인가 보다. 대합실 보다 더 큰 생목소리로 떠들고 있다. 오늘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지?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봐도 이런 벌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 불이 꺼지면 자겠지! 아직 자려고 준비하는 거니까!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불이 꺼졌다. 공식 불 꺼짐 시간 이리라. 그런데 여전히 안 자고 내 침대가 구름 위라도 날고 있는지, 몹시 흔들렸다. 아예 2층 침대에 나란히 누워 대화를 주고받고, 스마트 폰을 보여주고, 노래도 틀고 있었다. 깔깔거리는 목소리! 슬슬 분노감이 차올랐다. 최소 침대는 흔들지 말아야지! 예의를 밥 말아먹은 녀석들! 이제 막 졸업한 학생들 같았다. 누군가 불편할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급기야 휴대폰 불빛을 왔다 갔다 내 눈알에 테러를 행한다.


나는 소심한 복수를 꿈꿨다. 녀석의 누운 각도에 맞춰 화면을 열고, 디스플레이 밝기를 최강으로 했다. 앗! 내 눈! 내 눈! 이건 녀석의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내 속에서 나오는 절규였다. 아, 이런! 이건 내 눈알에 대한 셀프 폭격이었다. 역시 안 하던 짓은 안 해야 해! 모두 참는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비아나에서 겪어봤지 않나! 계속 마주칠 수 있는 순례길이니, 참아보자. 그런 마음이 들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녀석들도 조용해졌다. 이제 정말 자야 할 시간, 잠이 온다. 다행이다. 잘 수 있어서!


숙소 관리인들은 친절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보내는 마음


 다음 날, 기부금을 내고 배낭도 덜어냈다. 관리자에게 새 모자와 새 장갑과 새 무릎 보호대를 손에 쥐어줬다.

“이건 모두 새 거라오! 필요한 사람에게 잘 나누어주시오.”

“어머, 정말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그녀가 과하게 좋아하는 것을 보니, 버리고 가는 물품 중에 새 상품을 왕창 덜어내는 사람은 드문가 보다. 하긴 지금까지 짊어지고 온 건 뭐며, 여태 새 거인 건 또 뭔가? 이것저것 다 주었으니, 양도 많았다.  오죽하면 내가 눈물을 머금었을까. 여름 날씨부터 겨울 날씨까지, 다 겪어야 했으니, 장비와 물품을 다 준비했다. 없으니 다 새 걸로 산 것이다. 그래서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아직 춥지 않았으니, 일단 겨울 용품을 덜어내고 나중에 더 추워지면 데카트론에서 사자 싶었다. 다시 또 시작된 하루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코스를 걸을 테지만 또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기에 깊은 인사를 나눴다. 모두 잘 쉬다가 가는 나그네처럼 가볍게 길을 나섰다.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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