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계실 때 전 아버지와 성향이 비슷하다고 어머니한테 늘 싫은 소리를 들었죠.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움을 하실 때, 아버지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항상 아버지 편을 들었고, 싸우는 이유가 매번 같아서, 왜 어머니가 같은 일로 아버지랑 싸우는지 이해 못 했거든요. 아버지 입장에서 보아도 같은 이유인데도 아버지 편만 들었죠.
아버지!!
오늘 편지를 쓰게 된 것은 아버지께서 우리 곁은 떠난 지도 오래되었기에, 너무 그립기도 하지만, 살아계실 때 하지 못한 말을 하고 싶었서예요.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어 가슴 한편에 켜켜이 쌓여 있어요.
먼저 저를 낳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8남매 중 저를 가장 이뻐해주셔셔 고맙습니다.
그리고 가장 고맙고 감사한 것은 병원에서 의사의 말을 따르지 않고, 저를 업고 나오셔, 함께 살아보자고 마음 돌려 먹은신 것입니다. 이 고마움은 제가 평생 간직했던 아버지에 대한 저의 마음이었어요.
그해 여름엔 비가 많이 내렸어요. 6월 말부터 시작한 장마는 7월이 다 지나가도록 멈출 줄 몰랐죠. 장맛비가 쏟아 지던날 저는 병실 열린 문으로 쏟아지는 비를 하염없이 쳐다보며, 동생들과 엄마를 기다렸어요.
병원에 입원하고 6개월이 지나도, 의사는 아무 말이 없었고, 하루하루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던 때였어요.
소독약 냄 내뿐인 병실에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니까, 더욱 동생들이 보고 싶어 졌어요. 동생들은 6살, 4살이었기 때문에 병원에 자주 올 수 없었고, 어머니만 매일 병원으로 밥을 해다 날랐죠. 저녁이면 병실에 혼자 누워 언제 집으로 갈 수 있을까 상상만 하다가, 잠이 들곤 했죠.
다음날 쏟아지는 비를 보며, 동생이 마당에 심어 놓은 해바라기는 얼마나 컸을까. 동생들은 장화를 신고서라도 빗속을 첨벙 대며 놀고 있겠지.. 하며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병실로 들어오셨어요. 출근하시는 날인데 아버지의 등장에 깜짝 놀랐죠. 내심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병실에 들어 오시자 마자 저를 덜렁 들어 올리더니, 의사 선생님 한 테로 가서, 수술실에 또 덜렁 올려놓으셨어요.
의사는 커다란 기계로 내 무릎의 깁스를 동그랗게 잘라 내더니, 무릎위로 커다란 주삿바늘을 쳐들었어요.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뼈에 주사를 놓을 수 있다니, 딱딱한 다리에 주사를 놓으면 얼마나 아플까를 상상하며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어요. 그 와중에도 주사는 간호사가 놔야 하는데, 의사가 놓다니, 이것은 필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라 생각했어요.
의사가 주사를 놓으려 할 때, 저는 온몸을 비틀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고, 의사는 주사를 놓다가 주사가 부러지면 어떠하려고 하느냐며 아버지에게 큰소리를 쳤죠. 저는 점점 악을 써대며 울었고, 그럴수록 아버지는 저를 꼼짝 못 하도록 안으셨죠. 아니 강제로 누르신 거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아버지가 그때 저를 처음으로 안아 주신 거라는 것. 늘 냉정하고 무서웠던 아버지였는데 말이죠.
악을 쓰면 쓸수록 아버지는 더욱더 가슴을 내리눌렀고, 저는 기절해 버렸고, 깨어났을 때는 병실이었죠.
또다시 주사를 맞을까 봐 얼른 집으로 가고 싶었고, 하루하루는 또 지나갔어요.
여전히 문밖에선 비가 내렸어요. 오늘은 동생들이 올까... 엄마가 오시면 밥을 가지고 오시니까 함께 올 수 없는 것도 알면서도 같이 와 주었으면 하고 기다렸어요.
당시 병원은 대한철광에서 운영하는 부속병원이었어요. 아버지께서 철광에 입사하신 것은 회사에 부속병원이 생긴다는 소문을 듣고 서였다고 하셨죠. 병원이 지어지고 아버지는 바로 저를 데려가셨고, 제나이 7살에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거였죠. 치료를 받고 제대로 걸어서 학교에 입학하길 바랐던 아버지의 바람이셨죠.
" 이제 너도, 다른 아이들처럼 걸을 수도 있고, 뛰어다닐 수도 있어, 그리고 내년엔 학교에도 갈 수 있어" 이 말은 지금까지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흥분한 아버지의 얼굴도요.
그때 병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어요. 일자로 된 건물에 칸칸이 병실이 있었고, 침대하나가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어요. 원룸형태의 긴 건물의 병실에 입원환자는 저 혼자였어요. 저녁에 오신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새벽에 집으로 가셨고, 하루종일 내내 혼자 지냈죠.
낮에 어머니가 방문할 때는 동생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때가 가장 즐거웠어요. 동생들은 깁스한 제 다리를 신기한 듯 만져보기도 하며, 그동안의 일을 신나서 저한테 들려주었어요. 그리고 병실 안을 뛰어다니며 놀이를 했고, 어머니는 저의 눈치를 보며 몰래몰래 눈물을 훔치셨죠.
그날도 여전히 비가 내렸어요. 언제나처럼 나의 시야는 병실 문밖을 향하고 있었고, 볼 수 있는 공간은 문크기만큼이었어요.
병실문 처마밑에는 낙수물로 웅덩이가 제법 커졌고, 두꺼비가 엉금엉금 기어 와서 병실 안을 들여다보며, 눈을 껌벅껌벅하다가 지나갔고, 제가 제일 싫어하는 청개구리가 폴짝폴짝 뛰어들어와 병실을 이리저리 뛰더니 나가 버렸죠.
청개구리는 부모님 말씀 안 듣고 정 반대로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제가 가장 싫어했어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데 저는 반대로 가슴 아프게 하는 자식이니까 제가 청개구리 같아서 제일 싫어했어요.
청개구리가 방을 휘젓고 빗속으로 사라진 후, 아버지가 병실오 들어오셨고, 어머니도 뒤따라 들어오셨어요.
아버지는 침대 위에 있는 저를 들쳐 없으시고, 어머니에게는 빨리 챙기라며 소리를 지르셨죠. 아버지가 저를 둘러업을 때까지는 또 의사한테 가서 커다란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것 아냐 하는 생각에 긴장이 되고 무서웠어요.
그런데 어머니에게 병실 물건을 챙기라고 하는 말에서는 집에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빨리 병실 밖을 나가고 싶었죠. 아버지 마음이 바뀌기 전에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고, 저를 업고 아버지는 병실밖을 나셨죠. 여전히 비는 장대비처럼 내렸어요.
집에 있는 동생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병원이 망했나. 그렇지 않고서야 깁스로 뻣뻣한 나를 업고 비가 오는 날 병실밖을 나가야 할 일이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여쭈어 볼 틈도 없었어요.
나를 업자 마자 아버지께서는 빗속으로 달려 나가셨으니까요. 비를 맞으면서도 아버지의 등에서 저는 동생들을 볼 수 있고, 소독약 냄새나는 병실에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어요.
병원에서 집까지는 어른걸음으로 20여분, 집 앞에는 강보다는 작은 냇물이 흐르는 하천이 있었죠.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징검다리를 통해 물을 건널 수 있는 작은 하천이었지만, 여름 내내 장맛비로 인해서 하천에는 붉은 황톳물이 세차게 흘렀고, 물속에서는 바위가 구르는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어요. 마치 물속에서 천둥이 치듯이요.
물을 건너기 위해 반쯤 들어갔을 때 엄청난 속도로 달여오는 세찬 물은 아버지 허리까지 위협하고, 구르는 돌은 아버지 다리에 닿아 아버지가 휘청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뒷따라 하천으로 들어오는 어머니를 향해 산밑을 돌아 오라며 큰소리로 말했죠. 하천의 상류는 철뚝길로 연결되어 있어서 물을 건너지 않아도 되지만, 시간은 1시간 이상 더 걸렸죠. 어머니가 상류로 향하는 것을 본 아버지는
" 우리 딸!! 우리 같이 죽을까?, "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도 없었지만, 아버지가 그 말씀을 왜 하시는지도 몰랐으니까요. 세차게 밀려오는 강물이 무서워 아버지의 목을 양팔로 더 감아쥐었어요.
아버지께서는 중심을 잡으시더니, 다시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하셨어요. 아버지의 허리에는 떠내려온 나뭇가지가 걸렸고, 흙탕물인 하천물은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죠. 아버지의 다리에 부딪치는 돌멩이 소리도 점점 더 크게 들렸어요. 깁스한 저의 다리도 이미 다 젖었고, 아버지랑 나랑 모두 떠내려 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점점 아버지 등에 달라붙었죠.
" 내가 너하고 여기서 죽으려고 엄마를 멀리 돌아오라고 했다. 동생들이 있으니까 엄마는 살아야지"
" 병원에서는 너의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했어. 그럼 너의 앞날은 어떻게 되겠어. 그럴 바에야 너하고 나는.."
아버지는 의사의 말에 내 새끼 병신 만들어도 내가 만든다며 뛰쳐나와 나를 업고 집으로 향했다고 했죠. 한참 후에 도착한 어머니는 울기만 하셨죠.
집에 와서도 병원에서처럼 비 오는 밖을 쳐다보는 일상은 계속되었어요. 그래도 동생들이 옆에 있고, 어머니의 따뜻한 밥을 계속 먹을 수 있어 좋았어요.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근심 어린 표정은 여전했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날이었어요. 이제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그 지겹던 여름 장마도 끝나 있었죠.
퇴근하신 아버지의 손에는 긴 실톱이 들려 있었어요. 아버지께서는 기계나 장비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또 하나 장비가 추가되는구나... 하며 무심하게 쳐다보았죠.
방으로 들어오신 아버지는 저를 덜렁 들어 바람도 시원하고, 햇빛도 잘 드는 뜨락에 저를 앉히시더니, 그 긴 실톱으로 다리의 깁스를 흥부가 박을 타듯 톱질을 하시는 거 아니겠어요.
병원에서 주사를 맞던 기억이 떠올라 긴장하며, 아버지가 실수하지 않고, 깁스를 잘 잘라내길 바랐어요. 톱질을 하는 주변으로 어머니, 동생들, 이웃 친구들이 몰려들었고, 아버지는 마치 의사가 된 듯 의기양양하게 톱질을 하셨죠.
드디어 깁스가 두 동강으로 갈라지며, 하얗고 가느다란 제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죠. 구경하던 모두가 와!! 하며 함성을 질렀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긴장하고 계셨어요. 조심조심 저를 세우시더니 서보라라고 하셨죠.
저는 아주 잠깐 설 수 있었고 바로 주저 앉았버렸어요. 아버지는 거의 1년을 쓰지 않았는데 어떻게 바로 설 수 있냐며 천천히 서는 연습을 하잖고하셨어요.
그 후 연습 끝에 서게 되었고 , 1년 후에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어요.
아버지!!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저를 둘러업고 나오신 것, 거센 물살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건너신 것, 고맙습니다.
특히 앞날을 예측할 수 없어 막막했고, 장애로 살아갈 것을 마음 아파도 함께 헤쳐나가려고 마음을 고쳐 먹은 것, 아버지의 무모한 선택이 저를 살리신 것이잖아요. 그래서 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지금껏 하지 못했어요.
그 이후 저는 정상인이 되어, 학교도 다니고, 결혼도하고, 아이도 낳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손주까지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