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편을 바라보다
H를 만난 것은 다양한 직업과 나이의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에서였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던 중 통역 일을 한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 꽤 특이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소개를 하는 순간 저절로 그에게 모두의 눈길이 모였다. 그가 바로 H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한국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H는 통역하는 언어를 가진 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여러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질문을 하고 있었는데 질문하는 사람이 바뀌어도 H에게 묻는 질문은 비슷했다. 어떻게 들으면 살짝 무례했고 어떻게 들으면 호기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질문들. H는 나름 익숙한 듯 분위기를 크게 해치지 않고 대답했지만 그 질문을 듣다 보니 H에게 왠지 마음이 쓰였다. 모임이 끝나고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평생 처음으로 처음 만난 사람의 번호를 물어보게 됐다. 절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둥, 내 동생과 나이가 같아서 밥이라도 한 번 사주고 싶다는 둥 흰소리를 해댔다. H는 다음 달 말에 1달 정도 고국에 가 있을 계획이라고 하며 그전에 꼭 만나자고 했다. 대개의 경우 그렇게 약속을 했더라도 거기서 끝나버리지만 며칠간 간간히 H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날 H가 들었던 말들에 괜히 신경이 쓰여서 결국 H에게 연락해 다음 주 주말 종로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주말 낮 종로에는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조금 적은 골목으로 들어가 파스타 집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며칠 전에는 여러 사람과 있어서 자세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고 보니 아직 H는 학생 신분이었다. 한국 대학원에 유학을 와서 석사과정을 마쳤고 논문 심사를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논문 준비를 하는 중이고 끝나면 한국에 있어야 할지 다시 돌아가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듣다 보니 아니, 이미 번호를 물었을 때부터 굳이 개인적으로 왜 H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계속 생각해봤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에게 호기심인지 실례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질문을 하는 한국 사람들을 대신해 사과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그저 나 역시도 다른 나라 사람에 대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 것뿐인지.
피자가 나와서 앞 접시에 덜어주고 나도 한 조각을 먹었다. 그 날 사람들의 질문에 상처 받지 않았냐고 묻자 너무 자주 있어서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고 또 대학생 때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 교환학생을 했는데 그때는 훨씬 심했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은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하필 내가 그 지방 출신이라 멋쩍게 웃으며 한국은 아직까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많이 만나보지 못해서 잘 몰라서 상처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아니, 어쩌면 그런 사람들은 한국 사람에게도 무례할 것이 분명하다고 횡설수설하며 괜히 변명 같은 위로를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익숙한 지점에 와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런 말들이 돌아가고 싶은 이유 중에 하나가 되기도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모임에서 그 나라도 괜찮은데 굳이 한국에 왜 왔냐고 꽤 여러 번 질문을 받았는데 이 질문에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 보면 정작 답이 사라져 버리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서의 대답은 가볍게, 한국어를 전공해서요.라고 말하지만.
H는 요새 자주 떠올리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대학 마지막 학기 가고 싶었던 회사에 떨어지고 다른 곳에서 오퍼가 왔는데 거절했다고 했다, 그 순간 만약 수락했다면 어땠을까 자주 떠올린다고 했다. 부모님은 걱정하고 돌아오길 바라고 한편으로는 한국에 계속 살고 싶기도 하지만 호기심 어린 시선도 없고 아무도 왜냐고 묻지 않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한 마음.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같이 유학 온 친구들은 대부분 돌아가려고 준비 중이라 다들 떠나고 나면 정말 후회할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그런데 또 얼마 전 점을 봤는데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살아야 잘 된다고 했다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비록 나라 안에서 다른 곳으로 대학을 왔지만 나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터라 어떤 마음인지는 어렴풋이 짐작이 가능했다. 다만 대학원을 가고 그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으면 조금은 더 진로에 확신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삶에 확신을 가진다는 것은 그런 것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인 듯했다.
처음 만나 대화하는 것치고 대화는 꽤 잘 이어졌다. 피자와 파스타는 허기가 좀 가시고 난 뒤에는 이야기하느라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목이 말라서 물을 몇 번이나 리필했다. H의 나라에도 여행을 갔던 적이 있어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H는 내가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 같다며 놀라워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계속 다니다 보니 여행보다는 한 곳에 조금 오래 머물러보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 진다고 그래서 아마도 자꾸 그만두고 유학을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H는 물었다. “실례지만 계약직이세요?” 뭐랄까. 선입견 없이 대화하려고 노력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외국인의 입에서 나오는 그 단어는 이상하게 이질적으로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아니라고 하니 “정규직이면 안정적일 텐데 왜 굳이 그만두려고 하세요?” 이번에는 자조적인 웃음을 섞으며 그러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얘기를 계속하다 보니 결국 H의 삶이 궁금했던 이유는 내가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H와 나는 정반대의 상황에 있었다. 나는 사는 게 지루해서 변화를 주고 싶은데 쉽게 발을 딛지 못하는 중이고 H는 몇 년간 많은 변화에 휘말려 있어 안정이 그리워진 것 같았다. 자리를 카페로 옮겨서 대화는 좀 더 이어졌다. 고국에 잘 다녀와서 한국에 오면 연락 달라고 다시 한번 만나자는 말로 H와 지하철역 출구 앞에서 인사를 하고 나는 조금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H가 모임에서 느꼈다는 답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을 이번에는 내가 느끼고 있었다. 길을 걸으며 흩어지는 것 같은 답들을 잡아보려 했다. 첫 번째 지하철역을 지나 더 걸었다. 며칠 전에 읽었던 책의 구절이 생각났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 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그래도 더 걸어야 했다. 두 번째 지하철역을 지나 세 번째 지하철역이 보였다. 여전히 조금 더 걸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