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손주에게 주시는 달달한 내리사랑
가족 중에도 좋았던 기억이나 특별한 감정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대하기 어렵거나 개인적으로 챙기기는 어색한 사람이 있다. 나에게는 할머니가 그런 사람이었다. 단지 할머니, 아빠의 어머니 그 정도의 마음 밖에 없었다. 1년에 많이 보면 3~4번 만나는데다 할머니 댁에 가도 늘 음식장만이나 밭일을 하느라 바쁘셨고 다 같이 밥을 먹을 때나 마주 앉게 되었다. 그렇게 할머니와 앉으면 자주 혼나곤 했다. 왼손을 쓴다고. 머리칼을 똑바로 묶지 않았다고 밥을 천천히 먹는다고 취직하고는 결혼하라고. 귀가 조금 불편하셔서 큰 소리로 말하는 억센 사투리는 몇 마디 하지 않아도 더욱 격하게 들리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께 살갑게 연락을 드린 적도 없었고 할머니 댁에 가도 인사만 꾸벅하고 말았다. 엄마는 늘 할머니께서 나를 많이 챙겨주시니 연락도 드리고 챙겨드리라고 하지만 하시는 잔소리 듣기도 싫고 딱히 할 말도 없어 어색할 것 같아 건성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온 가족이 할머니 댁에 모이는 날이면 할머니는 늘 음식을 많이 만들어두셨다. 김치, 호박이 들어간 팥시루떡, 20명이 넘는 사람이 먹고도 남을 큰 솥에 담긴 국, 식혜 등등을 만들어 놓고 자식들이 가기 전에는 밭으로 가서 가져갈 작물들을 수확해 주시곤 했다. 몇 년 전 허리 수술을 하고 난 뒤에는 엄마와 숙모들이 힘들다고 하지 말라고 하기도 하고 본인 힘에도 부치시는지 음식의 양도 가짓수도 조금씩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식혜만큼은 거의 매번 만드셨는데 평소에는 식혜를 거의 먹지도 않으면서 할머니의 식혜만큼은 꼭 챙겨 먹었다. 식혜는 상하기 쉽고 들고 오기도 쉽지 않은데다 다른 챙겨 올 음식들이 많으니 남은 음식들을 나눠서 각자의 집으로 챙겨갈 때 엄마는 식혜를 집으로 종종 가져오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할머니 댁에서 더 많이 먹고 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내가 집에서 나와 살고 난 뒤 어느 명절에 남은 음식들을 챙겨 본가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음식들을 정리하다가 할머니가 싸준 식혜를 깜빡 잊고 두고 온 것을 알았다. 나를 향해 이것도 살림을 한다고 한 몫 챙겨줘야 한다며 할머니께서 작은 페트병에 담아 둔 내 식혜도 함께. 농담에 진담 쬐금 섞어서 식혜 가지러 가자고 징징거렸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식혜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엄마도 아주 오래전 만들어 본 적이 있지만 맛있게 안 되더라 말했다. 나는 할머니께 비법을 물어보자고 했다. 엄마는 잘 도착했다고 인사드리고 식혜 두고 왔다고 말씀 드리게 나보고 전화하라고 했다. 할머니께 살갑게 굴기 어려운 나는 전화를 걸어서 받는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엄마 귀에다 갖다 댔다. 늘 할머니께 싹싹한 엄마는 이런 저런 할머니의 얘기를 듣고 내가 식혜를 안 가져와서 아쉬워한다고 식혜 만드는 법을 물었다. 나는 통화하는 엄마의 볼에 내 볼을 마주 대고 수화기 너머 할머니의 말을 엿들었다.
“질금 가루를 물에 담가놨다가 치대가꼬 그 물을 꼭 짜주야 된다. 그라고 밥을 꼬들하이 지가꼬 물을 찰방하이 부은 데다가 질금가루 물을 붓는기라. 설탕도 좀 타고. 그거를 이불에 싸서 아랫목에 하룻밤 뒀다가 끼리면 된다.”
식혜를 어떻게 만드는 지 잘 몰랐던 나는 적잖이 복잡한 과정과 만드는데 긴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놀랐다. 결국 식혜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고 두고 온 식혜는 할머니 댁을 늦게 떠난 삼촌네의 차지가 되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할머니 댁에 가면 식혜를 더욱 더 꼭 챙겨 먹게 됐다. 가자마자 부엌 뒤 편 창고의 큰 솥에 식혜가 있는지 확인하고 식혜를 퍼 담는다. 그러면 할머니께서 다른 식구들도 주라고 하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식혜를 그렇게 챙겨 먹는 사람이 가족 중에 나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됐다. 몇 그릇 퍼 가면 꼬맹이들이 좀 먹고 다른 식구들은 그렇게까지 식혜를 많이 먹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먹을 것이 엄청 많아 다른 음식 먹기도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이십년 넘게 할머니의 식혜를 받아먹기만 하던 나는 그 많은 식혜를 먹고 나서야 할머니의 식혜가 말 한 번 상냥하게 하지 않고 전화 안부 한 번 드리지 않는 무뚝뚝한 손주 몫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식혜 챙겨야 된다고 그 말만 할 줄 알았지 몸이 불편하시면서도 빠지지 않고 만드는 과정도 복잡한 식혜를 만드는 이유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는 흔한 명제를 쓸데없이 열심히 증명하고 있는 인간이었다. 솔직히 몇 년 전 그 사실을 깨닫고서도 할머니를 대하는 내 태도가 그렇게 극적으로 바뀌진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전화 드리는 일은 어렵고 쑥스럽고 하시는 말씀이 잔소리로 느껴질 때도 많다. 하지만 이제라도 조금씩 할머니께 다정한 손주가 되려고 노력 중이다. 영양제와 과일을 사가면 이런 것 사오지 말고 결혼할 사람 데려오라는 할머니의 말에 아직 손주 능력이 안 돼서 못 데려오니 데려올 때까지 오래 오래 사시라는 눙을 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