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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May 29. 2020

할머니의 식혜

부족한 손주에게 주시는 달달한 내리사랑






가족 중에도 좋았던 기억이나 특별한 감정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대하기 어렵거나 개인적으로 챙기기는 어색한 사람이 있다. 나에게는 할머니가 그런 사람이었다. 단지 할머니, 아빠의 어머니 그 정도의 마음 밖에 없었다. 1년에 많이 보면 3~4번 만나는데다 할머니 댁에 가도 늘 음식장만이나 밭일을 하느라 바쁘셨고 다 같이 밥을 먹을 때나 마주 앉게 되었다. 그렇게 할머니와 앉으면 자주 혼나곤 했다. 왼손을 쓴다고. 머리칼을 똑바로 묶지 않았다고 밥을 천천히 먹는다고 취직하고는 결혼하라고. 귀가 조금 불편하셔서 큰 소리로 말하는 억센 사투리는 몇 마디 하지 않아도 더욱 격하게 들리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께 살갑게 연락을 드린 적도 없었고 할머니 댁에 가도 인사만 꾸벅하고 말았다. 엄마는 늘 할머니께서 나를 많이 챙겨주시니 연락도 드리고 챙겨드리라고 하지만 하시는 잔소리 듣기도 싫고 딱히 할 말도 없어 어색할 것 같아 건성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온 가족이 할머니 댁에 모이는 날이면 할머니는 늘 음식을 많이 만들어두셨다. 김치, 호박이 들어간 팥시루떡, 20명이 넘는 사람이 먹고도 남을 큰 솥에 담긴 국, 식혜 등등을 만들어 놓고 자식들이 가기 전에는 밭으로 가서 가져갈 작물들을 수확해 주시곤 했다. 몇 년 전 허리 수술을 하고 난 뒤에는 엄마와 숙모들이 힘들다고 하지 말라고 하기도 하고 본인 힘에도 부치시는지 음식의 양도 가짓수도 조금씩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식혜만큼은 거의 매번 만드셨는데 평소에는 식혜를 거의 먹지도 않으면서 할머니의 식혜만큼은 꼭 챙겨 먹었다. 식혜는 상하기 쉽고 들고 오기도 쉽지 않은데다 다른 챙겨 올 음식들이 많으니 남은 음식들을 나눠서 각자의 집으로 챙겨갈 때 엄마는 식혜를 집으로 종종 가져오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할머니 댁에서 더 많이 먹고 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내가 집에서 나와 살고 난 뒤 어느 명절에 남은 음식들을 챙겨 본가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음식들을 정리하다가 할머니가 싸준 식혜를 깜빡 잊고 두고 온 것을 알았다. 나를 향해 이것도 살림을 한다고 한 몫 챙겨줘야 한다며 할머니께서 작은 페트병에 담아 둔 내 식혜도 함께. 농담에 진담 쬐금 섞어서 식혜 가지러 가자고 징징거렸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식혜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엄마도 아주 오래전 만들어 본 적이 있지만 맛있게 안 되더라 말했다. 나는 할머니께 비법을 물어보자고 했다. 엄마는 잘 도착했다고 인사드리고 식혜 두고 왔다고 말씀 드리게 나보고 전화하라고 했다. 할머니께 살갑게 굴기 어려운 나는 전화를 걸어서 받는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엄마 귀에다 갖다 댔다. 늘 할머니께 싹싹한 엄마는 이런 저런 할머니의 얘기를 듣고 내가 식혜를 안 가져와서 아쉬워한다고 식혜 만드는 법을 물었다. 나는 통화하는 엄마의 볼에 내 볼을 마주 대고 수화기 너머 할머니의 말을 엿들었다.

“질금 가루를 물에 담가놨다가 치대가꼬 그 물을 꼭 짜주야 된다. 그라고 밥을 꼬들하이 지가꼬 물을 찰방하이 부은 데다가 질금가루 물을 붓는기라. 설탕도 좀 타고. 그거를 이불에 싸서 아랫목에 하룻밤 뒀다가 끼리면 된다.”


식혜를 어떻게 만드는 지 잘 몰랐던 나는 적잖이 복잡한 과정과 만드는데 긴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놀랐다. 결국 식혜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고 두고 온 식혜는 할머니 댁을 늦게 떠난 삼촌네의 차지가 되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할머니 댁에 가면 식혜를 더욱 더 꼭 챙겨 먹게 됐다. 가자마자 부엌 뒤 편 창고의 큰 솥에 식혜가 있는지 확인하고 식혜를 퍼 담는다. 그러면 할머니께서 다른 식구들도 주라고 하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식혜를 그렇게 챙겨 먹는 사람이 가족 중에 나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됐다. 몇 그릇 퍼 가면 꼬맹이들이 좀 먹고 다른 식구들은 그렇게까지 식혜를 많이 먹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먹을 것이 엄청 많아 다른 음식 먹기도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이십년 넘게 할머니의 식혜를 받아먹기만 하던 나는 그 많은 식혜를 먹고 나서야 할머니의 식혜가 말 한 번 상냥하게 하지 않고 전화 안부 한 번 드리지 않는 무뚝뚝한 손주 몫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식혜 챙겨야 된다고 그 말만 할 줄 알았지 몸이 불편하시면서도 빠지지 않고 만드는 과정도 복잡한 식혜를 만드는 이유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는 흔한 명제를 쓸데없이 열심히 증명하고 있는 인간이었다. 솔직히 몇 년 전 그 사실을 깨닫고서도 할머니를 대하는 내 태도가 그렇게 극적으로 바뀌진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전화 드리는 일은 어렵고 쑥스럽고 하시는 말씀이 잔소리로 느껴질 때도 많다. 하지만 이제라도 조금씩 할머니께 다정한 손주가 되려고 노력 중이다. 영양제와 과일을 사가면 이런 것 사오지 말고 결혼할 사람 데려오라는 할머니의 말에 아직 손주 능력이 안 돼서 못 데려오니 데려올 때까지 오래 오래 사시라는 눙을 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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