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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May 21. 2020

장래희망에서 멀어지기

5월의 밤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






어쩌다 보니 O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회사 선배 3명과 술을 마시고 있다. 몇 달간 진행했던 프로젝트 성과는 별로 좋지 못했고 그래서 칼퇴근이 가능해져 버린 아이러니한 날이었다. 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조금은 씁쓸했고 차라리 잘 됐다 싶기도 했다. 슬슬 눈치를 보면서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과장이 술이나 한 잔 하겠냐고 물었다. 과장도 비슷한 마음인 것 같았다. 매번 회식 외에 술자리는 거절했지만 그날은 막상 마음이 허해 집에 가서 혼자 저녁을 먹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겠다고 했다. 자리에 가보니 다른 팀 부장과 과장이 와 있었다. 괜히 왔나 살짝 후회했지만 비싼 술과 안주를 공짜로 얻어먹는 대가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부장과 과장의 상사 뒷담화를 듣는 재미도 있었다. 과장과 부장에게도 괴로운 상사가 있을 것은 어쩌면 당연했지만 눈앞에서 생생하게 듣는 일은 나름 신선했다. 그러다 과장은 O에게 화제를 돌렸다. 프로젝트가 잘 됐으면 이번에 승진할 수도 있었는데 아쉽다고 했다. O는 승진에 별로 욕심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과장은 아직도 그만두려고 생각하느냐고 절대 안 된다고 농담인 듯한 표정에 진담 같은 말투로 말했다. O는 아니라고 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과장과 부장은 담배를 태우러 자리를 비우자 다른 팀 과장이 넌지시 왜 그만두려 했냐고 물었다. 


작년 이맘때쯤 O는 그만두겠다고 과장에게 말했었다. 퇴사해 본 사람들의 경험담을 수집해보니 당사자만 말 꺼내기가 어렵지 의외로 회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절차를 착착 진행한다고 했다. 그래서 과장에게 큰 망설임 없이  말을 꺼냈다. 의외의 의외로 과장은 O에게 퇴사 후 계획을 자세히 묻기 시작했다.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 자세히 말할 수 없었던 건지 유학 준비하려고 한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니 돈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확실히 결정되면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O를 설득하려 했다. O는 설득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 더 고민해보겠다고 말하며 대화가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O는 조금 더 확실한 계획을 세워서 퇴사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계획은 조금씩 흐려지고 오히려 예상치 못하게 큰돈이 들어갈 일이 생길 때마다 그때 그만두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벌써 1년이 흘렀다. 



질문에 답하려고 지난 1년을 머릿속으로 훑어보니 그만두고 유학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막상 그만두는 게 겁나서 망설이고 있다는 한 문장으로 쉽게 압축되었다. 그러자 다른 팀 과장도 번역가가 되고 싶어서 대학원에 갈 계획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회사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 순간 언젠가 O는 자신도 몇 년 후에 회사 후배에게 그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 등 뒤가 서늘했다. O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그저 그러셨군요 답하고는 술을 홀짝 마셨다. 그는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이었다. 그래서 O는 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회사를 꼭 그만둬야만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를 다니다 보면 자기 합리화를 위해 흑백논리로 현실을 바라볼 때가 많아진다. 그의 상황이 너무도 잘 이해됐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O는 지금이라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아마 친구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얼마 전 친구와 퇴사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것이 겹쳤다. 이번에는 정말로 회사를 그만둘까 한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말리던 친구는 술이 한두 잔 들어가니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며 나 대신 꿈을 이뤄달라며 낄낄거렸다. O는 무슨 유언 같은 소리를 하냐며 너도 같이 유학 가자고 했다. 친구는 손을 휙휙 내저으며 자신은 완전히 틀렸다고 했다. 이제 그런 적은 가능성을 비집고 들어가려고 노력하기에는 열망도 돈도 없다고. 주정 같은 오기로 친구에게 너도 관둬라 떼썼지만 대화 몇 번 해본 적 없는 다른 팀 과장에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담배를 태우러 갔던 부장과 과장이 돌아오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회사 이야기로 흘러갔다. 평소에 잘 먹지 못하던 비싼 술을 열심히 마시며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 보니 술자리는 끝났다. 



O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밤거리를 걸었다. 차 지나가는 소리마저 시원하게 들리는 5월의 어느 밤이었다. O는 과장의 말을 생각했다.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꼭 그 말이 미래를 예언하는 것처럼 귓가에 울렸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다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갑자기 고등학교 교실이 떠올랐다. 대학 지원을 얘기하면서 친구들과 하던 말들. A의 꿈은 천문학자였다. B의 꿈은 UN에서 일하는 것이었고 C의 꿈은 건축가였고 D의 꿈은 외교관이었다. 친구들의 꿈은 언젠가부터 조금씩 흩어져 지금은 아주 흐릿한 과거의 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었다. 도대체 친구들의 장래희망 따위를 왜 기억하고 있을까? 분명 정확히 어느 한순간에 그 꿈으로부터 빠져나온 것은 아닐 것이었다. 대학을 갈 때만 해도 분명 그 꿈을 위해 선택을 했었고 취업을 해서도 완전히 놓지 못한 친구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O도 겨우 1년 사이에 결심이 더욱더 흐릿해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으니까. 한편으로는 이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은 용기라고 믿고 싶은 것을 그저 오기로 치부해버리는 그런 날이 오면 마음은 편할까 싶기도 했다. 


O는 왜 그때 과장의 설득에 쉽게 마음을 돌렸는지 1년 동안 틈틈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1년을 더 회사를 다닌다고 엄청나게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희미하던 결심이 선명해지는 것도 아닌데. 어쩌면 꿈으로만 남겨두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과장의 설득에 책임을 떠넘기면서, 어느 날은 허황된 망상으로 치부해버리면서,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곧 떠날 도피처처럼 쓰는 그저 딱 그 정도의 용도로 쓰면서 아주 편안하게 1년을 보낸 건지도 모른다. 오늘 같이 충분히 아쉬워해야 하는 상황에서 벌써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듯 프로젝트의 결과를 대하고 다른 팀 부장의 말을 애써 외면해가면서. 우리가 꿈을 향해 간직하던 마음에서 완전히 이탈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부터일까? 꿈을 꿈으로만 바라보게 되는 순간. 하고자 마음만 먹고 노력만 하면 언제든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이 생긴 지금의 세계에서, 그래서 세상에 핑계도 원망도 할 수 없도록 구성된 지금의 세계에서. 그래서 꿈을 잃어버린 것도 뺏긴 것도 아니라 단지 포기한 것이 되어버리는, 오로지 개인의 선택일 뿐인 지금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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