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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이 May 13. 2020

헌책을 구경하다가

각인된 기억을 엿볼 수 있는






헌책방을 단지 책값이 싸기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헌책방에 있는 그 책은 어떤 사정을 거쳤든 이제 세상에 그 책 한 권 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 특이한 한정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전 주인의 이름이 책 옆구리에 쓰여 있기도 하고 밑줄이 곳곳에 쳐져 있기도 하고 종이를 접었다 편 흔적이 있기도 하고 급하게 메모를 하기도 하고 책을 선물한 이가 속지에 짧은 편지를 써 두기도 한다. 그런 책들을 구경하는 것, 어떤 주인을 만났다가 어떤 과정으로 헌책방으로 오게 됐는지 상상하는 것, 그리고 마음에 든다면 책을 사 오는 것까지가 헌책방을 가는 이유에 포함될 것이다. K는 집에 오는 길 헌책방에 자주 들린다. 책은 한 권도 사지 않을 때도 있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후회할 정도로 많이 사는 날도 있다. 어쩌면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도 찾지 못할 때도 있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도 헌책방의 장점이자 단점일지도 모른다. 조금 과장해보자면 도박을 하는 느낌이 아닐까? 그래서 K는 가능하면 매일 헌책방에 들리려 한다. 마음에 드는 책을 언제 발견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책장에 꽂힌 책들을 쭉 바라본다. 그러다 한 권을 뽑아 이리저리 뒤적이며 내용들을 읽어본다. 몇 페이지 정도 더 넘기자 끼워 두었던 종이가 팔랑팔랑 떨어진다. 주워 펼쳐 보니 다이어리 속지를 뜯어 아무렇게나 써 내려간 글귀였다. 종이가 있던 페이지에는 밑줄이 쳐진 문장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마지막 만남은 애틋하다. 마지막인지 알아도, 마지막인지 몰랐을지라도.


 그 책의 제목은 기억하지 못해도 밑줄의 문장을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이유는 그 종이쪽지의 글귀 때문이다. 그날, 헌책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신기한 일들을 관장하는 헌책 시장의 신*이 K에게 이 종이쪽지를 건네 준 것이 틀림없다. K는 책은 내버려 두고 종이만 챙겨서 헌책방을 나왔다. 쪽지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당신과의 마지막 만남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낮은 너무 뜨겁고 밤은 포근하고 시원하던 계절 위의 어느 날 밤 당신과 공원을 걸었습니다. 대화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관계에 대해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용한 것들에 대해서만 말했을 것입니다. 마음은 좀 더 걷고 싶었지만 몸이 너무 피곤했습니다. 내가 그랬으니 구두를 신었던 당신은 더 피곤해 보였습니다. 그만 걷고 집으로 가자했습니다. 당신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앞으로 걷고는 있었지만 뒤꿈치를 꾸욱 누르며 걸음을 애써 늦추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거리를 늦출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건네며 끼니를 잘 챙겨 먹으라고 했습니다. 가방을 받아 들고는 허리를 깊이 숙여 깍듯이 인사했습니다. 당신은 이럴 때만 깍듯하다며 씁쓸한 듯 우스운 듯 묘한 표정을 짓고는 손을 흔들며 걸어갔습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습니다. 왠지 모르게 이 만남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당신을 다시 만날 일은 없었습니다. 나는 그 장면을 퍽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끝까지 바르고 깍듯했던 우리의 만남을. 물론 당신이 어떻게 기억할지 아니, 기억이나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조금 간격을 두고 훨씬 더 아무렇게나 휘갈긴 서체로 쓰인 문장들이 이어졌다.     

 


꿈에서만 당신을 만나길 바라던 날들이 이어졌다. 꿈에서만은 보고 싶었다. 현실에선 그 날의 만남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으면 했다. 당신은 기억도 못하겠지만. 나는 그 날 우리의 만남이, 그리고 마지막일 줄 몰랐던 그 인사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래야만 하는 건 없었다. 내가 죽지 않고 당신이 죽지 않은 이상. 그래서 우리는 만났다. 당신을 만나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남산 꼭대기에서 해남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사는 내가 걷는 걸음과 내가 바라는 순서와는 전혀 무관했다. 우리 사이에는 늘 웃음과 깍듯한 인사가 있다. 내 뒤에는 그걸 뺀 찌꺼기들이 쌓여 있다. 찌꺼기만 내 것이다. 찌꺼기들을 데리고 집으로 간다. 찌꺼기들은 떠든다.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어도 길도 잃어버리지 않고 잘도 조잘거리며 따라온다.      


찌꺼기들은 그가 책을 읽는 순간에도 종이에 글을 쓰는 순간에도 조잘거리며 그를 따라다녔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그 책도 그에게 찌꺼기 같은 것이었을까? 그래서 종이와 함께 책을 팔았던 걸까? K가 종이를 가져오는 바람에 이제 그 책을 사는 사람은 왜 그 문장에 밑줄이 쳐져 있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K는 쪽지를 읽은 값을 그 책을 판 사람이 찌꺼기들을 훌훌 잘 털어버리길 기도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음날 K는 다시 헌책방을 방문했다. 책장을 쭉 훑어보다가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책 속지에 JH에게라고 유성펜으로 적혀 있었다. K도 누군가에게 속지에 글귀가 적힌 책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책이 어디로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그 책도 어느 헌책방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K는 그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고 책장 맨 밑 칸에 있는 책 한 권을 뽑아 들어 펼쳤다. 

종이에 각인된 기억은 모두 헌책이 되는구나.*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쪽지의 새로운 자리로 알맞은 곳 같았다. K는 쪽지를 그 구절이 있는 페이지에 끼워서 다시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그제야 어쩌면 그 쪽지가 계속 여행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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