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 읽기 4
5세기에서 13세기까지: 로마와 비잔티움, 이슬람과 중국, 유럽
기로에 선 미술
5세기에서 13세기까지: 로마와 비잔티움
31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교회가 국가 최대 권력이 되자 예배장소가 필요했다.
예배장소는 기능과 형태의 차이가 있는 고대신전을 모델로 할 수 없었다. 거의 모든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전통적인 신앙과 새로운 복음의 차이를 위해 교회당에 어떤 조상(彫像)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했다. 그래서 큰 회당이라는 뜻의 ‘바실리카’라는 고전기의 집회소 형태를 본뜨게 되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조각상을 반대한데 반해 회화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6세기말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많은 신도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림이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막강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회화를 옹호했다는 사실은 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용인된 미술의 유형은 성스러운 목적에서 주의가 벗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배제해야만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로마 시대의 설명조의 이야기 방식이 사용되었으나 점차 엄격하게 본질적인 것만 집중하게 되었다. 교회가 명확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회화에 있어서 모든 사물을 표현하는데 명확성을 중요시했던 이집트의 관념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화가들은 원시 미술의 단순한 형식이 아닌 그리스 회화에서 한층 더 발전된 것으로 세련된 방법과 기묘하게 혼합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500년경 그리스에서 소생했던 자연 관찰력은 다시 잠들어버렸다.
이제 교회에 있어서 미술의 정당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는 유렵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754년 동로마 제국의 한 교회 일파는 종교적인 성격의 모든 형상에 대해 반대하여 모든 종교적인 미술을 금지했다. 그래서 성모의 참된 성상, 즉 이콘(icon)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오래된 전통에 의해 신성시된 틀에 박힌 유형이었다. 전통의 준수에 있어서 이집트 인처럼 엄격하게 준수했던 비잔틴 교회는 성상을 그린 화가에게 고대의 모델을 엄격하게 지키라고 요구함으로써 한편으로 그리스 미술의 관념과 업적을 그대로 보존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전통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나 성모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허용된 범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 때문에 미술가들이 자신의 개인적 자질을 개발하기 어려웠을 것 같지만 이러한 보수성은 서서히 발전하기에 미술가들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동방의 미술
2세기에서 13세기까지: 이슬람과 중국
7세기와 8세기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을 정복한 이슬람교는 형상의 문제에 대해 기독교보다 훨씬 더 엄격하여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기시했다. 인간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동양의 장인들은 대신 문양이나 형태 자체의 아름다움에 그들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아라베스크라고 알려진 매우 정교한 장식을 창조했다. 미술가들은 그들의 마음을 현실 세계의 사물로부터 선과 색채라는 환상의 세계로 돌렸다. 후기 몇몇 회교 종파들은 형상의 금지라는 문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덜 엄격했다. 종교와 관계없는 한에 있어서 인체와 삽화를 그리는 일이 허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종교가 미술에 미친 영향이 이슬람보다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났다. 당시 중국의 그림들에는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 생활과 풍습을 반영하는 생생한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중국 미술가들은 딱딱한 이집트식 표현보다 부드러운 곡선을 더 선호했다. 그러나 중국 미술을 가장 자극하고 활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불교의 영향이었다. 불교는 그림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을 도입시켜 미술가의 업적을 매우 존중하게 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는 일을 천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화가를 영감을 받은 시인과 동등한 위치에 놓은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동양의 종교는 올바른 명상이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중국의 종교 미술은 특정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기보다 명상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신앙심이 깊은 미술가들은 명상의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존경의 염(念 )으로 산과 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12세기와 13세기의 중국 산수화의 위대한 걸작들이 의도했던 바는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중국미술가들은 소재를 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기보다 그들 나름의 명상과 정신 집중이라는 색다른 방법을 통해서 예술을 익혔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탐구함으로써 ‘나무’나 ‘바위’, ‘구름’등을 그리는 법을 터득했다. 그들은 이런 기법을 완전히 터득한 뒤에야 비로소 여행길에 올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사색하고 그것을 깊이 새겨 집으로 돌아와 소나무와 바위 그리고 구름에 대한 그들의 이미지들을 한데 결합하여 다시 화면에 재현하려고 했다. 그들의 영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붓과 먹으로 단숨에 그려낼 수 있는 능란한 필치를 얻는 것이 중국 대가들의 야심이었다. 자연에서 몇 개의 단순한 주제를 선정해서 그것을 절도 있게 전개시키는 중국 미술의 방법은 경탄할만한 것이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유형이 공식으로 정해지고 전통에 의해 고정되어 미술가들은 점점 더 자신의 영감에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중국의 화론을 따른 일본도 비슷했으나 18세기에 들어와 일본미술가들은 서양미술을 접하고 새로운 주제에 전통적인 동양화 방식을 응용하기 시작했다.
혼돈기의 서양미술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유럽
로마제국이 붕괴된 이후의 시대는 민족의 대이동과 전쟁 그리고 봉기로 점철된 시기였다. 이 시대는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유럽의 국가들이 형태를 갖추기 이전의 혼란스러운 시기로 암흑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는 어떤 분명하고 통일적인 양식이 생겨나지 않았으며 수많은 양식들이 갈등을 일으켜 혼돈된 상태로 이 시기가 끝날 무렵에야 그러한 갈등이 마무리 지어졌다. 켈트족인 아일랜드와 색슨 족의 잉글랜드 수도사와 선교사들은 북방민족 장인들의 전통을 기독교 미술에 응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그 지방의 장인들이 사용했던 목조 건물을 모방해서 교회와 첨탑들을 돌로 건축했다. 그들이 이룩한 가장 성공적인 업적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진 필사본들이었다. 미술가들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필사본 삽화에 그려놓은 인물상을 보면 놀랍다. 이 미술가들은 그들의 전통으로부터 훈련받은 눈과 손으로 서유럽 미술에 새로운 요소를 가미시켜 필사본위에 아름다운 문양을 그릴 수 있었다. 이집트 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것을 그렸고,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본’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 미술사들은 그들이 ‘느낀’것을 그림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들은 자연을 그럴듯하게 닮게 그리거나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형제들에게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원했다. 하지만 중세 미술이 전적으로 종교적 이념에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 것은 아니다. 중세에는 봉건영주들과 귀족들 역시 미술가들을 고용했다. 우리가 중세 초기 비종교적인 작품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귀족과 영주들의 성은 파괴 당할 때가 많았던 반면 교회는 보존되어 왔기 때문이다. 중세 화가는 모사할 모델이 없었을 것이므로 마치 아이들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이렇게 간결한 수단으로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된 것만을 중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한 편의 서사시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