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시간 May 08. 2024

서양 미술사 읽기 3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위대한 각성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 그리스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는 여러 개의 작은 공동체로 이루어져 이들 사이에 경쟁과 마찰이 많았지만 어느 한 동체가 다른 공동체 위에 군림하지 못했다. 그리스 신전은 이집트와 같이 신격화된 지배자가 없었기에 건축물이 거대하지 않아, 인간에 의해 지어졌고 인간을 위해 건립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스 미술가들은 입상(立像)을 제작할 때 이집트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인들은 배워서 익힌 지식을 기초로 작업을 했지만 그리스 조각가들은 인체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고자 했다. 화가들도 그들의 뒤를 따랐지만 초기 그리스 회화는 남아있지 않아 도자기에 그린 그림을 통해 당시 회화를 짐작할 수 있다. 이집트 미술의 규칙이 깨지고 자신이 본 것에 의지하기 시작하자 화가들은 미술 역사상 최초로 발을 정면에서 본 것을 그리는 시도를 했다. 이는 고대 미술이 사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상을 바라본 각도를 참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형태와 단축법을 발견한 그리스 미술의 대혁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시대와 때를 같이 한다. 이 시기는 그리스 시민들이 신에 관한 오랜 전통과 전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편견 없이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던 때이다. 당시 미술가들은 일반 노역자들과 같이 일을 했으므로 교양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간주되지 않았지만 아테네가 노동자도 국사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된 민주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그들의 비중은 이집트나 아시리아의 장인들보다 컸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는 그리스 미술 또한 최고봉에 도달했던 때로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친 후 페리클레스 지도하에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 신전들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페리클레스는 신전 설계를 건축가 익티노스에게 위임했고 신상 제작과 신전 장식은 조각가 페이디아스에게 일임했다. 하지만 고대 세계의 유명한 조각품들은 기독교가 승리한 뒤 이교도의 신상으로 치부되어 소실되었기 때문에 페이디아스의 명성은 복제품을 통해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오늘날 미술관에 소장된 대부분의 조각품들은 여행자나 기념품 수집가들을 위해서 또는 정원이나 대중목욕탕을 장식하기 위해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복제품들이다. 그리스 미술이 생기가 없고 창백한 얼굴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통념은 바로 이 로마시대 모조품들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페이디아스의 미술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신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부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 미술가들이 옷주름을 이용하여 인체를 표현했던 방법은 그들이 얼마나 형태에 관한 지식을 중요시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규칙의 준수와 규칙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 미술이 여러 세기에 걸쳐 찬양을 받는 이유이며 미술가들이 예술의 지침과 영감을 얻기 위해 그리스 미술로 눈을 돌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스 작품들은 인물을 배치하는 데 있어서 이집트인들로부터 배운 것과 그 이전의 기하학적 패턴의 훈련을 통해 얻은 구성에 대한 지혜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시한 것은 인체의 자세나 동작을 재현할 때 새로 발견된 자유를 인물의 내적 삶을 반영하는데 이용하는 것이었다. 조각가로 훈련받은 바 있는 소크라테스는 미술가에게 감정이 육체의 움직임에 미치는 과정을 정확하게 관찰함으로써 영혼의 활동을 표현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 미술가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엇인가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름다움의 세계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그리스의 세계


자유를 향한 미술의 위대한 각성은 대체로 기원전 520년경부터 기원전 420년경 사이에 일어났다. 기원전 5세기말에 이르면서 미술가들은 여전히 장인으로 대접받았지만 자신의 실력과 숙련됨을 의식하게 되었으며 일반인도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건축에서는 여러 양식들이 동시에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아양식으로 건설되었으나 그 후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건물들은 이오니아 양식이 도입되었다. 이오니아 식 건물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세부와 더불어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아늑한 인상을 준다. 페이디아스의 신상들이 그리스 전역에 걸쳐 신의 표상으로 이름을 떨쳤다면 기원전 4세기의 신전 조각상들은 미술작품으로서의 아름다움으로 높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기원전 4세기 최대의 미술가인 프락시텔레스는 무엇보다 감미롭고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특성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리스의 조각상들은 많은 모델을 관찰하여 완벽한 인체라는 이념에 일치하지 않는 불규칙성이나 특징들을 제거함으로써 인체를 이상화하였다. 인간의 가장 완벽한 유형들을 재현한 것으로 후세 사람들이 칭찬하는 고전시대 걸작들 대부분은 기원전 4세기 중엽인 이 시기에 만들어진 복제품이나 변형물이다. 프락시텔레스 다음 세대인 기원전 4세기말에 와서 미술가들은 아름다움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얼굴의 표정을 살리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들은 개개인의 영혼의 활동을 포착하는 방법과 개인적인 인상의 특징을 포착하는 법을 배웠으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초상을 만드는 것을 터득했다. 사람들은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이르러서 이 새로운 초상화법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제국의 건설은 그리스 미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미술을 그리스 미술이 아닌 헬레니즘 미술이라고 부른다. 이 제국의 풍요한 수도에서는 그리스 본토 미술가들에게 요구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를 요구했다. 그것은 기원전 4세기 초에 고안된 것으로 코린트라는 부유한 상업도시의 이름을 따서 코린트양식이라고 불렀다. 그리스의 미술양식과 창의성은 오리엔트 왕국의 전통과 융합되었다. 헬레니즘 미술은 거칠고 격렬했으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를 원했고 보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는 미술이 오래전부터 유지해 왔던 주술적·종교적 연관성을 거의 상실해 그들의 기술 자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부자들이 미술 작품을 수집하고, 원작품을 손에 넣을 수 없으면 그 작품을 복제하게 하고 희귀한 작품에 대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했던 것이 바로 이때였다. 저술가들은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미술가들의 생애를 글로 썼으며 그들의 기이한 행동에 관한 일화를 수집하여 관광객들을 위한 안내책자를 만들었다. 고대의 유명한 거장들 중에는 조각가보다 화가가 더 많았으나 고전 시대 미술서적에서 발췌된 작품 외에는 알 수 없다. 우리가 고대 회화의 성격에 관해 약간의 개념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폼페이를 비롯한 기타 장소에서 발굴된 장식적인 벽화와 모자이크를 보는 길밖에 없다. 회화에 포함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은 폼페이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페이디아스나 프락시텔레스 시대의 그리스 미술에서는 인간이 미술가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었다. 헬레니즘 시대 미술가들은 복잡한 도시 거주자를 위해 전원의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그리스 인들은 초기 오리엔트 미술의 엄격한 제약을 타파하고 관찰을 통해 점점 더 많은 특성을 발견하는 항해를 계속해왔지만 그들의 작품은 언제나 그것들을 만들어냈던 지성의 각인(刻印)을 지니고 있었다.


세계의 정복자들

기원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로마, 불교, 유대교 및 기독교 미술


로마에서 작업했던 대부분의 미술가는 그리스 인들이었으나 로마가 제국을 건설하면서 미술 또한 변화를 겪었다. 로마 건축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토목공학이고 로마 건축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콜로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콜로세움을 세운 로마의 건축가는 그리스 신전에 사용되었던 세 가지 건축 양식(도리아 식, 이오니아 식, 코린트 양식)을 전부 응용했다. 그러나 로마 건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아치의 사용이다. 아치를 쌓아 올리는 일은 토목공학이 이루어낸 대단히 어려운 업적 중 하나이다. 이러한 건물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것은 판테온이다. 판테온은 아직까지 예배의 장소로 남아있는 고전시대의 유일한 신전이다. 그리스 건축으로부터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가져다 그것을 자신의 필요에 맞게 응용하는 것이 로마인의 특징이었다. 로마의 미술가들은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실물 같은 초상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로마 인들이 미술가들에게 제시한 또 하나의 과제는 고대 오리엔트에서 배운 관습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전쟁의 무훈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세부의 정확한 묘사와 자세한 설명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미술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로마인들은 대단히 현실적인 사람들로 공상적인 것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종교적인 필요에 새로운 미술의 방법을 응용했던 사람들은 인도의 미술가들로 그들은 로마식 방법을 채택해서 붓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했다.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종교적인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 또 하나의 종교는 유대교였다. 유대교의 율법은 우상 숭배를 경계하여 형상의 제작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부 도시 유대 식민지에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로 회당의 벽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유대교의 회당에서 나온 벽화가 흥미를 주는 까닭은 기독교가 동방에서부터 전파되고 미술을 종교적인 목적에 봉사하게 만들었을 때 이와 유사한 사고방식들이 미술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미술가들이 그들의 구세주와 사도들을 그림으로 그리라는 요청을 처음 받았을 때 그들을 도와준 것은 그리스 미술의 전통이었다. 기독교 미술가들이 그린 그림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을 증명해 주는 예 중의 하나였다. 그러한 관심의 추이는 단지 로마 제국의 쇠퇴와 붕괴 시기의 종교적 작품에서만 탐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 이 무렵에 고대 미술이 쇠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지 뒤떨어졌다는 것만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의 단순한 묘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효과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고대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기독교의 대두를 눈으로 보았고 마침내 그것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작가의 이전글 서양 미술사 읽기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