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 읽기 6
15세기 초에서 16세기 초까지
현실성의 정복
15세기 초
르네상스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하는데, 재생이라는 관념이 이탈리아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조토 시대 이후의 일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탈리아가 문명의 중심이었으나 고트족과 반달족 같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인해 로마제국이 붕괴되어 권세와 영광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부흥이라는 개념은 ‘위대했던 로마’의 재생이라는 생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토는 그들에게 미술의 진정한 부활을 유도해 낸 것으로 칭송되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트 족 때문에 로마제국이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므로 이 중간시기 미술을 고딕(Gothic) 미술이라 부르고 ‘야만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하지만 고트족의 로마침입과 고딕양식은 대략 700년의 차이가 있고, 미술의 부활이 고딕시대에 급속도로 이루어졌으므로 이탈리아 사람들의 생각은 그다지 근거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중세시대, 이탈리아는 다른 지역보다 낙후되었기 때문에 조토의 작품이 혁신적이고 고귀하며 모든 것의 부활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자신감과 희망이 강하게 나타난 곳은 단테와 조토의 출생지이며 부유한 상업도시인 피렌체였다. 15세기 초 피렌체 미술가들은 과거의 미술개념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자 하였다.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는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였다. 그는 당시 피렌체 대성당 건축을 맡고 있었는데, 그의 목표는 로마의 영광이 부활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시안을 채택하면서도 앞선 시대의 양식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건축방법을 창조하고자 하였다. 브루넬레스키는 그러한 자신의 계획을 성공시켰고 그 뒤로 500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의 건축가들은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브루넬레스키는 미술의 영역에서 획기적이었던 원근법을 수학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이러한 수학적인 원근법에 근거해서 그려진 최초의 그림 중 하나는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성모, 성 요한과 헌납자들>이다. 마사초는 28세가 되기 전에 죽었으나 당시 회화에 있어서 혁명을 이룩했다.
브루넬레스키 일파 중 가장 위대한 조각가는 피렌체의 도나텔로(Donatello)였다. 도나텔로는 <성 게오르기우스>상을 통해 조각예술의 전체적인 접근 방법에 있어서 새로운 착상을 보여주었다. 15세기 초 피렌체의 거장들은 그들이 찬미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작업실이나 공방에서 인체에 관한 탐구를 시작했다. 도나텔로 작품의 사실적인 표현은 이러한 새로운 방법과 관심의 결과였다. 브루넬레스키와 그 주변 미술가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미술의 부활을 위해 자연과 고대의 유물로 관심을 돌렸고, 원근법의 새로운 기술은 그들의 환상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북유럽에서 혁명적인 창의성으로 사실성을 정복한 사람은 화가 얀 반 에이크였다. 그는 이상화한 인물을 표현하는 그리스와 로마 미술의 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던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대가들과 달리 정직하고 충실하게 모델을 묘사했다. 피렌체의 브루넬레스키와 그 주변의 거장들이 자연을 그림으로 재현하기 위해 과학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묘사하는 방법을 개발한 데 반해 반 에이크는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대상의 세세한 부분을 충실하게 묘사하기 위해 회화 기법을 개량해야만 했다. 비록 지금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유화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달걀을 용매로 사용했던 템페라기법이 부드러운 변화를 나타내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겼기에 달걀 대신 기름을 사용하여 보다 더 정확하게 그림을 제작했다. 이러한 반 에이크의 예술은 현실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있어서 거의 완전한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과 혁신
15세기 후반: 이탈리아
15세기 초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미술가의 새로운 발견은 유럽 전역에 파문을 일으켜 미술이 성경의 내용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현실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15세기 정신은 중세와 단절을 의미했다. 약 1400년까지는 유럽 각지의 미술이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해 갔으나 중세 말기에 이르러 시민과 상인들로 구성된 도시가 발전하게 되면서 미술가들은 다른 직공이나 장인들처럼 길드를 조직했다. 미술가들이 길드에 가입하려면 하나의 기술을 완전하게 익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했다. 당시 길드는 시의 행정에 발언권을 가진 부유한 집단으로 도시를 번창하게 만들고 도시를 미화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들은 예술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반면 일자리를 얻거나 정착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사정이 미술사에 영향을 미쳐 국제적이었던 고딕 양식을 끝으로 15세기에는 미술이 각기 다른 여러 유파들로 분열되어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 등의 도시나 마을에 나름의 ‘회화 유파’가 생겼다. 여기서 유파란 그 당시에는 미술학교가 없어서 화가가 되려면 거장 밑에서 견습생으로 들어가 오랜 시간 기술을 익혀나가야 했는데 이것이 ‘회화의 유파’들이었다. 새로운 업적과 전통의 조화에 성공한 피렌체의 거장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는 도나텔로와 로렌초 기베르티를 들 수 있다. 도나텔로의 작품은 거의 모든 것이 새롭다고 말할 수 있지만 기베르티의 작품은 새로운 것이 많지 않아 보인다. 기베르티가 당대의 새로운 발견을 이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고딕미술의 이념에 충실했던 것처럼 안젤리코도 종교 미술의 전통적 이념을 표현하기 위해 마사초의 새로운 방법들을 응용했다. 이러한 방법은 피렌체의 또 다른 화가 파올로 우첼로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북유럽의 반 에이크가 관찰을 통해 사물을 표사했다면 우첼로는 원근법에 의해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 <산 로마노의 대승>을 보면 그가 얼마나 원근법에 심취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피렌체 남쪽과 북쪽의 도시에 사는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 또한 원근법을 열심히 발전시켰다. 만테냐는 인물상이 단단한 형체로 서있으면서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원근법을 사용했다. 이 시기 또 다른 화가 피에로 델리 프란체스카는 피렌체의 남쪽 도시에서 이와 동일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피에로는 원근법에 완전히 숙달했으며 이런 기하학적 방법 이외에도 그와 동일하게 중요한 기법인 빛의 처리도 더하고 있었다. 빛은 인물들의 형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원근법과 대등하게 중요하다. 그 당시 미술가들이 피렌체 거장들의 새로운 발견을 이용하고 있는 동안 피렌체 미술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창안들에 의해 야기된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미술이란 과학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산드로 보티첼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15세기 후반 피렌체 미술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기독교가 아닌 고전시대의 신화 <비너스의 탄생>을 묘사한 그림이다. 고전기의 신화는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르네상스’ 시대에 교육을 받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과학적인 방식으로 정확하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우아한 운동감이나 선율적인 선들은 너무나 아름답다. 보티첼리에게 <비너스 탄생>을 주문했던 부유한 상인,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고용주이기도 하다.
전통과 혁신
15세기: 북유럽
15세기, 북유럽의 미술가와 이탈리아 미술가의 목적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이는 분야는 건축이었다. 피렌체의 건축물은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고딕 양식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북유럽 국가들은 15세기 내내 고딕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비록 고딕 건축의 전형적인 요소를 간직하고는 있었지만 시대적인 취향은 크게 바뀌고 있었다. 15세기에는 14세기에 창이나 그 밖의 개구부를 꾸미는 데 쓰인 장식창살인 트레이서리를 풍부하고 복잡하며 환상적으로 장식하는 취향이 더욱 강해졌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회화와 조각의 발전은 이러한 건축의 발전과 어느 정도까지는 나란히 나아갔다. 15세기 중엽 독일 화가 슈테판 로흐너는 북유럽의 안젤리코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작품을 보면 반 에이크의 새로운 방법들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면서도 고딕양식에 가깝다. 그러나 이탈리아 미술과 북유럽 미술이 완전히 분리되어 발전하지는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선진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인 장 푸케는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를 방문했고 로마에 가서 교황을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북유럽의 화가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은 얀 반 에이크가 작업했던 남네덜란드에서 큰 명성을 누리며 살았다는 것 이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작품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보면 고딕 미술의 주요 개념들을 새로운 사실적인 양식으로 번안함으로써 북유럽 미술에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15세기 후반 플랑드르의 화가 중 한 사람인 반 데르 후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반 데르 후스의 업적은 <성모의 임종>과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현관 위의 조각을 보면 알 수 있다.
15세기 중엽, 독일에서는 미술뿐 아니라 인쇄술의 발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목판화술이 발명되었다. 이후 구텐베르크가 목판화 대신 금속활자를 발명해 내자 목판인쇄본은 쓸모없게 되었다. 15세기 가장 유명한 동판화가는 마르틴 숀가우어였다. 그의 동판화 <거룩한 밤>을 보면 뷰린을 가지고 사물의 재질과 표면을 섬세하게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목판술과 동판술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판화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서로 다른 유파들의 미술개념을 배울 수 있게 해 준 또 하나의 새로운 수단이 되었으며 북유럽의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여러 가지 원동력 중 하나였으며 미술의 위기를 초래하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였다.
조화의 달성
16세기 초: 토스카나와 로마
16세기 초는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코레조와 조르조네, 북유럽의 뒤러와 홀바인 등 가장 위대한 거장들이 탄생한 시기이다. 그들이 어떻게 모두 같은 시대에 태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은 어떤 조건들이 이렇게 많은 거장들을 일시에 개화시킬 수 있었는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조토의 시대 이후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훌륭한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예술가를 확보하려는 경쟁은 미술가들에게 자극이 되었다. 그래서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원근법을 연구하기 위해 수학에 관심을 갖고 인체구조를 탐구하기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갖는 등의 새로운 발견으로 시야를 넓혀나갔다. 그들은 단순히 주문에 의해 움직이는 장인이 아닌 독립적인 거장이 되어 그 당시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에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술가의 사회적인 지위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수준이었다. 미술가들이 이러한 편견을 타파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후원자들의 명성에 대한 집착으로, 그들은 자신의 지위에 어울리는 기념물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유명한 거장들을 유치하려고 경쟁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군주가 미술가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면 이제는 미술가가 주문을 수락함으로써 후원자들에게 호의를 베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건축분야에서 제일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당시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건물의 쓰임새와 상관없이 비례를 고려한 아름다운 내부의 공간성 및 그 조화 자체가 만들어내는 장대함만을 위해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뜻을 가진 건축가들 중 한 사람은 도나토 브라만테였다. 그는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과 판테온신전의 효과를 결합시켜 전대미문의 작품을 만들어내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 건물이 너무 많은 돈을 필요로 했기에 충분한 기금을 모으려 애쓰다가 종교 개혁을 유발시킬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그래서 브라만테에게 맡겨진 성 베드로 대성당은 거의 원래 계획과 일치되지 못했다.
피렌체 미술가들은 확립된 전통 속에서 성장했는데 이러한 거장들 뒤에는 그 기술의 대부분을 습득할 수 있게 해 준 군소 대가들의 공방이 있었다. 이들 주에서 가장 유명하고 나이가 많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토스카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화가이자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가 경영하는 공방에서 도제수업을 받았다. 베로키오의 명성은 당시 대단했다. 다양한 걸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레오나르도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미술가의 임무는 더 철저하게, 그리고 더 열정적으로, 더 정확하게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는 자기가 읽은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언제나 그것을 실험으로 해결하였다. 그의 동시대인들은 레오나르도를 이상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면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미술을 과학적인 토대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가 사랑하는 회화 예술을 존경받는 작업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는 작품의 완성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완벽한 성격 탓으로 그의 작품 중에 완성된 것이 별로 없다. 자연의 위대한 관찰자인 레오나르도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미술가들에게 새롭고 미묘한 문제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레오나르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푸마토’라는 기법을 창안했다.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무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스푸마토 기법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어 무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는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가르친다. 우리는 <모나리자>를 통해 그 신비스러운 효과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자연의 충실한 노예가 아니라 형상을 보존함으로써 자신이 묘사한 사람의 영혼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붓으로 색채에 불어넣는 마법의 주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6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빛나게 한, 두 번째 피렌체 미술가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였다. 그는 레오나르도보다 23살 아래였다. 미켈란젤로는 13살 때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들어가 3년간 도제생활을 했다. 기를란다요는 당시의 화려한 생활을 흥미롭게 반영하여 표현할 줄 아는 작가였다. 소년 미켈란젤로는 그의 공방에 안주하지 않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 작품들을 연구하기 위해 공방을 나왔다. 그는 시체를 해부하고 모델을 보며 직접 소묘하였고, 인체의 비밀을 모두 알 때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30살이 될 무렵 그는 레오나르도와 필적할 수 있는 당대 가장 뛰어난 거장의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바티칸에 시스티나 채플이라는 작은 예배당에는 보티첼리, 기를란다요와 같은 가장 유명한 거장들의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 궁륭형 천장에는 그림이 없어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그 천장에 그림을 그릴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 주문이 적들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은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라고 변명하기도 했으나 결국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혼자 4년의 시간 동안 지내며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미켈란젤로가 이 예배당 안의 받침대 위에서 이룩한 결과는 어떻게 한 개인이 이러한 장면들을 그려낼 수 있을지 상상하기 힘든 작업이었다. 우리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통해 그가 모든 세부를 얼마나 세심하게 연구했으며 소묘를 통해 각 인물상들을 얼마나 주의 깊게 준비했는지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1512년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완성하지 마자 곧 율리우스 2세의 영묘 건립을 위해 대리석 조각에 착수했다. 미켈란젤로는 그가 작업을 하고 있는 대리석 속에 인물들이 숨어있으므로 조각가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들을 덮고 있는 돌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미켈란젤로가 율리우스 2세의 작품을 완성시킨 뒤, 그는 어떤 미술가도 누려보지 못했던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그는 점점 더 깊숙한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을 의심하고 고통받고 있었다. 그는 작가로서의 독립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자신이 말년에 맡았던 브라만테가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지붕을 씌우는 일을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봉사를 이윤으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보수를 거절했다.
1504년 피렌체에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가 경쟁하고 있을 때 한 젊은 화가, 라파엘로 산티가 피렌체로 왔다. 그는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다. 페루지노는 감미롭고 경건한 화풍의 제단화를 통해 인기를 얻고 있는 화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장하면서 스승의 화풍을 익히고 흡수한 젊은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 같은 정렬도, 레오나르도와 같은 광범위한 지식도 없었지만 성격이 부드러워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의 마음에 들 수 있었고, 그래서 선배 거장들의 대열에 오를 때까지 쉬지 않고 작업할 수 있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미로운 성모상을 그리는 화가로 인식되어 있었고, 사람들에게 성모상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에 그림으로 평가받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의 성모 그림은 긴장감이나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체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라파엘로는 수년간 피렌체에 머문 뒤 로마로 갔다. 교황은 라파엘로에게 바티칸 궁의 스탄차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방의 벽면을 장식하는 일을 맡겼다. 라파엘로는 이 방의 벽과 천장에 완전한 디자인과 균형 잡힌 구성의 탁월한 솜씨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당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사람들이 경탄하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린 인물들의 완전한 아름다움이다. 그가 <요정 갈라테아>를 완성했을 때 어떤 귀족이 라파엘로에게 그렇게 아름다운 모델을 어디서 찾아냈느냐고 묻자 그는 어떤 특정한 모델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있는 ‘어떤 생각’을 따랐을 뿐이라고 답했다. 라파엘로는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어느 정도 포기했던 것이다. 프락시텔레스 시대에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도식화된 형태에서 자연과 비슷하게 생겨났다면 이제 그 과정이 반전되어 미술가들은 고전 시대의 조각 작품을 보고 자신의 머릿속에서 형성된 아름다움의 이념에 따라 자연을 수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이제 그림의 대상을 ‘이상화’ 한 것이다. 라파엘로의 그림을 살펴보면 생명력과 성실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대상을 이상화시킬 수 있었다. 라파엘로의 명성이 수세기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업적 때문이다. 라파엘로가 활발하게 작업하던 시기는 루터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기금 모금 방법에 대해 교황을 공격하던 시기로 세상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는 사교적인 성품 덕분에 교황청의 학자들과 고관대작들은 그를 친구로 삼았다. 그는 37세에 사망했는데 그를 추기경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그는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다양한 예술적인 업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