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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시간 Jun 14. 2024

서양 미술사 읽기 8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권력과 영광의 예술Ⅰ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이탈리아


17세기 전반, 이탈리아에서는 건물과 장식에 대한 구상들이 축적되어 17세기 중엽에는 바로크 양식이 완성을 이룬다.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설계한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교회를 보면 르네상스 형태를 채용하면서도 일찍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장식적이고 과장적인 설계와 장식이 세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신교가 교회의 외면적인 치장에 반대하면 할수록 로마 교회는 더욱 열렬히 미술가의 힘을 빌리려고 하였다. 이렇듯 현란한 미술은 주로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 의해 발전되었다. 베르니니는 당시 최고의 초상화가로 렘브란트가 인간의 행동에 관한 그의 심오한 지식을 이용했듯이 얼굴 표정의 묘사를 활용하여 그의 종교적인 체험에 시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모든 구속을 떨쳐버리고 미술가들이 그때까지 기피했던 감정의 극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의 작품 <성 테레사의 환희>를 보면 그때까지 미술의 영역에서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격렬한 얼굴 표정을 볼 수 있다.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와 같은 조각 작품이 놓인 장소까지 포함해서 고려해야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바로크 교회의 벽면 회화장식도 그러했다. 베르니니를 추종하는 화가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가 그린 로마의 한 예수회 교회의 천장그림을 보면 당시 미술가는 우리를 혼란시키고 압도해서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환상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들고 있으며 이와 같은 그림이 놓여있는 장소를 벗어나면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세기 대부분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실내 장식가이자 대형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기술로 유럽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거장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베네치아 출신의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인데 그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독일과 스페인에서도 활약했다. 18세기 이탈리아 미술의 특징은 풍경을 묘사한 유화와 동판화에서 새로운 이념들을 창조해 냈다. 과거 이탈리아의 위대한 영광을 감탄하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온 여행객들은 기념품을 원했고, 경치가 매혹적이었던 베네치아에서는 이러한 수요를 만족시켜 주는 유파가 생겨났을 정도였다. 이렇듯 움직임과 대담한 효과를 좋아하는 바로크 정신은 단순한 도시 풍경 속에서 여실히 나타났고 후기 이탈리아 미술의 결실에 살아 있는 바로크 양식의 전통은 후대에 가서 새로운 중요성을 갖게 된다.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Ⅱ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로마를 비롯한 17세기 유럽의 왕과 영주들은 예술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고자 했으며 자신의 권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특히 17세기말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베르사유 궁전은 그의 절대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베르사유가 바로크 양식인 것은 세부장식 때문이라기보다 거대한 규모 때문이었다. 1700년을 전후한 시대는 건축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시대였으며 그것은 비단 건축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성과 교회는 단순히 건물로서만 설계된 것이 아니라 모든 환상적이고 인위적인 세계의 효과를 높이는 데 기여해야만 했다. 소도시 전체가 마치 무대 장치처럼 이용되었으며 넓은 시골 들판은 정원으로 시냇물은 폭포로 변형되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바로크 이념들이 가장 대담하고 일관성 있게 융합된 지역은 특히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그리고 남부 독일이었다.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알프스 북쪽에서도 미술의 각 분야가 현란한 장식에 휩쓸렸으며 각 분야의 독자적인 중요성을 많이 상실했다. 17세기 전반, 위대한 거장들과 비견되는 거장은 앙투안 바토이다. 그는 궁정 사회에서 벌어지는 축제와 유흥에 적합한 배경을 고려하여 왕과 귀족들의 성의 실내 장식을 디자인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아 복잡한 현실과 자질구레한 일에서 동떨어진 자기 자신의 환상적인 생활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로코코라고 알려진 18세기 초 프랑스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양식이 되었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바토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환상 속에는 어딘지 슬픈 분위기가 감도는데 그것이 바토의 예술을 단순한 기교와 아름다움의 영역을 초월하게 만든다. 바토는 폐병으로 37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아마도 그를 찬미하고 모방했던 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었던 그의 강렬함을 그의 예술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짧은 생애를 통해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의식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의 시대

18세기: 영국과 프랑스


17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바로크 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신교 국가들은 위세를 떨치던 바로크 양식에 무관심할 수 없었지만 실제로 채용하지는 않았다. 교회가 그랬듯이 성(城)도 동일한 경향을 따랐으며 교외의 저택을 설계한 건축가들 또한 바로크 양식의 호사스러움을 배격했다. 그들의 야심은 고전 건축의 실제적인 법칙을 가능한 충실하게 따르려 하였다. 영국인이 생각하는 정원이나 공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반영하고 화가의 눈을 매혹시키는 아름다운 풍경을 모아놓는 것이었다. 벌링턴 시대 상류 사회 신사들은 청교도적인 이유를 내세워 그림이나 조각을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지 못한 자국의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책의 삽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했던 영국의 한 젊은 판화가, 윌리엄 호가스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도 훌륭한 작가로서의 자질이 있지만 자신을 이해해 주는 대중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의도적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끌고, 청교도적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예술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가스는 그림을 통해 교훈을 주고 설교를 했던 중세미술의 전통이 담긴 이탈리아 미술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그것을 활용한 그의 그림은 그에게 명성과 자본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그림보다 판화로 만든 복제품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한세대가 지나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 경이라는 18세기 상류 사회를 만족시킬 수 있는 화가가 탄생했다. 레이놀즈는 미술가들의 유일한 희망이란 과거 거장들의 장점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모방하는 것이라는 카라치의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레이놀즈는 거창하고 감동적인 것만이 위대한 예술로 불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지식인이었고 돈과 권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들과 동등하게 환영받았다. 그는 상류 사회가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미술은 초상화라는 사실을 인정했고 초상화가들 중 누구 못지않게 모델을 돋보이게 미화시킬 수 있었다. 그와는 상반적인 성향의 토머스 게인즈버러는 미술에 있어서 거의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라파엘로의 방법을 부활시키려 했던 카라치와 자연 이외는 어떤 스승도 인정하지 않았던 카라바조를 연상시킨다. 게인즈버러는 레이놀즈와 같이 지성적인 체하기보다 솔직하고 틀에 박히지 않은 초상화를 그리기를 원했다. 하지만 거의 두 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대가는 그렇게 달리 보이지 않는다. 18세기 영국에서는 미술이 신처럼 군림한 통치자들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것에 가장 충실했던 화가는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이었다. 그는 서민 생활의 평온한 광경을 좋아했다.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보다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을 화폭에 담는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영국에서처럼 프랑스에도 권력의 겉치레보다 서민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초상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영국에서 게인즈버러의 스케치에 영감을 주었던 자연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측면에 대한 취향은 18세기 프랑스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 미국 및 프랑스


18세기 중반까지, 미술 양식이 바뀌고 미술가들이 서로 다른 관심을 가졌다 해도 미술의 목적이란 원하고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미술가들 간에 ‘미’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18세기말 프랑스 대혁명을 기점으로 이러한 공통된 기반이 점점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혁명은 이성의 시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미술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첫 번째 변화는 이른바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였다. 전에는 한 시대의 양식이란 그저 어떤 일이 행해지는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바람직한 효과를 얻는데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채택할 뿐이었다. 이성의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양식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이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다. 최상의 노련한 감식가들 중에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그리스 복고가 일어났고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 적용하는 그들의 건축개념의 힘과 영향력은 전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던 이성 옹호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에서도 대혁명이 일어난 후에 이 양식의 승리가 확고해졌다. 전통의 사슬이 단절되었다는 사실은 커다란 의의를 지닌 것으로 그림이 도제식으로 전승되는 직업이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가르쳐야 하는 하나의 과목이 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자기들의 업적이 학자와 맞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아카데미라 불렀는데 아카데미가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기능을 맡게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8세기 아카데미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는데 이것은 왕 스스로 미술에 관심이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미술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미술을 가르치는 것보다 구매자들이 많아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아카데미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그 후 런던에서도 회원들의 작품을 매년 전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러한 연례 전시회들은 상류 사교계에 화젯거리를 제공해 주는 사회적 행사였으며, 미술가들에게 명성을 가져다주기도 빼앗아가기도 했다. 미술가들은 이제 전시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위기가 불러일으킨 영향은 미술가들이 도처에서 새로운 주제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프랑스 대혁명 시대에 매우 급속히 변해갔다. 갑자기 미술가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사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에 호소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그들의 주제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당시 화가들은 모두 전통적인 주제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미술이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이탈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왔던 미술가들, 즉 영국에서 활약했던 미국의 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프랑스 대혁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영웅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등장시켰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새로 태어난 그리스와 로마시민으로 자처하기를 좋아했으며, 그들의 그림은 건축 못지않게 로마 풍의 장려함이라 불리는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는 자크 루이 다비드였다. 그는 혁명 정부가 내세우는 ‘공식  화가’였으며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에 대한 연구로 신체 묘사와 아름다운 외관을 그리는 것을 익혔다. 다비드 세대의 미술가들 중에는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있었다. 고야의 현란한 기술은 티치아노나 벨라스케스를 연상시키지만 그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초상화를 통해 권력에 아첨하기보다 허영과 추악함, 탐욕과 공허함을 낱낱이 드러냈다. 자기 후원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던 궁정화가는 전무후무하다고 볼 수 있다. 고야는 애쿼틴트라는 기법으로 판화를 제작했는데 고야의 판화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어떤 주제이든 이미 알려진 주제는 일절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술가들은 전통의 단절로 지금까지 시인들만이 누렸던 개인적 환상의 세계를 종이 위에 펼치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었다. 미술에 대한 새로운 접근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예는 영국의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윌리엄 블레이크였다. 그는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에 사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카데미 미술을 경멸했고 사람들은 그를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보거나 순진한 기인으로 보았다. 극소수의 사람들이라도 그의 미술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굶어 죽지는 않았다. 블레이크는 환상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현실 세계를 그리길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눈에만 의존했다. 블레이크는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 전통의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로 볼 수 있다.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자유를 얻게 된 화가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때까지 풍경화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 왔으나 18세기 말엽 낭만주의를 통해 풍경화가 새로운 권위로 끌어올려졌다. 이 당시 풍경화가는 터너와 컨스터블로 이 두 명의 영국 풍경화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림에 접근했다. 터너는 레이놀즈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문제에 사로잡혀있어서 클로드 로랭의 유명한 풍경화를 능가하지는 못해도 같은 수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일생의 야심이었다. 그는 자기 그림을 보다 눈에 띄고 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림 속에 모든 효과를 잔뜩 동원했다. 하지만 컨스터블의 생각은 터너와는 매우 달랐다. 터너가 능가하기를 원했던 전통이 그에게는 단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과거의 거장들을 존경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그리려 했다. 컨스터블은 모든 틀에 박힌 수법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그는 대담한 혁신으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눈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자연을 스케치하기 위해 야외로 나갔으며 화실에 돌아와서는 그것을 공들여 다듬었다. 전통과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터너나 컨스터블의 작품에서 구체화된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붓과 물감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감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할 수 있었고 자기 앞에 놓인 소재들을 성실하게 묘사하며 끈질기고 정직하게 그것을 탐구할 수 있었다. 유럽의 낭만주의 화가 가운데 터너와 동시대 사람인 독일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그의 풍경화 또한 당시의 낭만적 서정시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끝없는 변혁

19세기


프랑스 대혁명 시기를 특징짓는 ‘전통의 단절’은 당시 미술가들의 생활과 작품 활동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아카데미와 전시회, 비평가들과 감식가들은 ‘예술(art)’과 단순한 ‘기술’ 간의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기계 생산이 수공업을 대신해 소규모 작업장이 큰 공장으로 바뀌어갔다. 이러한 변화는 건축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도시들이 급속도로 팽창하여 ‘건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변화하던 시기로 우후죽순같이 생겨나는 건물들은 나름의 양식을 지니지 못했다. 19세기 몇몇 건축가들은 고대 양식도 아니고 창작도 아닌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세운 건물들은 그 도시의 얼굴이 되었고, 주변 환경과 잘 조화되어 마치 자연 풍경의 일부처럼 보였다. 런던의 국회 의사당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회회나 조각에 있어서 ‘전통의 단절’은 다양한 소재와 방식이 화가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고, 화가의 선택권이 확대되면 될수록 화가 자신의 취향과 대중 취향의 간극이 점차 벌어졌다. 19세기 미술가들은 관례를 따르고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는 부류와 스스로 선택한 고립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류로 크게 나뉘었고, 이 둘 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져갔다. 하지만 점차 화가들의 선택의 폭이 확장되고 후원자의 변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서 사상 처음으로 미술은 개성 표현의 완벽한 수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소위 관전파 화가들과 같이 성공한 화가들과 죽은 뒤 진가를 인정받은 화가들의 구별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미술(art)’라는 말은 새로운 의미를 지지게 되었으며 19세기 미술사는 성공하고 돈을 잘 번 거장들의 역사가 아니라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탐구하여 기존의 인습을 비판적으로 대담하게 검토하고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창조해 낸 외로운 미술가들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미술 전개의 극적인 사건들은 파리에서 일어났다. 유럽 미술의 중심지가 15세기 피렌체, 17세기 로마를 거쳐 19세기에는 파리로 이동했다. 19세기 전반기 보수파 화가들의 지도자는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였다. 그는 다비드의 제자이자 추종자로 다비드처럼 고전기 영웅 미술을 숭배했다. 앵그르의 반대자들은 외제 들라크루아를 중심으로 모였다. 들라크루아는 혁명가 중 한 사람으로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지닌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로마 시대 조상(彫像)의 모사를 거부했고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못 견뎌했다. 그는 회화에 있어서 소묘보다 색채가, 지식보다 상상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아카데미가 화가들에게 요구하는 진부한 주제에 싫증 나서 1832년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아랍 세계의 눈부신 색채와 낭만적인 풍속을 연구했다. 들라크루아는 루벤스와 컨스터블을 찬양했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찬양한 미술가는 그와 동시대 풍경화가인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였다. 코로는 다른 풍경화가들과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색채를 통해 그림 속의 눈부신 빛과 아른거리는 안개를 포착하는 듯 보였다. 그는 시적인 성향으로 고전이나 성경의 주제에서 따온 인물들을 화면 속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코로의 젊은 동료들은 그의 조용한 화법을 찬미하기는 했으나 그를 추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당시 아카데미의 고상한 그림에는 반드시 고상한 인물을 그려야 하며 노동자나 농민은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풍속화에나 적합하나 주제라고 믿고 있었다. 1848년 2월 혁명 시기에 일군의 화가들이 프랑스의 바르비종이라는 마을에 모여 컨스터블의 지도 아래 새로운 시각으로 자연을 관찰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장 프랑수아 밀레이다. 그는 풍경화의 관점을 인물화로 확장하여 농부들의 진솔한 생활 모습과 그들이 들에서 일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운동에 명칭을 부여한 화가는 귀스타브 쿠르베였다. 그는 1855년 파리의 한 낡은 건물에서 개인전을 열고 이것을 ‘사실주의 쿠르베 전’이라 불렀다. 그의 ‘사실주의’는 미술에 있어서 혁명을 뜻하는 것으로 쿠르베는 오직 자연의 제자이기를 원했으며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을 그리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당시의 인습에 대한 항의가 되길 원했고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이 자만에서 벗어나길 바랐고 상투적이고 능란한 조작에 반기를 들어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순수함을 선언하려 하였는데 실제로 그의 그림은 그러했다. 

영국 화가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고 그들의 미술에 대한 고민은 전혀 다른 길을 걷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라파엘로에 이르러 미술이 불순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술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기에 스스로를 ‘라파엘 전파’라 불렀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이탈리아 망명자의 아들로, 이들 중 가장 뛰어난 화가로 꼽혔다. 하지만 순수해지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너무나 자기모순적이어서 성공하기 힘들었다. 결과적으로는 인습에 구애받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려고 했던 동시대 프랑스 화가들의 의도가 훨씬 더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프랑스에서는 들라크루아에 의한 첫 번째 혁명과 쿠르베에 의한 두 번째 파동을 거쳐 에두아르 마네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 세 번째 혁명의 물결이 일어났다. 그들은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전통 미술의 모든 주장이 그릇된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즉 전통미술에서 사용하는 표현 방법은 기껏해야 인공적인 조건하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눈을 믿는다면 그리고 사물은 반드시 이렇게 보아야 한다는 아카데미의 규칙을 탈피한다면 우리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처음에는 과장된 이설(異說)로 간주되었지만 마네와 그의 추종자들이 일으킨 채색에 있어서의 혁명은 그리스 인들이 했던 형태 표현에서의 혁명에 비견할 수 있었다. 그들의 발견은 우리가 옥외에서 자연을 볼 때 각 대상들이 그들 고유한 색깔을 가진 개별 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서 뒤섞여 훨씬 더 밝은 색조의 혼합물로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발견들은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아니지만 마네의 작품은 보수적인 미술가들 사이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는 전통적인 부드러운 명암법을 포기하고 거친 대조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1863년 아카데미 파 화가들은 ‘살롱’이라 불리는 관전에 마네의 작품을 입선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그 후 소란이 일자 당국은 낙선 작품들을 모아 ‘낙선전’이라는 특별전시회를 열었고 대중들은 판정을 거부했던 화가들을 비웃으러 전시회에 왔다. 당시 비평가들 사이의 논쟁은 격렬했다. 마네는 라파엘 전파 화가들이 거부했던 색채의 대가의 위태한 전통, 즉 베네치아 화가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에 의해 파생되고 스페인의 벨라스케스가 성공적으로 계승하여 19세기 고야에까지 이르는 위대한 전통 속에서 충실히 영감을 찾아내었다. 마네는 우리로 하여금 그가 제시한 혼란 속에서 드러나는 알아보기 힘든 형태들을 어렴풋이 암시만 해줌으로써 빛과 속도와 운동감의 인상들을 포착하길 원했다. 마네와 손을 잡고 이러한 생각들을 발전시키는 데 협력한 화가들 중에는 클로드 모네가 있었다. 모네는 친구들을 종용해서 스튜디오를 나왔고, ‘소재(素材)’앞에서가 아니면 결코 붓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회화는 반드시 ‘바로 그 현장’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모네의 생각은 필연적으로 기법상 새로운 방법들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을 묘사하기 위한 여유가 없었기에 화면 전체의 효과를 위해 세부묘사에 신경을 덜 쓰면서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했다. 비평가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불완전한 마무리와 되는 대로 그린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제작방식이었다. 그래서 모네 주변의 화가들은 ‘살롱’ 전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기에 1874년에 한 사진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 전시회에는 <인상: 해돋이>라는 모네의 그림이 있었는데 비평가 중 한 사람은 이 그림의 제목이 우습다고 생각하여 그 전시회에 참가한 그룹을 ‘인상주의자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비평가들을 격분시킨 것은 단순히 그림의 기법만이 아니라 화가들이 선택했던 소재에도 있었다. 모네는 회화의 주제를 재현하는 것보다 빛의 효과가 가지는 마술적인 힘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주제에 대한 ‘인상’을 표현했고 비평가들은 불성실한 작품으로 여겼다. 인상주의자 그룹의 젊은 화가들은 새로운 원리들을 풍경화에만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의 장면 어디에나 적용시켰다. 그중 한 사람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로, 그는 밝은 색채의 즐거운 혼합물을 보여주고 술렁이는 인파에 쏟아지는 햇빛의 효과를 연구하고자 하였다. 지금의 우리는 인상주의자들의 스케치 풍의 그림이 경솔하다기보다 예술적인 지혜의 소산이라고 인식하는 반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비웃음과 분노를 샀다. 인상주의자들은 레오나르도가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어두운 그늘이 옥외의 밝은 광선 아래에서는 발생할 수 없음을 발견하고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을 탈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종전의 어떤 화가들보다 더욱 의도적으로 윤곽선을 흐릿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인상주의 운동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가장 인상주의적인 방법을 고수했던 카미유 피사로는 햇빛이 비치는 파리의 거리가 주는 인상을 그렸는데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상주의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뒤로 물러나서 보면 혼란스러운 색점들이 생기를 띠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대중들이 알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시각적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 인상주의자들의 진정한 목표였다. 비록 이러한 투쟁이 치열해서 미술가들은 힘겨웠지만 그들의 승리는 완벽한 것이었다. 추후 인상주의자들을 비웃었던 비평가들이 큰 오류를 범했음이 증명되었고 그들은 다시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위신을 잃었다. 인상주의자들의 투쟁은 새로운 미술 운동을 일으키는 혁신가들의 소중한 전설이 되었다. 

19세기 사람들이 세계를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준 두 조력자는 사진술과 일본의 채색 목판화였다. 카메라는 우연한 광경과 예기치 않은 각도가 가지는 매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하층민의 생활 장면을 묘사한 일본의 채색 목판화는 아카데믹한 규칙과 상투적 수법에 의해 훼손당하지 않은 전통을 찾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가능성에 깊은 감명을 받은 화가는 에드가 드가였다. 모네나 르누아르보다 다소 나이가 많았던 드가는 가장 의외의 각도에서 본 공간과 입체감에 대한 인상을 전달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그가 옥외 장면보다 발레 장면을 주제로 선택하기 좋아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드가의 그림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으며 그는 단지 인상주의자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한 객관성을 가지고 그녀들을 관찰할 뿐이었다. 새로운 운동의 주된 이념들은 주로 회화 영역에서만 발휘될 수 있었으나 점차 조각도 ‘모더니즘’의 찬반에 대한 격렬한 논쟁 속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고전기 조각과 미켈란젤로의 열렬한 연구자였지만 ‘마무리’된 외관을 부정했다. 로댕도 인상주의자들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볼 때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으려 했다. 심지어 그는 형상이 막 나타나 모양이 갖추어지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거친 돌의 일부를 그대로 놔두기까지 했다. 로댕은 작품의 완성을 깔끔하고 매끄러워야 한다는 인습을 무시한 렘브란트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했고 그러한 그의 영향력은 프랑스에서 인상주의를 받아들이는 길을 터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전 세계 미술가들은 파리에 와서 인상주의와 접촉하였고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발견과 함께 부르주아 세계의 편견과 인습에 대한 저항자로서 새로운 태도로 고국으로 돌아갔다.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미국인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였다. 휘슬러는 1863년 <낙선전>에 마네와 함께 출품했으며 일본 판화에 열광했다. 그는 드가나 로댕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의미에서 인상주의자는 아니었지만 회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주제가 아니라 그것을 색채와 형태들로 전이시키는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런던에 이주하여 거의 혼자서 현대 미술을 위해 싸웠다. 그는 1877년 일본풍의 그림 <야상곡>을 전시하고 작품가격에 백 기니를 매겨 비평가 존 러스킨의 분노를 샀다. 휘슬러는 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이 소송 사건은 대중의 관점과 미술가의 관점 사이에 존재하는 분열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러스킨이 도덕성에 호소함으로써 미美 대해 깊이 자각하게 만들려 희망한 반면 휘슬러는 예술적 감각만이 인생에서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던 심미주의 운동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19세기가 끝날 무렵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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