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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시간 Jun 23. 2024

서양 미술사 읽기 9

19세기 후반부터  모더니즘까지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19세기 후반


 19세기는 표면적으로 번영의 시기였으며, 이러한 번영에 만족한 시기였지만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는 미술가와 작가들은 예술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점차 불만을 가졌다. 엄청나게 팽창하던 건축은 건물의 목적과 관계없이 일정한 틀에 의해 다양한 양식으로 세워지고 있었고, 19세기말에는 점차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에 불만을 가졌는데 특히 존 러스킨이나 윌리엄 모리스 같은 사람들은 기계에 의한 복제품이 아닌 수공예품이 자리를 되찾길 바랐다. 러스킨과 모리스는 중세적 조건으로 복귀함으로써 쇄신하기를 바랐으나 미술가들은 재료에 포함된 가능성과 새로운 감각적 디자인의 신미술을 갈망했다. 이러한 경향의 미술운동을 프랑스어로 새로운 미술이라는 의미로 '아르누보(art nouveau)’라고 부른다.

건축가들은 새로운 종류의 재료와 새로운 양식을 갈망했고 벨기에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는 일본의 건축양식을 배워 당시의 요구에 맞게 옮겨놓았다. 이러한 양식에 대한 자각과 새로운 양식에 대한 갈망에 의해 ‘현대미술’이라고 부르는 여러 가지 미술 운동이 성장하게 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당시 아카데미의 회화 방식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현대미술의 시조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인상파 화가들의 목적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이루어진 자연의 발견 이래로 지속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재현이라는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미술에 있어서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더 많은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새로운 문제의 본질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최초의 인물은 당시 인상파 대가들과 같은 세대에 속한 폴 세잔이다. 그는 젊은 시절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에 참가했지만 그들에게 가해지는 평판에 염증을 느껴 자신의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가 예술의 문제들을 탐구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자연으로부터 푸생’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푸생의 그림은 자연을 편안하고 고요하며 간결하게 표현하여 우연적이거나 모호한 것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세잔은 이와 같이 평온한 분위기의 미술을 자신의 예술적 목표로 삼았지만 전통적인 규범을 적용한 푸생의 방법으로는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세잔은 자연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아카데믹한 기법을 부정하는 인상주의자들과 견해는 같았지만 그들의 방식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잔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인상주의 대가들이 발견한 것을 활용하는 동시에 푸생의 미술을 돋보이게 하는 질서와 필연의 감각을 찾으려 하였다. 하지만 세잔은 색채의 올바른 사용에서 절박한 문제와 마주쳤다. 세잔은 명료함뿐만 아니라 강렬하고 순도 높은 색채를 원했다. 그는 절망에 가까운 고심을 하며 화폭에 매달려 실험을 했고 결국 작품 속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어 냈다. 세잔의 미술에 대한 글은 많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원했으며 무엇을 이루었나를 알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원화를 직접 보는 것’이다. 세잔은 회화의 전통적 기법 중 어느 하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덜란드 화가들이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해 정물을 그렸다면 세잔은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들을 연구하고자 정물을 소재로 택했다. 그는 정물화 소재의 배치를 통해 입체감과 색채의 관계에 몰두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세잔을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해 주었다. 밝은 색채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깊이 감을 살리고 깊이 감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질서 있는 화면배치를 이루기 위해 희생시키고자 했던 단 하나는 정확한 윤곽선이었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사소한 세부의 왜곡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전통적인 원근법을 과감히 무시했다. 세잔은 자신이 바라는 견고함과 깊이감은 전통적인 소묘방법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세잔의 고민을 조루주 쇠라는 수학 방정식을 풀듯이 해결하려 하였다. 세잔보다 한참 어린 나이였던 쇠라는 인상주의 회화기법을 시작으로 색채가 시각에 미치는 작용에 대해 과학적으로 탐구하였다. 그는 순수 원색을 분할하여 규칙적인 점으로 찍어서 마치 모자이크처럼 화면을 구성하였다. 하지만 점묘법은 모든 윤곽선을 무너트려 그림을 알아보기 힘들게 할 수 있기에 쇠라는 형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고 수직선과 수평선을 강조해, 자연을 충실히 묘사하는 것보다 흥미 있고 표정이 풍부한 색면 구성을 개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888년 겨울, 젊은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강렬한 햇살과 색채를 찾아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로 갔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과 벨기에의 광산촌에서 전도사로 일할만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으나 밀레의 작품에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었다. 고흐는 당시 화상이었던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아를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고 동생 테오에게 일기처럼 매일 편지를 썼다. 화가로서의 사명감, 절망적인 고독, 타인과 사귀고자 했던 열망이 담긴 그의 편지들은 문학작품으로도 감동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아를에 온 지 1년이 못되어 고흐는 정신이 쇠약해져 1889년 정신병원으로 들어가, 14개월 동안 정신을 회복하면 다시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지속했지만, 1890년 7월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 고흐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안을 줄 수 있는 소박한 예술을 원했다. 고흐는 인상주의와 쇠라의 점묘법을 흡수했지만 그 기법은 그의 손을 거치면서 그들과 다른 것으로 변모했다. 고흐가 사용한 붓놀림은 색채를 분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기법을 표현하기 위해 두텁게 물감을 바를 수 있는 소재를 즐겨 그렸다. 고흐는 정확한 묘사보다 자신이 그린 사물들에게 느꼈던 감정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색채와 형태를 사용했다. 세잔과 고흐는 ‘자연의 모방’이라는 그림의 목적을 의도적으로 버림으로써 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첫발을 내디뎠다. 세잔은 정물화를 통해 형태와 색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자신의 실험을 위해 ‘정확한 원근법’을 포기했고, 고흐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 했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언제든지 형태를 왜곡시켰다. 두 사람은 모두 전통적인 미술의 규범을 타파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작품에 누군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보다 다만 그렇게 해야 했기에 그러한 방식으로 작업했다.

 1888년 세잔과 고흐의 뒤를 이어 또 다른 화가가 남프랑스로 갔는데 그는 바로 폴 고갱이었다. 고흐는 고갱과 친하게 지내기를 원해 고갱을 설득하여 아를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성향이 매우 달랐기 때문에 그들의 우정은 불행하게 끝을 맺었다. 그로부터 2년 후 고갱은 미술이 겉멋에 빠져 피상적으로 되어가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유럽에서 축적되어 온 재능과 지식이 인간의 예리한 감성과 그것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법을 빼앗아버렸다는 굳은 확신을 갖고 유럽을 떠나 타히티 섬으로 갔다. 그는 원주민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했다. 고갱이 타히티 섬에서 원주민들과 지내며 그린 작품은 야만적이고 미개해 보여 모두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는 자신이 유럽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타히티 섬에서 고독과 절망의 몇 해를 보내다 질병과 궁핍에 쓰러져 죽었다. 세잔, 고흐, 고갱, 이 세 명의 화가는 절망과 고독 속에 살았고 자신의 작품이 이해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고뇌한 예술의 문제들은 미술 학교에서의 배움에 만족하지 않는 젊은 화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 미술은 그들에게 대담한 단순화를 위해 입체감이나 다른 세세한 것들을 희생시킨다면 한층 더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유럽미술이 일본 미술로부터 습득한 절제된 회화기법은 특히 광고 미술에 적합하여 드가의 추종자였던 앙리 드 톨루즈 로트렉은 이것을 포스터라는 새로운 미술에 활용했다.

 당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에서 찬사의 말은 ‘장식적’이라는 것이었고 회화와 판화는 시각적으로 즐거운 화면 구성을 보여주어야 했다. 하지만 일부 미술가들은 이러한 추구 가운데 무언가 중요한 것이 미술에서 사라졌다고 느꼈고 그것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세잔은 균형과 질서의 감각을, 고흐는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것을, 고갱은 보다 단순하고 솔직한 것에 대한 열망을 타히티 섬의 원주민들 속에서 발견하기를 기대했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와 같은 불만의 감정에서 자라났으며 이 세 사람이 모색했던 문제에 대한 답은 세 가지 현대미술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세잔의 방법은 입체주의를 고흐는 표현주의를 고갱은 프리미티비즘을 이끌어냈다.


실험적 미술

20세기 전반


 현대 건축은 서서히 이루어졌지만 그 원칙은 확고했는데, 건축이 예술에 속한다는 관념에 집착하지 않고 장식을 거부했으며 건축을 그 목적에 비추어 새롭게 볼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접근방법을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였다. 그는 주택에서 중요한 것은 내부이지 건물 정면의 외관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기계가 만들어내는 기술력을 받아들여 디자인을 조정했다. 현대 건축가들은 이제 브루넬레스키 시절 이래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양식과 단절했다. 새로운 건축물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건축물이 벌거벗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현대기술이 탄생시킨 명확한 윤곽과 단순한 형태를 즐기게 되었다.

 바우하우스는 미술과 기계 기술이 상호 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워졌다. 바우하우스의 기본 이념은 기능주의라는 용어로 요약된다. 이는 목적에 맞게 설계되어야만 형태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신념이다. 하지만 기능이라는 목적을 충족시키면서도  ‘보기 좋게’ 만들 수 있는 기능과 미(美) 사이에 숨겨진 조화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했다. 건축에서 보이는 대담한 창안과 혁신의 가치는 회화나 조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의 반항아들은 미술의 모든 관습을 쓸어버리기를 제안했고, 인상주의자들은 자신의 기법이 과학적 정확성으로 시각의 움직임을 화폭에 담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상주의 이래로 아는 것과 보는 것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인상주의자들 이래로 등장한 예술가들은 유럽 미술의 전통 전체를 부정하게 되었다. 아르누보의 실험은 이 같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판화의 도움을 받았고 1차 대전 전에는 흑인 조각에 대한 예찬이 열병처럼 퍼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술적 양식의 새로운 미술 운동은 고흐, 세잔, 고갱의 실험에서 물려받은 표현성과 구성, 그리고 단순성의 추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20세기 미술가들은 과거 대가들의 기법이 아닌 끊임없는 실험에 의해 독창성을 추구해야 했다. 고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표현주의 실험은 에드바르트 뭉크에 의해 깊이 탐구되었다. 뭉크의 <절규>는 갑작스러운 정신적 동요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표현주의 미술에 대해 사람들이 당황하게 되는 이유는 자연의 형태가 왜곡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결과가 아름다움과 멀어졌기 때문이다. 표현주의자들은 삭막한 현실을 직시하고 불우하고 추한 인간들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려고 했다. 독일의 미술가 케테 콜비츠는 가난한 이들과 학대받는 이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고 그들의 주장을 옹호했다. 독일은 급속한 변화에 대한 요청이 빈번해 1906년 독일의 화가들은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투쟁을 위해 ‘다리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렇듯 표현주의 운동은 독일에서 가장 풍요롭게 전개되었다. 사물의 밝은 측면만을 보는 것을 거부한 화가로는 오스트리아 출신 오스카 코코슈카가 있다. 1909년 빈에서 처음으로 그의 작품이 공개되자 비난과 욕설이 빗발쳤다. 코코슈카는 예쁘고 즐거운 모습으로 그려졌던 어린아이의 그림에 대한 인습적인 요구사항을 무시했다. 그는 전통적인 소묘의 정확성은 결여되었지만 어린아이를 훨씬 더 실감 나게 표현하였다. 이렇듯 미술이 자연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색채와 선을 사용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표현주의 이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주제를 모두 없애고 색조와 형태의 효과에만 의존한 미술을 시도한 사람은 당시 뮌헨에 살았던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였다. 칸딘스키는 순수한 ‘정신성’을 지닌 참신한 미술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재건하기를 바랐던 신비주의자였다. 이러한 바람으로 정신과 정신을 결합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또 그것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색채로 표현된 음악을 최초로 시도하였고 그로 인해 추상미술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추상미술’이 하나의 미술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표현주의를 통해서만은 아니다. 칸딘스키의 색채 원리보다 더욱 유럽회화의 전통에서 탈피하고자 했던 미술운동은 입체주의였다. 입체주의는 대상을 재현하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지는 않았고 단지 대상을 질서, 구성, 그리고 형태를 추구하여 단순화된 형태로 바꾸려고 하였다. 단순화된 아름다운 형태를 탐구하려는 이러한 활동은 평면적인 형태와 입체성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장식적 구도에 역점을 둠으로써 명암으로 모든 형태들을 모델링해오던 것에서 해방되었다. 고흐와 고갱은 젊은 화가들로 하여금 세련된 미술의 치밀함을 버리고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으로 형태와 색채를 다룰 수 있도록 하였고 화가들이 섬세한 묘사를 거부하고 강렬한 색채와 대담하고 ‘야만적’인 조화를 추구하도록 이끌었다. 1905년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젊은 화가들이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들을 야수파라고 불렀다. 이들이 이렇게 불리게 된 까닭은 그들이 자연 형태를 무시하고 강렬한 색채를 적극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앙리 마티스였다. 마티스는 오리엔트의 양탄자와 북아프리카 경치의 색채를 연구했고 현대 디자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마티스를 가장 감명 깊게 받아들인 사람은 파블로 피카소였다. 그는 데생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바르셀로나 미술 학교에서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고 열아홉 살에 파리로 가서 표현주의자들이 주로 다루었던 소재인 거지, 부랑아, 서커스의 광대 등을 그렸다. 그러나 여기에 별 만족을 얻지 못하고 원시 미술을 연구하여 얼굴이나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익혔다. 그는 이전의 화가들이 자연의 형태를 평면적으로 단순화시킨 것에 반해 평면성을 피하면서도 사물을 단순하게 그리고 동시에 입체감과 깊이감을 유지하는 그림을 만들려고 하였다. 피카소는 세잔이 한 젊은 화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연을 구, 원추, 원통의 견지에서 보라는 충고를 그림이란 어떤 것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축하는 것이라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피카소는 이집트인의 원칙인 사물의 특징적 형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각도에서 포착한 형태를 화면 전체에 균등한 요소로 구성해 화면 전체를 일관성 있게 구성했다. 피카소는 입체주의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재현하는 모든 방법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항상 자신의 기법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어 형상 제작의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피카소 자신은 자신이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했으며 자신이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할 뿐이라고 말했다.

 입체파 화가들은 세잔이 손을 놓은 곳에서부터 계속해 나갔다. 그 후 점점 더 많은 미술가들이 ‘형태’에 대한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았고 이제 미술가들에게는 형태가 주제보다 먼저였다. 이러한 과정은 스위스의 화가이자 음악가인 파울 클레에게서 가장 잘 드러난다. 클레는 파리에서 알게 된 입체파의 실험에 감명을 받았고 그에게 입체파 실험은 형태와 씨름하며 즐길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보였다. 클레는 바우하우스 강의에서 선과 명암  그리고 색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어떤 부분은 강조하고 또 어떤 부분은 가볍게 하는 미술가의 균형 감각으로 형상을 드러내고 이러한 형상을 통해 주제를 상상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자연 그 자체가 예술가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으로 형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훨씬 더 자연에 충실하다고 믿었다. 미국태생으로 클레와 함께 바우하우스의 일원이었던 라이오넬 파이닝거는 입체파 화가들이 생각한 회화의 난제, 즉 명료한 구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평평한 화면에 공간감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다. 그는 서로 중첩되는 삼각형들로 그림을 구성하는 나름의 독창적인 방법을 발전시켰다. 한편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형태에 관한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미술학교에서 배운 기술과 로댕의 조수 시절 익히 솜씨를 거부하고 극도의 단순화를 추구했다.  이처럼 형태에 대해 점점 커져가는 관심은 칸딘스키가 시작한 추상회화 실험에 더운 흥미를 더해주었다. 입체주의가 불러일으킨 화면 구성에 대한 관심은 파리, 러시아 그리고 네덜란드의 화가들에게까지 전해졌다.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은 가장 단순한 요소인 직선과 원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몬드리안은 칸딘스키나 클레와 마찬가지로 어딘지 모르게 신비스러운 경향을 지니고 있었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형태들 속에 가려진 불변의 실재(實在)를 밝혀낼 수 있기를 바랐다. 영국 미술가 벤 니콜슨도 이와 유사한 예술관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흰색 판지에 각각의 깊이를 약간씩 다르게 하여 새겨,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실재’이며 그에게 있어 예술과 종교적 체험은 동일한 것이라는 신념을 표명하였다. 한편 미국출신 알렉산더 콜더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는 기술자였으나 몬드리안의 미술에 감명을 밭아 1930년 몬드리안의 화실을 방문하였고 자신 또한 우주의 수학적 법칙을 보여주는 미술을 갈구하였지만 그에게는 미술이 딱딱하거나 정적(靜的)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우주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균형을 잡아주는 신비스러운 힘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는 균형에 대한 관념에 고무되어 움직이는 조각을 만들게 되었다. 균형과 제작 방식이 아무리 미묘하고 흥미 있어도 화가들은 공허함을 느꼈고 그것을 필사적으로 극복하려고 하였다. 이제 그들의 관심은 과거처럼 ‘주제’에 있는 것도 아니고 ‘형태’에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사물을 창조하는 것에 이르게 되었다. 다시 말해 현대 미술가들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물을 창조했다고 느끼고자 하였다. 이러한 마음을 이해하려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어린 시절에는 벽돌이나 모래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고 느끼며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내 물건들은 때때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20세기 미술가들이 원시 미술의 가치를 새롭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 덕분이었다. 어린아이 같은 것에 현대 미술가들은 열광하지만 어린이의 솔직함과 단순함은 결코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갱은 타히티 섬에서 보낸 편지에서 파르테논 신전의 말(馬)을 넘어서 어린 시절의 흔들 목마로까지 되돌아가야 함을 느낀다고 썼다. 고갱이 주장했던 원시주의는 고흐의 표현주의나 입체주의를 향한 세잔의 방식보다 현대 미술에 훨씬 더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의 미술가들은 원주민들의 작품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취향의 변화에 힘입어 파리 교외에서 세관 관리로 조용히 살아가며 그림을 그리던 앙리 루소라는 화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단순하고 순수한 색채와 명확한 윤곽을 사용해서 사물을 묘사한 루소의 그림에는 힘차고 솔직하며 시(詩)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소박하고 때 묻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부류의 미술가들 중에는 1차 대전 직전 러시아의 작은 유태인 마을에서 파리로 온 마르크 샤갈이 있었다. 그는 현대미술의 여러 가지 실험을 알고 있었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잃어버리지 않아 어린아이 같이 순진한 경이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이렇듯 솔직하고 소박한 것은 누구에게도 자의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미술가들은 어린아이처럼 되기를 바람으로써 계산된 방식으로 접근하기도 하였다.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재능이나 솜씨, 모든 사소한 전문 기법들의 노예인 미술가들의 정신 습관과의 완전한 결별을 추구하고 자신의 정확한 표현과 꿈과 같은 형상들에 수수께끼 같은 제목을 붙여 전시했다. 예를 들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와 같은 작품이다.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자의 일원이었고 그 그룹의 초기 구성원 중에는 조각가 이탈리아 계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있다.

 예술이란 완전히 깨어있는 이성에 의해서는 결코 생산될 수 없다고 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은 프로이트의 학설에 근거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표면으로 떠오를 수 있는 정신 상태를 열망했다. 그들은 클레의 말 즉,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계획할 수 없지만 그 작품이 자유롭게 자라날 수 있게는 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했다. 초현실주의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화가 중에는 미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스페인 출신의 살바도르 달리가 있다. 그는 꿈에서 일어나는 혼돈상태를 그림으로 재현하려 하였다. 그의 괴이한 환영으로 가득한 그림은 어떤 색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종류의 그림은 화가가 사물을 재현하기 위해 주위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 색채와 형태를 취해서 원하는 형상을 구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과거 대부분의 그림의 방식인 한 가지 색채가 자연에 존재하는 한 가지 사물만을 의미한다는 것에서 벗어나 한 가지 형태로 동시에 여러 가지 사물을 나타낼 수 있다는 달리의 방식은 각각의 색채나 형태가 지닐 수 있는 다양한 의미에 관심을 기울이게 했다. 달리의 그림과 고대 아즈텍의 우상을 비교해 보면 유사하면서도 정신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즈텍 우상에 등장하는 사물이 집단의 공통적인 꿈이라면 달리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은 한 개인의 꿈을 포착하고 있다. 먼 과거부터 사회는 의식용 가면, 성당, 초상화, 책의 삽화 등의 필요한 일을 미술가에게 맡겼다. 미술가들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예술로 발전시키는 방식에 주의를 쏟은 나머지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를 잊어버리게 된 시기는 미술의 역사에서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이러한 방향으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헬레니즘 시대였고 다음이 르네상스 시대였다. 사회의 요구가 변화되어 미술가들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미술가들은 수많은 문제를 양산해 내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문제를 사회가 제시하지 않는 경우에는 미술의 전통이 문제를 제시했다. 예를 들어 미술이 자연을 재현해야 한다는 것은 미술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통의 문제였다. 더욱이 이러한 문제들이 하나씩 해결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새로운 문제를 제시해서 그다음 세대 미술가들은 색채와 형태를 이용해서 무언가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미술의 역사는 끊임없이 새로 짜여지고 변화하는 전통의 역사이다. 미술의 전통은 낡은 임무가 사라지면 새로운 임무가 생겨나서 미술가들에게 방향과 목적의식을 부여해 주어 어떤 식으로든 마지막 파멸을 모면하였다. 이제 일반대중은 미술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미술가라고 여기고 이러한 생각에 만족한다. 그들이 미술가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과업은 ‘새로운 것’의 창조이다. 만약 그들의 뜻대로 된다면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새로운 양식, 새로운 ‘주의’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일반 대중의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의 관심과 이해가 미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끝이 없는 이야기

모더니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취리히에서 시작된 예술운동은 전통적인 안료와 캔버스 사용을 거부했던 ‘다다(Dada)’라는 그룹이다. 다-다는 프랑스어로 장난감 목마를 가리키는 유아기적 언어로, 어린아이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다다이즘 예술가인 프랑스 출신 미술가 마르셀 뒤샹은 ‘레디 메이드’라는 작품으로 일상의 사물에 서명을 하였고 독일의 미술가 요제프 보이스는 자신이 ‘미술’의 개념을 확장시켰다고 주장하며 뒤샹의 뒤를 따랐다. 앞서 기술했듯이 ‘미술’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뜻을 지닌다. 중국의 화가들은 필법의 완전한 숙달로 미묘한 농담에 기교를 더해 비단에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모든 필획마다 충만함이 깃든 달인의 경지다.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글과 그림은 공통의 요소가 많았다. 바로 이것이 유럽 회화가 다루지 못한 부분이었다. 프랑스에서 붓놀림에 의한 흔적에 관심을 가졌던 경향은 타쉬슴(tachisme)인데 타슈(tache)는 얼룩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러한 기법으로 흥미를 이끈 사람은 미국인 작가 잭슨 폴록이었다. 폴록은 초현실주의에 빠져 있었으나 점차 이미지를 버리고 추상 회화를 실험했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붓고 뿌리는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이러한 표현으로 생긴 선들은 20세기 미술의 양립하는 두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시킨다. 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자발적인 것에 대한 동경이며 다른 한 가지는 순수회화의 문제들에 대한 복잡하고 고답적인 관심이다. 폴록은 ‘액션 페인팅’, 즉 추상 표현주의라는 새로운 양식의 주창자로 불리게 되었다. 자발적인 분출과도 같은 그의 그림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신선한 광기와 선과 여백의 중국 미술이 영향을 받았던 선불교와 어느 정도 유사한 면이 있다. 여백과 선에 관심을 기울인 미국 화가 프란츠 클라인과 프랑스의 타쉬스트인 피에르 술라즈의 작품도 새로운 시도였다. 당시 많은 수의 미술가들은 물질의 감촉, 즉 물감의 다양한 텍스처(texture)에 몰두해 있었다. 다다이스트들이 이것저것 가져다 붙여놓은 방법, 즉 마대의 거칠음, 매끈한 플라스틱 표면, 녹슨 쇠의 울퉁불퉁한 표면은 새로운 방법으로 개발될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 이외에 ‘옵아트(op art)’라는 미술 운동에 관심을 갖는 작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화면 위에서 형태와 색채가 상호 작용하여 만들어낸, 의도하지 않았던 시각적 효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후시기, 어떤 작가들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의 형상에 관해서만 작업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 조각가 마리노 마리니는 전쟁 중 강렬하게 인상을 받았던 주제를 다양하게 변형시킨 작품들로 유명해지기도 하였다. 이탈리아의 미술가 조르조 모란디는 여러 미술 운동들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설정한 문제들에 전념했다. 그러나 다른 미술가들은 새로운 유행을 좇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을 창조하는데 마음이 끌리기도 하였다. ‘팝 아트(pop art)’는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응용 미술과 순수 미술 사이의 단층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미술의 관념을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미술이 배타적이고 신비스럽다고 생각했다.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새로움과 변화이며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은 변화에 대한 관심이다. 이러한 관심은 미술가와 미술의 지위를 변화시켜 왔고 이러한 변화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빚어낸 하나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의 첫 번째 요소는 진보와 변화에 대한 개개인의 경험과 관계가 깊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인류의 역사를 연속하는 것으로 보게 만들었다. 미술은 중요한 ‘시대의 표현’이며 미술사의 발달은 이러한 믿음을 퍼뜨리는 데 한몫을 한다. 어떠한 양식이나 실험이 ‘동시대적인 것’으로 선언되었을 때, 비평가들은 이를 이해하고 장려해야 하는 의무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이전의 비평가들이 당시에 새롭게 일어난 미술 운동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실패했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자신들의 태도를 정당화시킨다. 이는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당대에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전설을 낳게 했으며 어떤 종류의 미술도 거부하거나 조롱당하지 않는 노력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변화의 두 번째 요인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관계가 있다. 미술가들과 비평가들은 과학의 힘과 권위에 대해 크게 감동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실험을 존중하는 건전한 의욕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늘 열린 마음으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새로운 방법에 기회를 주어야 한다. 변화의 세 번째 요인은 미술이 과학 기술과 보조를 맞추기를 원하는 동시에 벗어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미술이야말로 개인적인 취향과 변덕스러움이 여전히 허용되며 오히려 그것이 옹호받을 수 있는 안식처일 수 있다. 기술적인 효율성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는 잠정적인 협상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들은 프로이트의 발견의 영향으로 일종의 심리학적 가정에 물들기도 했는데 예술은 자아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예술가들의 권리이며 의무이기까지 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심리학이 불러일으킨 흥미는 미술가나 대중에게 자극을 주어 혐오나 터부시되었던 인간 심리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도록 하였다. 변화의 다섯 번째 요인은 매개 수단에 의존하는 예술로서의 미술이다. 미술가는 결국 중간 수단인 매개물 즉 그의 작품을 전시해 주고 선전해 주는 화상(畫商)이 필요하다. 화상들은 변화의 척도를 주시하며 시대의 추세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인재를 발굴한다. 그러나 화상들은 언제나 돈을 벌기를 원한다. 하지만 화상들이 정확한 추측으로 특권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풍차가 바람을 일으킬 수 없듯이 화상 자신이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변화의 여섯 번째 요소로는 미술교육이 현대 미술의 상황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현대 교육에서 개혁이 최초로 이루어진 것은 바로 아동의 미술 교육에서였다. 전통적인 교수법으로부터 해방 운동을 벌인 선구자 중에 빈의 프란츠 치제크가 잘 알려져 있으며 심리학자들은 아이들이 미술활동으로 인해 경험하게 되는 순수한 기쁨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대중들이 혁신적인 미술교육을 받고 있으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유로운 창조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 다른 추세 변화


 20세기 미술은 모더니즘 미술운동을 넘어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슬로건 아래 구체화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1975년 찰스 젠크스라는 젊은 건축가에 의해서 소개되었다. 20세기에 유명해진 모든 운동과 경향의 공통점은 자연 현상의 탐구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모든 미술가들이 이런 결별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비평가들은 전통으로부터 이탈하는 것만이 진보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비평에 있어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더 많은 미술가들에게 인정받을 기회를 제공해 준다. 주목할 만한 하나의 예로 화가 루시안 프로이트가 있는데 그는 지속적으로 자연현상을 탐구했다. 사물을 눈에 보이는 데로 충실하게 표현한 루시안 프로이트의 <두 가지 풀> 같은 그림을 ‘사진 같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진에 대한 관심 또한 점점 커져 가면서 ‘사진 같다’라는 말은 달리 사용하게 되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같은 사진작가는 항상 소형 카메라를 준비하고 다니며 어떤 장면이든 조심스럽게 구성했다. 이러한 구성은 그림에 필적할 만하였다. 미술가들도 기발한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사진을 사용했는데 데이비드 호크니는 입체파 그림을 연상시키는 다중 영상을 잡기 위해 카메라를 즐겨 사용하였다. 이러한 미술의 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미술에 대한 취향이 변화한다는 것이고 우리가 존경하는 많은 대가들과 과거의 양식들이 당대의 비평가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떤 작품이 첫눈에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그 작품의 장점을 찾기 위해 주의를 기울인다면 누구든 뛰어난 미술 작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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