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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May 08. 2019

사랑 여행기 [파리 편]
당신이 기억한 이상한 파리

나랑 내기를 한다면, 내가 무조건 이긴다

"사실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어쩔 수 있는 일들보다 많다. 물론 어떻게든 해보고 싶었겠지만, 그럴 수 있었다면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겠지. 사람의 마음을 어쩔 수 있었다면, 그 누구도 글 같은 걸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노래를 들을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드디어 도착한 파리.

 코끼리는 체구에 비해 뇌가 아주 크고, 기억을 담당하는 ‘측두엽’이 주름도 많고 잘 발달돼 있다. 그래서 중요한 자료(물과 먹이는 어디에서 찾고,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 구분하는)를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쓸모없는 정보는 분명히 잊어버린다. 하지만 잊어버리면 안 되는 정보는 절대로 까먹지 않는다.

 나는 코끼리보다 열등한 인간이라 다 잊어버렸다. 튈르리 공원?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샹젤리제? 개선문과 몽마르뜨 언덕? 시네마 테크? 파리에 다녀온 이들 중 나보다 그곳들에 대해 모르는 인간이 있을까? 내가 쓰려고 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활자가 인쇄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누구나 생각하고 써왔던 것들인 것만 같아 자신감이 떨어진다. 플라톤은 기억력을 위대하고 강력한 여신이라고 불렀다. 그 필요성으로 보아 지당한 말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웠고 어렸던 시기의 어느 순간을 떠올리면 깊게 가라앉았던 감정들이 다시 나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내게 가장 파리다운 장소는 어디인가? 다시 얼굴을 맞대고 파리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떤 곳에 대해 나눌 것인가? 


 어쩌면 이미 파리에 대해 무언가를 쓰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을까. 그때의 나에게 '파리'라는 도시는 전설, 꿈, 소설, 역사의 모든 비밀을 간직한 미지의 제너두였으나 그 후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버렸다. 너무 많은 곳들을 다닌, 너무 많은 날들을 보낸 나는 이제 '파리'도 별 것 아니었다는 생각에서 몇 발자국 나아가지 못한다. 


 나는 파리에 대해 기록한 것을 보며 정보를 수집하지만 사실 샹파뉴 지방의 샴페인을 마시고 흰 곰팡이 치즈를 찾아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한 가난뱅이 여행자로서, 입장료가 아까워 루브르도 들어가지 못하고 퐁 뇌프의 다리를 건너며 영화 속에 나온 다리를 건넌다며 웃곤 하던 뚜벅이 여행자로서, 13구역의 숙소에서 냉동 야채와 함께 볶은 밥을 도시락으로 싸다니며 끼니를 해결하곤 하던, 일주일이 넘게 변변찮은 외식조차 하지 못한(파리에서!) 스쿠루지 여행자로서, 순수했던 시절의 감흥은 이제 내게 어린 일기처럼 느껴진다. 보통 우리가 '그땐 아무것도 몰랐지......'라고 조소하는 일기. 

 아니다, 그래도 파리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훌륭한 남자는 삶의 초년생 시절에 고난을 겪거나 남들은 이해하기 힘든 부침을 겪기도 한다. 많은 사건 사고들이 발생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어느 등장인물이 파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한다. "파리에선 사랑만 있으면 살 수 있어요." 그런 측면으로 눈을 돌리자면 나도 뭔가 쓸 수 있을 법하다. 동아줄을 붙잡고 파리의 꼭대기로 올라간다.

 언제나 Paris Je t'aime


 오래된 전설처럼 수도 없이 되뇌어지던 파리.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당신이 이 삶에서 꿈꿀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으러 가는 도시. 세상의 중심, 꿈의 도시, 인간이 가진 원초적 본능을 일깨우는 도시......

 괴짜같이 내겐 아주 이상한 기억들이 선명히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내가 그녀와 와인을 마시는 일에 대해 벌였던 언쟁이다. 프랑스 왕가의 정원이었다던 뤽상부르 공원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맞잡은 손을 앞뒤로 크게 흔들며 걷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오빠는 화이트 와인을 좋아해? 아니면 레드 와인을 좋아해?"

 "나는 레드 와인을 좋아해. 화이트 와인은 전혀 술 같지가 않아서 재미가 없어."

 "레드 와인에도 종류가 많이 있잖아. 어떤 걸 좋아해?"

 "그런 건 잘 몰라. 그냥 마실 뿐이지."

 "그럼 오늘 저녁엔 레드 와인을 사 마시자. 분위기 좀 내고 말이야."

 나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 굳이 와인을 살 필요가 있을까?"

 "왜, 왜, 좋은 것 좀 사 마시면 좋잖아."

 "너는 술도 좋아하지 않고, 몸에 받지도 않잖아. 왜 꼭 분위기를 내기 위해 와인을 사자는 거지? 어차피 항상 그렇듯 사놓으면 나 혼자만 다 마실 텐데. 괜한 낭비 같은걸."

 그녀는 내가 그녀의 소비 행태를 비난했다고 생각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싫으면 마. 오빤 정말 분위기를 몰라. 됐어, 와인 따위."

 "아니, 잠깐만."

 나는 그녀의 톡 쏘는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 이따금씩 발생하는 불편한 기류는 그렇게 갑자기 발생해버린다. 상대의 말하는 투 하나에, 그가 무심결에 선택한 단어 하나에 기분이 몹시 상해 몹쓸 고집과 아집이 생기고, 평소라면 동의하지도 않았을 어떤 주장을 관철시키려 무던히 애를 쓴다. 말문이 막히거나 상대를 인정하면 패배감을 느낄 듯이. 시간이 지나 기분이 나아지고 나면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사과하고 싶을 하찮은 주장 따위를. 

 우리는 티격태격했다. 정말 그녀와 싸우고 싶었던 것일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다 보니 무언가 가슴속에 쌓여있던 것일까? 그저 "그럼 그럴까?" 하고 웃은 다음, 없어서 못 마시는 술이나 진탕 마시며 즐겼으며 그만이었는데, 왜 자진해 검투장으로 그녀를 불러내 검을 빼든 것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대답 하나를 바꿀 수 있다면, 관계 전체를 바꿀 수 있다고.  

 나는 대체 왜 분위기를 내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마신다는 생각은 굉장히 경직되고 전형적인 생각이라는 의견을 피력해야만 했나. 대체 무엇을 위해 경직된 사고와 유연한 사고의 경계에 대해 논해야만 했나.(대체 레드 와인을 마시자는 것에서 어떻게 그렇게 진행될 수가?)

 "나는 단지 프랑스 파리에서 와인을 좀 마셔보자는 것뿐이야. 오빠는 왜 그렇게 깊숙하게 파고드는 거야? 그래, 나는 술을 싫어하지만 오빠는 술을 좋아하잖아. 와인 한 병쯤은 순식간이잖아. 그래서 파리에서 와인이라도 마시면 얼마나 좋아할까 하고 말한 것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그냥 분위기를 내고 싶었을 뿐인데, 뭐 비싼 고급 와인을 마시자는 것도 아니고. 가끔씩 오빠는 너무 깊이 자기 생각에 집중할 때가 있어. 너무 깊이 집중해서 다른 건 하나도 보이거나 보려고조차 하지 않아.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서 돌 같아."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는 고국 이탈리아를 그리며 이 정원을 거닐었다.

 고집스런 인간의 말로는 집착에 가까운 고집이나 침묵뿐이다. 그 이상한 언쟁이 끝나고 우리는 마로니에 가로수가 세상을 뒤덮은 프랑스 왕가의 정원에서 몇십 분간이나 말없이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느긋하고 한가로이 파리의 햇살을 맞고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내 생애 가장 한심한 파리의 오후였다. 모든 것이 입을 다물고 있었고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 자신에 대한, 인간이라는 검은 머리털을 가진 동물에 대한 지겨움이 들었다. 


 벽이라도 놓여 있었다면 차라리 편하련만 그 사람과 나를 가로막는 것은 단지 불온한 감정과 공기뿐이라서 나를 더욱 불편케 했다. 하고 싶은 말과 해주고 싶은 말이 그리도 많았는데, 차라리 만날 수도 없게 떨어져 있다면 전화라도 걸어 볼 용기가 났을 텐데...... 단지 자존심과 무심함, 엎치락뒤치락하는 감정 때문에 그 사람에게 유치한 상처를 주다니. 파리의 목 좋은 어느 구역에, 프랑스 왕비가 예쁘게 다듬어 놓은 정원에서 말이다. 많은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어떤 것은 그대로이거나 다시 살아났지만 어떤 것은 속절없이 죽어버렸다. 

 우리는 어스름이 지기도 전에 에어비앤비 숙소로 돌아갔고, 결국 와인을 사 마셨지만 그녀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날 밤 우리는 화해하고 잠을 잤지만 한 가지 기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이 사람 고집은 꺾을 수가 없구나.]


 감정은 하나의 거대한 호수고 그 안을 채운 물은 모두 기억들이다. 아주 자그마한 돌멩이도 걷잡을 수 없는 기억의 물결을 만든다. 잔물결이 퍼지듯 기억들이 뒤섞이면 호수가 뒤흔들리며 감정들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이 글을 적는 지금 그 몇십 분을 내게 다시 쥐어준다면 나는 온몸을 다 바쳐 레드 와인을 마셔버릴 테다. 아니, 그런 사랑스런 의견을 낸 그녀를 얼싸안고 칭송하는데 일분일초를 사용할 것이다. 그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고, 배려심이 깊고,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소리칠 것이다. 그녀가 부끄럽다며 내 입을 틀어막으려 손을 뻗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만들 것이다. 그게 진심이니까. 그게 고집부려야만 했던 진정한 심정이니까. 경직된 나의 뇌를 따사로운 햇볕에 잘 말려 녹여버릴 테다. 절대 허비하지 않을 테다. 절대로.

 나랑 내기를 한다면, 내가 무조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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