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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May 03. 2019

사랑 여행기 [쾰른 편]   한나절의 도시 탐방

기억에 기대를 걸어보자

"나는 항상 눈만 감으면 잠에 드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런 사람들은 기억을 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큼 커다란 축복은 없다……. 미래는 기대라도 할 수 있지만 과거는 기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마르셀과 함께 열차를 타고 쾰른 시내로 향했다.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은 항상 그 진위 여부를 의심받는데, 널리 퍼진 의심 중 하나는 그가 중국 원나라에서 관직까지 받으며 오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 전족이나 차 문화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가 정말 중국에 있었다면 그런 것들에 대한 서술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만약, 에펠탑 앞에서 찍은 사진이 없다면 파리에 가지 않았던 것일까?

 아무튼 내 쾰른 방문의 진위 여부가 의심받을까 봐 쾰른 대성당에 대한 언급을 하려 한다. 사실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섹스 샵에 가 본 적이 없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나중에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진위 여부를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쾰른 대성당은 커다랗고 뾰족한 가시가 무수히 박힌 것처럼 보인다. 고슴도치가 킹콩처럼 거대해지면 그렇게 생겨먹었을 것 같다. 사실 유럽 어느 도시를 가든 그렇게 생겨먹은 성당들이 있다. 가시가 많냐 적냐의 차이일 뿐이다. 대성당은 수십 년에 걸친, 어쩌면 영원히 계속될 보수 공사가 한창이라고 했다.

 관광객이 북적여 굳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정말 가고 싶었다면 나는 마르셀의 바지를 벗겨서라도 끌고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우리는 쾰른 대성당 앞에서 마르셀의 대학 친구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대성당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남겼다. 누구든 언제든 만나자마자 함께 사진을 찍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은 잊어버린 많은 것들을 되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아무리 기억을 하려고 노력하면 뭐 하나. 수년을 함께 했어도 그 눈동자가 무슨 색깔이었는지, 얼굴 모양이 어땠는지 이렇게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을.

쾰른 시내 어디서나 보이는 쾰른 대성당. 커다란 고슴도치 모양.

 마르셀의 대학 동창은 작은 키에 머리가 벗어진 똘망똘망한 청년이었다. 아주 천천히, 극도로 정중한 말투를 구사하고, 어떤 질문을 받으면 거기에 중대사가 걸린 것처럼 신중하게 대답한다. 마르셀과 그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은 마치 코미디언 듀오 같다.

 그들은 우리를 자신들이 다녔던 대학 캠퍼스로 데려갔다. 값싸고 양 많은 식당을 좋아하는 독일 공대생들. 마르셀의 친구가 추천한다는 레스토랑에 갔다. 메인 요리들이 10유로를 넘지 않는 혁명적인 가격. 우리는 테라스에서 값싼 음식과 맥주를 마셨다. 길거리엔 자전거를 탄 사람들,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대학생의 책가방들이 보였다.


 젊음은 심심찮게 질투를 유발한다. 젊음은 상대적이고, 더 젊은것 앞에서 다른 하나는 곧장 늙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냥 고개만 돌렸을 뿐인데 갑자기 내가 늙어버렸음을 느끼면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 테라스에 앉아 어느 대학의 정경을 바라보니, 내가 무슨 황혼에 들어선 인간처럼 느껴졌다.

 젊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보다 더 젊은 사람들보다는 늙은 것. 멋지고 예쁘지만 나보다 더 멋지고 예쁜 사람들보다는 못한 것. 해낼 수 있지만 언제나 이미 더욱 완벽히 해낸 이들이 있다는 것.

 

 비교는 불행의 씨앗이다. 그 어느 면에서도 쓸데없다는 것을 안다. 누구나 알고 있다. 누구나 다 하고 있을 뿐.

 
 내가 넌지시 그런 이야기를 하자 마르셀의 친구(이름은 잊어버렸다)가 진중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이제는 수명이 많이 늘어서 우리 모두 다 아직 어린아이와 같을지도 몰라요. 앞으로는 100살이 넘게 사는 것도 흔한 일이 될 거니까요. 앞으로 의학 기술은 계속 발달할 것이고요. 이제는 한 50~60대가 돼도 별로 늙었다고 할 수가 없어요. 수명의 측면에서 볼 때 아직은 우리가 아주 젊다고 할 수 있지요."

 나는 할 말이 없어졌고 그의 사랑스러운 공감 능력에 감탄했다.  

  

 우리는 캠퍼스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캠퍼스 안의 사람들은 다르다. 대지의 얼굴이 바뀌었다. 이곳 사람들은 다르게 웃고, 다르게 말하며, 다르게 빚어졌다.

 대학 건물 몇 채를 넘어가자 놀라울 만큼 우아한 자태의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완만한 언덕, 잔디밭을 둘러싼 숲에서 나오는 참을 수 없는 싱그러운 향기. 나뒹구는 사람들 뒤에서 붉은 꽃을 다발로 피우는 당당한 나무들. 그곳의 구조는 거짓 없이 열려있어, 그 공간이 주는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그냥 걸으며 색채와 짧은 잔디 풀이 만들어내는 조화를 즐기면 된다.

 잔디가 쫙 깔린 언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한번 데굴데굴 굴러서 내려가 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런 충동을 못 이겨 다른 곳에서 한번 잔디 언덕을 굴러 내려가 보았는데, 얼마 못 가서 세상이 핑핑 돌며 욕지기가 났다. 절대 추천할 만한 행동이 아니다.

 

 우리는 캠퍼스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독일인들은 맥주 캔을 사 왔다. 모든 걱정과 비교, 근심과 열등감들이 한낮의 태양빛 아래서 맥주 거품처럼 녹아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고요한 하늘은 고양이 털처럼 부드러워 보인다.

길가의 아름다운 꽃들. 지금쯤은 모두 시들었을 것이다.

 언덕 위의 대학생 커플이 서로 무릎베개를 해주며 누워있길래 나도 여자 친구의 다리를 베고 누워버렸다. 말캉한 살의 감촉이 느껴지고 그녀의 체취가 짙게 난다. 그녀의 얼굴을 땅에서 하늘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의 얼굴을 하늘에서 땅으로 쳐다본다. 사라진 낙원에서의 두 세상의 만남, 내가 느끼던 향수와 공포를 기억한다.

 잔디밭으로 눈을 돌려 살펴보다가 길에서 본 거리의 꽃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떤 꽃이 제일 예뻐?"

 내가 여자 친구에게 물었다.

 "열 번쯤은 물어봤을 거야. 나는 접시꽃을 제일 좋아한다고 열 번쯤은 대답했을 거야."

 여자 친구가 대답했다.

 "앞으로 열 번을 더 물어보더라도 똑같이 대답해줘."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여자 친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걸 왜 좋아하는데? 이건 안 물어봤던 것 같은데."

 "접시꽃의 꽃말을 우연히 봤는데 그게 좋아서 그렇다고 얘기했었어."

 "그래? 접시꽃이라."

 "알기는 해?"

 "나는 너만큼 꽃을 좋아하진 않잖아."

 그러자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접시꽃의 꽃말은 애절한 사랑, 열렬한 사랑이다. 또한 단순하고 편안한 사랑이기도 하다. 이제 보니 정말 좋은 꽃말인 것 같다.


 그녀가 그렇게 꽂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몰랐다. 아니, 알았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접시꽃을 닮은 사람이었대도 나는 접시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색깔이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니.   

 빅토르 위고는 적었다. [집시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에요. 공기와 사랑뿐이에요......] 그녀는 집시 여자였나? 그토록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고 나머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거 아세요? 클레오파트라가 살던 시기는 '기자(Giza) 피라미드'보다는 아이폰 발명 시점과 더 가깝다는 걸요." 마르셀의 친구가 말했다.

 "그런가요? 놀라운데요."

 내가 대답했다.

 "그럼 이거는요? 옥스퍼드 대학은 아즈텍 문명보다 오래됐고, 러시아 영토는 명왕성보다 넓지요."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내가 놀라워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의 옆에 앉은 마르셀을 바라보니 지겹다는 듯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여자 친구는 창밖 보는 건지 듣고 있는 건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내가 흥미롭게 들어주자 마르셀의 친구는 더욱 신이 나서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 정보들을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실제로 몇 가지는 기억하고 싶을 만큼 흥미로웠다.

 "지상보다 30cm 위에서 시간이 더 빨리 흐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 다리보다 머리 쪽에서 시간이 더 빠르지요. 그러니까 머리 쪽이 다리 쪽보다 더 늙은 거예요."

 "얼마나 빠른 거지요? 그런 건 어떻게 측정할 수 있지요?"

 내가 캐물었다.

 "어, 측정 방식은 다양하지만 인식하지 못할 만큼 아주 약간 더 빨리 흐른다고 했어요."

 마르셀의 친구가 대답했다.

 "이 친구는 항상 표면적인 사항만 외우고 다녀. 실제로 수첩에 적어 놓고 달달 외우고 다니지. 깊게 파고들 수 없는 정도의 지식이야. 이 친구는 항상 자신이 말주변이 없다고 고민했는데 그런 정보들이 대화를 수월하게 풀어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항상 수수께끼나 불가사의에 대한 기록을 뒤지고 다니지."

 마르셀이 웃으며 친구를 놀렸다.

 우리는 쾰른 시내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 나란히 마주 앉아 있었다. 마르셀과 그의 친구가 앉은 창가 뒤쪽으로 넓은 폭의 강이 흘러 지나갔다.

 잠시 후 그들은 대체 동반 몇 인까지 열차 할인이 되는지를 두고 옥신각신했다. 정기권을 끊은 독일 시민들은 주말이나 주중에 특정한 인원을 무료로 동반할 수 있는 듯했다. 독일 기차역엔 따로 개찰구가 없으며 열차 내에서 불시에 열차표 검사를 하곤 한다. 그들은 결론을 내지 못했고 정확히 언제, 몇 명이나 무료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무사히(어쩌면 불법적으로) 열차에서 내렸다.


 쾰른의 중앙역에서 어색한 끝인사를 하고 뒤돌아가는 마르셀 친구의 뒷모습을 보았다. "모든 인간은 30분간 단세포였어요." 우리는 서로의 행운을 빌었다. 그는 왜 그런 바보 같은 가방을 메고 다닌 것일까? 내 생애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 분명한 사람의 뒷모습. 그는 내가 그렇게 바라본 수천 명의 그림자 중 하나가 되었다. 딱히 그가 그리운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순간 조금 궁금할 뿐이다.


 언젠간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난 모두를 모아놓고 성대한 파티를 열고 싶다. 나는 정신없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그 시절은 어땠는지에 대해 추억 얘기를 나눌 것이다. 정신없이 지나치며 한 명 한 명 얼굴을 확인하고 얘기를 나누면, 나는 수없이 목이 맬 것이다. 나중엔 목이 잠겨 벙어리가 될 수도 있다. 모두를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나는 벌써부터 목이 매기 시작한다.

 내가 보낸 날들이 한 권의 책이라면 그들은 그 속의 단어들이다. 누군가는 문장이고, 누군가는 문단이다. 누군가는 한 챕터이고, 어느 누군가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자 줄거리다. 사실 나는 그들의 총합일 뿐이고 그저 기록하고 기억해내야만 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기억에 기대를 걸어보자.

 

 어쨌든 그는 나와 쾰른의 고요한 오후를 함께 보낸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누구든 몇 시간이든 함께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눈다는 일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다. 추억할 줄 아는 사람은 그게 정말 기적 같은 일이란 사실을 알 것이다. 누군가를 추억하다 보면, 그게 누구였더라도, 그를 만났다는 게 지금으로선 믿기지 않는다. 길을 가며 스쳤을 수십, 수백 만의 사람들. 그는 그들 중 그나마 내게 의미를 가진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마르셀의 마지막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그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기야, 누가 그런 걸 알겠는가? 그게 대체 그 익숙했던 사람을 눈에 담는 마지막 순간이 될 거라고 어떻게 짐작이나 했겠는가? 슬프게도 아직 삶은 헛된 희망을 주며 계속되고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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