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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Jun 13. 2019

사랑 여행기 [마르세유 편] 가장 프랑스답지 않은 도시

"꿈꾸는 얼굴들은 별과 같이 빛을 발하고, 세상에 꿈꾸지 않는 자 얼마나 많은가. 우리 안에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부싯돌이 영원히 부딪치며 불을 지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내가 타 죽든지 태워 죽이든지 둘 중 하나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주위가 확 밝아진다. 이렇게도 밝은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는 사실을 점심때가 다 되도록 모르고 있었다. 멋진 항구를 가진 도시의 바람은 언제나 물기 섞인 시원함을 가지고 있어서 느낌이 좋다. 그날은 정말 이상한 오후였다.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쬤고, 그늘 밑에선 서늘해서 추웠다.

 일요일 점심시간, 텅 빈 거리는 심심해 보인다. 때에 따라 평화로워 보이기도 한다. 가로수 그늘 아래에서 땀이 식자마자 난 다시 뙤약볕 밑을 걷기 시작했다.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7월의 마르세이에서 감기에 걸린다면 놀림을 받을 만하다.


 투명한 물이 흘러내리는 계단식 분수가 있다. 거기에 앉아 샌들을 벗고 발을 적셨다. 왜 물이 투명했던 게 뇌리에 남냐면 그 안에 수북이 쌓인 동전들이 선명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다 쓸어 모으면 얼마가 될지 궁금했다. 그 돈이면 그녀에게 부야베스를 사 먹일 수도 있을 텐데. 물론 동전을 줍지 않는다고 해서 부야베스를 못 사 먹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좀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거다. 여행 중 어떤 것에 생각보다 많은 돈을 쓰게 되면 다른 것에서 그만큼을 아끼려는 마음이 드는 게 문제다. 잔고는 마음의 여유를 준다. 잔고만 넉넉하다면 나는 그 어느 문제에 대해서도 세상 가장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아무튼 마르세이는 프랑스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도시 건설은 2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때 자리를 잡은 항구가 아직까지 도시의 중심가다. 고대 그리스의 선박이 정박했다. 그들은 대체 이 아름다운 해변은 무얼까하고 놀라워했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마살리아'라는 이름을 짓고 여기서 살며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안 했다. 시간이 지나 로마인들이 와서 보니 너무 살기가 좋았다. 그래서 이곳을 거점 항구로 사용했다. 몇백 년 지나 프랑크 왕국의 기사들이 와보니 이미 도시가 꽤나 번창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시대들을 거치며 항구는 변하고 변해서 지금까지 발전해왔다.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싸고 호텔을 짓고, 레스토랑을 열고, 맥도날드를 입점시켰다. 아마 BC234년에도 이곳엔 빵과 와인을 파는 신식 가게들이 오픈했을 거다. 로마인들은 마르세이의 풍부한 해산물로 잡탕을 맛있게 끓여 팔았을 것이다. 1348년엔 여인숙이 새로 개업했다. 1765년엔 항구의 선원을 위한 최신식 펍이 개업했다. 장사가 너무 잘 돼서 1년 후에 권리금을 받고 자리를 판 후 딴 곳에 확장 이전을 했다. 다만 가게 이름이 바뀌고, 인테리어가 바뀌고,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났을 뿐이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범선들.

 북아프리카,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등지를 거쳐 지중해를 돌아다닌 선박들은 이곳 마르세이 항구에서 잠시 쉬어간다.

 마르세유는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사람들은 마르세이가 가장 프랑스 같지 않은 도시라고 말한다. 어떤 점이 막세이를 그렇게 불리게 만들었을까?
 가장 미국적인 도시는 시카고다. 가장 프랑스적인 도시는 파리일 것이다. 마르세이는 사생아인가? 마르세이에 도착하기 전 나는 사람들이 마르세이는 프랑스 같지 않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그랬기 때문에 마르세이에 강하게 끌렸다. 프랑스 같지 않은 곳을 알아보면 프랑스 같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르세이 체류 며칠 동안 나는 그 이유를 캐내어 갔다.


 vieux port, 옛 항구. 알제리에서 올라온 상선들이 정박하던 곳. 지금은 하얀 요트들이 줄에 묶인 푸들처럼 꼬리를 흔드는 곳.

 항구는 ㅂ자 모양으로 만들어져 배를 들이고 있다. 뾰족한 기둥을 세운 하얀 요트들이 있다. 길가를 따라서 각종 물건을 파는 좌판이 깔려있다. 마르세유는 천연 비누가 유명하다. 꽃이나 풀들로 향기로운 비누를 빚는다. 옛 항구엔 천연 비누를 파는 좌판이 많다. 길을 다 건너자 내 체취가 향긋해지는 것 같았다. 여자 친구는 황홀해했다. 여자들은 향기에 정말 약하다. 그녀들은 향긋한 향이 나는 곳에 가면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말이다. 그들은 그것에서 무언가 아름다운 동화적 느낌을 받는 것 같다. 공주가 된 것만 같은 느낌 말이다. 이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항구의 바닷바람에 실려 떠돌아다니는 은은한 비누향에서 야릇한 설렘을 느꼈다.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배가 꾸준히 왕복한다. 그들은 이층 갑판 위에 올라가 맨살을 드러내 놓고 인생의 오후를 즐기고 있다. 나는 항구에 서서 그들에게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지중해의 여인들이여. 조르바는 자유를 운운하며 상의를 탈의한 여자들을 당당히 응시했다. 나는 조르바보다 열등하여 언제나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하늘을 바라보면 정말 구름 한 점 없다. 바다 멀리 낮게 구름들이 깔려있기는 하나, 너무나 멀다. 해는 신나서 쨍쨍하며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나는 먼 구름들을 바라보며 '조금만 이쪽으로 와주지.'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옛 항구 한 편의 맥도날드에 들어갔다. 그녀가 더워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사의 달달하기로 유명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했다. 가끔씩 그녀는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것을 먹지 않고는 다른 어떤 일도 하지 못한다. '그것'을 먹지 못하면 비슷한 음식이라도 다른 것은 먹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물론 내 생각에 비슷했다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아무거나 주워 먹는 남자들과는 다르다. 특정한 음식에 대한 욕구가 생기면, 며칠이 걸리더라고 그것을 반드시 먹어야만 한다. 피자가 먹고 싶어 졌으면 어느 시점에는 반드시 피자를 먹어야만 한다. 햄버거를 먹는다고 해서 충족되지 않는다. 피자빵도 안 된다. 만약 특정한 피자 가게의 특정한 종류의 피자라면 얘기가 더욱 복잡해진다. 그런 경우에는 그 피자가 아니라면 다른 피자로도 충족되지 않는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다. 베를린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2차 대전은 끝나지 않는다.


 맥도날드사의 멋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편히 앉아 옛 항구를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생긴 테이블 위에 햄버거 두 개를 놓으면 팔꿈치를 놓을 공간도 없을 만큼 멋지다. 우리 둘은 거의 키스하듯 바라보며 햄버거를 먹어야 한다.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문득 생각이 나 그녀에게 말했다.

 "내일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날짜네."

 "오늘이 며칠인데?"

 "7월 13일.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지. 아니, 해방시켰지."

 "왜?"

 "그냥......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랬지. 루이 16세가 사람들을 못살게 구니까. 바스티유 감옥은 정치범들이 부당하게 많이 잡혀있다고 소문이 나 있었어. 그런데 사실 습격했을 때 수감자가 7명밖에 없었대."

 "그럼 괜히 습격한 거 아닌가?"

 "괜한 습격이라. 그렇다곤 할 수 없지."

 "근데 왜 습격했는데?"

 "글쎄요. 부르봉 왕가가 썩을 대로 썩었으니까 어떻게든 터진 거지. 민중은 인내심이 강해서 먹고 살기 불가능해질 때가 아니면 웬만해선 봉기하지 않아.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루이 16세는 "저들이 레볼트를 일으켰다!"라고 외쳤는데 옆에 있던 라 로슈푸코 공작이 "아닙니다. 이것은 레볼루시옹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지. 아주 유명한 얘기지, 뭐."

 "레볼트랑 레볼루시옹이랑 뭐가 다른데?"

 "레볼트는 폭동이고 레볼루시옹은 혁명이지."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거네."

 "행동은 같지만 표현이 다르지."

 "혁명은 어떻게 다른데?"

 "레볼루시옹은 원래 별의 회전운동을 뜻하는데,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는 거야. 내 생각엔 '벌어져야만 할 일이 벌어졌다'라는 뜻인 것 같아."

 "멋있다."

 "200년도 더 지났으니까 멋있지. 모든 건 결과가 나온 후 평가되는 게 아닐까 해. 만약 혁명이 실패하고 루이 16세가 이겼다면 그 일은 7.14 폭동으로 남았겠지."

 마르세유의 맥도날드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을 관찰했다. 중년의 한 서양인 남자가 햄버거를 받아서 자리에 앉았다. 그는 햄버거를 빵, 채소, 고기 패티로 분해한 후 패티만 포크로 잘라먹었다. 패티를 다 먹은 후 빵과 채소를 퇴식대에 그대로 버렸다. 그걸 보고 내가 여자 친구에게 말했다.

 "저 남자는 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누구?"

 나는 그녀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주어 그를 볼 수 있게 해 줬다. 그리고 그가 햄버거를 분해해 패티만 빼먹은 사실을 말해줬다.

 "와, 혁명적이네." 그녀가 말했다.

 "저건 폭동 같은데." 아주 즐거운 오후였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건 재미있었다. 그건 정말이다. 하루 종일 있어도 얘깃거리가 많았다. 나는 친절한 면이 부족한 사람이어서 재미없는 사람과는 3초도 얘기 나누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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