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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Jun 03. 2019

사랑 여행기 [마르세유 편]
모든 울타리는 쓰러졌다

 "어딜 가든 달라질 건 없다는 생각이 든 적 있나요? 하지만 가보면 달라질 거예요."


 막세이 혹은 마르세유. 현지 발음은 '마르세이'에 가까운 것 같다.    

 천둥번개가 치며 세차게 비가 쏟아져 내리던 날 우리는 파리를 떠났다. 프랑스를 종으로 가로지르는 A7 고속도로. 리옹을 거쳐 마르세유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단숨이라고 해도 중간에 쉬어가지 않았을 뿐이지 7시간이나 걸렸다. 등창이 생길 것만 같았다. 나는 운전자가 아주 빠르게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예상 시간과 다름없이 도착했다. 


 유럽의 발달된 공유 경제 사정에 발맞추기 위해 우리는 모든 이동을 카 쉐어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처음 본 현지인들과 함께 이동을 하는 일은 싸고(놀랍도록), 빠르고, 특이한 경험이 되었다. 나쁜 경험을 한 일은 다행히 한 번도 없었다. 추후 아주 쫄깃한 상황을 한번 맞닥뜨렸을 뿐이다. 그건 비엔나로 향할 때의 이야기다.  

 아무튼 파리의 후미진 구역에서 올라탄 승용차에는 5명의 사람이 탔는데, 서로 대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앞 좌석에서 탄 우락부락한 두 흑인 프랑스 청년들은 아주 간신히 영어를 사용했다. 우리는 프랑스어를 모르고, 리옹에서 내린다는 남자는 둘 다 못하는 것만 같다. 나는 자동차 뒷좌석 중앙에 끼어 2평 남짓한 차 안에 감도는 문화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프랑스를 질주했다. 리옹에서 한 남자를 내려주며 주유를 하고, 운전자와 그의 친구가 담배를 피운 것을 제외하면 쉴 새 없었다. 목적지인 마르세이에 도착한 저녁 무렵엔 형제애가 느껴졌다. 

 "샌드위치 먹을래? 땅콩버터가 들어갔는데요." 두 프랑스 청년은 외모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순박하고 친절한 남자들이었다. 여자 친구는 먹지 않았다. 여자 친구는 그들이 범죄를 저지를 것처럼 여겼다. 그들처럼 순박한 사람들이라면 절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나는 맛있게 먹었다. 백미러를 통해 우리를 바라보는 운전자의 미소를 보았다. 그의 가지런하고 하얀 이는 내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서로 의견 다툼을 해가면서까지 우리를 목적한 주소의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떠났다. 

 "Von voyage." 그들은 떠났다. 우리는 카 쉐어링 커뮤니티에 그들이 굉장히 착하니, 절대 그들의 외모를 보고 지레 겁먹지 말라고 적어주었다. 


 유럽의 또 다른 발달된 공유 경제 사정 체험하기 위해 모든 숙소를 에어비앤비로 잡았다. 그 시절은 이제 막 에어비앤비가 자리를 잡고 있던 굉장히 좋은 시절이어서, 아주 좋은 숙소를 놀라운 가격으로 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에어비앤비 숙소들에 참으로 멋진 기억이 많다. 행복한 여행의 첫 번째 조건은 어떤 형태이든 잠자리가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안에 스테레오가 있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집에 들어와 음악부터 켜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세이의 어느 골목길, 우리가 묵을 집의 문 앞에 서서 잠시 집주인을 기다렸다. 아직도 하늘에서는 천둥이 치고 있다. 잠시 그친 비는 곧 다시 몰려올 것만 같다. 가까운 바에서 들려오는 토요일 밤의 소음이 천둥보다 요란했다. 우리는 막세이가 아름다운 항구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미친 도시였다. 별로 어울리지 않지만 이곳은 프랑스 내에서 힙합을 가장 사랑하는 도시다. 아름다운 퇴폐미를 품은 도시. 프랑스에서 가장 치안이 좋지 않은 도시. 그런 점이 이상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긴 하다.  

 잠시 후 집주인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히피의 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외설적이고 초현실적인 포스터로 도배가 되어있는 벽이 흥미롭다. 인도에서 맡을 법한 향내와 비에 젖은 개 냄새가 났다. 좁은 집 안에 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스피커가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데 집주인 아주머니는 그것 자랑만 하다가 갔다. 정작 거기서 지내는 4일 동안 필요했던 많은 정보들은 우리가 스스로 알아갈 몫으로 남겨둔 채.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집처럼 지내길 바라요." 집주인 아주머니가 말했다. "나는 멀리 떠날 테니까 키는 집 안에 두고 문만 잠그고 가세요." 

 간신히 의사소통을 마친 후 문간에 서있는 우리에게 살짝 손 인사를 한 그녀는, 고양이처럼 살살 문을 닫고 나갔다. 둘만 남겨진 집, 제일 먼저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프랑스는 유럽 속의 대륙이고, 하루에 종단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오래된 나라다.       


 블라인드가 강력히 빛을 막고 있어 늦잠을 잤다. 낯선 공간에서 눈을 떴다는 느낌도 없이 익숙하게 변기에 앉았다. 이게 뭐지? 좁아터진 화장실 벽면을 도배한 집주인의 사진들은 약간의 흥미를 돋운다. 한 인간이 수집한 물건은 굉장히 귀엽다. 물건들은 그 사람에 대해 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해준다. 나는 어떤 사람이 바다조개껍질을 주워 모아놓은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단번에 그 사람이 나와 얘기가 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한 인간이 살아오며 수집해온 물건은 정말 귀엽다. 그런 물건들을 보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아무래도 히피족이거나 히피가 되고 싶었던 한 평범한 소녀였던 것 같다. 그녀가 캄보디아 여행을 몹시 행복하게 추억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미 수십 계절이 지난 앙코르 와트의 입장권 따위를 가장 눈에 띄게 걸어놓았다. 변기에 앉아 앞을 보면 코끼리 모양 인도차이나 반도의 지도가 황홀한 자태로 유혹한다. 그리고 히피즘이 전성기에 달하던 시절의 사진들. 더벅머리, 되는 대로 입은 옷, 익살스러운 표정, 미친 몸짓, 구도와 초점도 없는 미친 촬영 기법. 사진에서 술 냄새가 날 지경. 어찌 됐든 젊은 시절의 행복한 소장품들. 

 좁아터진 화장실을 창고 용도로까지 활용할 생각을 했는지, 변기 곁에 온갖 물건들을 갖다 놓았다. 변기 앞에는 그녀의 사진첩들이 열댓 권이나 쌓여있다. 반대쪽 벽면에는 온갖 잡동사니들, 코타의 기념품이라 적힌 덜떨어진 상자, 심지어 이불과 옷 꾸러미까지 쌓여있다. 그녀는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히피라고 생각한 것 같다. 우리는 전혀 히피가 아니고 동방예의지국의 선비들인데 말이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내가 그녀의 사진첩에 발을 올려놓고 편히 대변을 볼 수 있는 히피족의 우두머리라고 여겼다. 


 모닝커피에 우유를 가볍게 넣고 테이블에 앉는다. 뭔가 심심해서 오디오를 틀었다. 스티비 원더의 Superstition. 언젠가 영화에서 윌 스미스가 일어나자마자 홈 오디오에서 노래를 트는 장면을 보았다. '수퍼스티션'의 전주가 흐르고 윌은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었다. 그만큼 완벽한 아침의 시작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장면을 본 이후부터 나는 일어나자마자 노래를 튼다. 미친놈처럼 노래를 찾는다. 절대 빌리 홀리데이 같은 노래를 틀진 않는다. 샘 스미스 정도는 괜찮다. 노래를 들으며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며 시작하는 하루가 정말 좋다. 첫곡은 하루를 결정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 데미안 라이스 같은 노래로 하루를 시작하면 안 된다. 

블라인드가 어찌나 강력한지 낮에도 블라인드를 내리면 전등을 켜야만 했다. 그래서 행복했다. 

 여자 친구는 슬슬 몸을 뒹굴며 일어날 태세를 갖췄다. 사실 나는 그녀를 깨우고 싶어 노래를 틀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먼저 일어난 아침, 어서 빨리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자주 그런 방법을 사용했다. 그녀의 방이 보이는 창가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러 그녀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흔들어 깨우며 일어나라고 다그치면 어쩔 때는 굉장히 기분이 나쁜데, 은은히 공기 중으로 선율을 흘려서 살며시 정신이 들게 하면 웬만해선 얼굴을 찡그리고 화를 내지 않는다. 나는 달려가 "더 자지. 뭐 벌써 일어났어."라고 하면서 점잖은 체를 하는데 여자는 남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똑똑해서 그 속셈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 정도의 속셈은 다 알면서도 속아준다. 물론 모든 여자는 아니다. 나는 속아주는 여자가 좋다. 물론 그 여자도 항상 속아주지는 않는다. 

 "언제 일어났어?" 그녀가 눈을 비비며 묻는다.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상관이 있어?" 내가 대답했다.

 "그냥, 오빠가 오래 기다렸나 해서."

 그 말은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파비앙이 나를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그는 내게 항상 여자를 조심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중증 조심성 결핍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녀가 내게 다가오자 나는 나의 모든 울타리를 쓰러뜨리고 저 끝까지 개방된 너른 초원이 되었다. 이후로 나는 절대 걸쇠를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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