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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May 28. 2019

사랑 여행기 [파리 편]
아이스크림 인간

파리에서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인간

"어디든 여유로운 풍경을 한가롭게 걷다 보면 왠지 모르게 모든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지내고 있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


 쇼팽, 알퐁스 도데, 짐 모리슨, 모딜리아니, 에디스 피아프, 거트루드 스타인, 오스카 와일드, 마르셀 프루스트, 들라크루스와 발자크...... 그들이 지금 모두 한 데 모여 있다. 파리 20구에 위치한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파리 동부 널찍한 부지 위에 조성된 이 묘지는 모두를 아우른다. 이백 년 전에 죽었든 혹은 어제 죽었든 동일하게. 거기엔 악명이 높았던 사람도 있고, 매일 10시경 파자마를 입고 조용히 잠을 자던 사람들도 있다. 30만 명의 망령이 떠도는 곳이다. 30만 개의 인생 이야기가 조용히 묻혀 있다. 얼마나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나. 

 산 사람은 용서 못해도 죽은 사람은 곧잘 용서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런 이유로 죽은 작가의 책만 읽는다고 했다. 베트남 사람들이 이미 죽은 사람을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고인을 '영원한 친구'라고 불렀다. 죽음만큼 확실히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죽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부재는 망각을 만들어낸다. 애처로운 마음과 섞여 고인은 세상 가장 따뜻했던 인물로 아련한 그리움을 준다. 그들이 보였던 이기심과 편협함은 깨끗이 지워지고...... 고인의 사랑과 우정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위인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위인이 됐다. 아직 살아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괴물같이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죽은 자들은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있다. 

 어쨌든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 위에서 우리는 걷고 또 걸으며 장난을 쳤다.  


 묘지는 풀어낼 수 없는 실마리처럼 얽혀 있다. 그리 평화로운 공동묘지가 있을까? 그곳은 잘 조성된 하나의 정원 같다. 나폴레옹은 이곳을 정원처럼 꾸며놓기를 원했다. 나는 묘지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이미 죽어 누워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기 때문일까? 그곳에선 근심과 걱정, 회한과 후회, 다가올 날에 대한 막연함이 멈춘다. 모두가 잠든 새벽엔 쌓였던 화가 가라앉듯이, 모두가 잠들어 있는 묘지에서는 어떤 것도 미워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자 친구가 말했다.

 "난 언제나 죽는 게 두려웠는데, 여기에 있으니까 그리 무섭지만은 않을 거 같아."

 내가 화들짝 놀랐다.

 "어째서지?"

 "그냥. 정말 평화롭지 않아? 파리에 도착한 이후로 가장 평온한 기분이 들어."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

 잠시 페르 라셰즈의 묵직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내가 말했다.

 "그래도 나에게 그런 말은 하지 마......"

 "어째서?" 여자는 슬며시 미소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사랑스럽고 말랑한 대답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태초부터 죽어온 430,029,021,34명의 사람들 중 몇 명 정도는 남겼다. 

 유명인들의 묘 앞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모여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다. 짐 모리슨의 묘 앞 나무에는 수많은 껌 딱지들이 붙어있다. 껌 딱지로 고인의 넋을 기린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지만 짐 모리슨에게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헤로인을 가져다주면 훨씬 좋아할 터인데.(고인 모독인가?)


 아무래도 오스카 와일드의 묘가 그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묘가 아닐까 싶다. 인기 하나만은 하늘의 뜻을 타고난 사람이어서 그런지 죽어서도 마찬가지다. 똑똑하고 잘생기고 건방지지만 말을 잘하는 인간. 이전에는 많은 여자들이 그의 비석에 립스틱 자국을 찍어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립스틱에서 나온 어떤 기름 때문에 비석이 빠르게 부식되어 지금은 유리벽으로 주위를 막아놓았다. 

 나는 '오스카'라는 인간의 탁월성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반항하고픈 인간의 욕구를 자극하는 인간. 그러면서 이해받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는 인간. [나는 내가 천재라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선포할 게 없다]라고 말한 재수 없는 인간. 사회로부터 격리당해 옥중에서 참회록을 적었지만, 결국엔 바뀌지 않은 인간.  

고양이와 같은 여자의 마음


 여자 친구는 에디스 피아프의 묘비 앞에서 오랜 시간을 서 있었다. 그녀는 에디스 피아프를 좋아했다. 그녀의 쇄골엔 La vie en rose라고 적힌 타투가 있다. 그녀의 쇄골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녀가 장밋빛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인생을 장밋빛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오직 사랑, 아주 붉은 사랑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장미란 남자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건 하나의 꿈이자 이상향이자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모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에디스 피아프를 좋아했다. La vie en rose를 들으면 인생은 언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희망이 있을 것만 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여자들은 꿈과 희망을 먹고 산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희망을 곱씹는다. 지금 생각하니 그래서 그녀가 에디스 피아프를 좋아했다.

 여자 친구는 에디스 피아프의 비석 앞에 놓여 있는, 꽃병에 담긴 꽃의 사진을 찍었다. 코닥 흑백 필름으로 찍은 그 사진은 영원히 색감을 잃었다. 나는 그 사진이 색감이 생생한 사진이었다면 훨씬 아름다웠을 것 같았다. 나중에 그녀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역시 말은 생각났다고 모두 내뱉는 것이 아니다. 훨씬 나중에 봤더니 흑백으로 찍은 사진도 굉장히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마음속엔 내가 그녀의 사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재생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을 수 있다. 자신이 찍어 온 사진을 볼 때마다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말이 되어 가시처럼 그녀를 찌를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그녀는 점점 그 시절의 사진들을 멀리할지 모른다. 나는 후회한다.

여자들은 에디스 피아프에게 존경심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파란만장한(결국 비극적인) 한 여자의 삶은 다른 여자들에겐 하나의 공유된 꿈과 희망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페르 라셰즈 묘지를 빠져나오며 우리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생명의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둥그런 묘에 풀이 자라 있는 모습이 좋다. 자라나는 풀이 죽음과 생명의 엇갈림을 나타내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살아서는 큰 빛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더라도 죽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 어떨 것 같아?" 

 페레 라셰즈 공동묘지를 떠올리면 그 질문부터 떠오른다. 누구를 위한 사랑이고 영광인가. 고흐처럼 살고 싶진 않다. 죽고 나서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장르가 된다고 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든 기업가든 엔지니어든 부자든 거지든 다 마찬가지다. 당장 오늘만 의미가 있다. 내일은 올 때까진 의미가 없다. 

 나는 오늘 고깃국을 먹고 싶다. 지금 사랑을 받고 싶다. 내일 사랑을 준다는 확약이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사랑 없는 오늘 하루를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젊음이 늙음 곁에서 더욱 빛을 발하듯, 삶은 죽음 옆에서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 나는 살고 싶다. 멋지게 오늘을 살아내고 싶다. 그저 한낱 인간일 뿐이다. 누가 어깨를 감싸주면 사르르 녹아버리는 아이스크림 인간일 뿐이다. 나는 너무도 차갑게 얼어 있어 조금의 따뜻함만 닿아도 힘없이 녹아버린다. 


 예술가들의 엉덩이 같은 몽마르뜨 언덕에 올랐다. 캉캉 쇼로 유명한 물랑루즈 앞에 관광객의 카메라 세례가 터진다. 구불구불 올라가는 경사로를 따라 레스토랑이며 카페, 기념품점들이 늘어섰다. 모두들 몽마르뜨 예술가라도 된 듯이 저마다 테라스에 축 늘어져 있다. 어두운 돌담이 언덕 오르막을 타고 이어진다. 여자 친구의 하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참이슬 같은 그녀의 땀방울.

몽마르뜨를 얘기하면 모두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서만 얘기한다. 실제로 거기엔 '일상'과 '사람들'이 있다.

 능선처럼 크게 굽은 길을 따라 이어진 집들은 모두 테라스를 가지고 있는데, 그곳에 서서 밖을 내다보면 멀리 파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올 것만 같다.

 예술은 다른 사람에게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하며 동의를 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몽마르뜨와 같이 예술가들이 모였던 장소에 가면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든다. 인생에 아주아주 중요한 무언가의 것. 하루와 계절을 살아가며 놓치고 있는 아주 소중한 것. 생애 가장 아름다운 정경이라든지 젊은 날의 열정이라든지 인생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될 화려한 밤이라든지. 뭐든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본능적인 것. 

 몽마르뜨의 얕은 언덕길을 걷다 보면 본능이 깨어난다. 내 몸과 마음을 온통 아름다운 것으로만 채우고 싶어 진다. 일상과 체념이 주는 검은 피가 내 몸을 흐르게 놔두고 싶지 않다. 허깨비 예술가가 된대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예술가가 되지 못한 삶보다는 낫다. 누군가에게 '참으로 아름답지 않나?'라고 말한 적 없는 인간이 되는 삶보다는 백만 스물 한배 낫다.


 몽마르뜨 언덕 꼭대기에는 큰 교회와 많은 가게들과 사람들이 있다. 교회 앞 계단에 앉으니 회색빛 파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파리의 지붕은 모두들 회색빛으로 칠해져 있어 조금 칙칙하다. 하지만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 저녁은 도시가 화려하게 변신 중인 시간이다. 가로등 불빛으로 화장을 하고 매혹적인 네온사인 코트를 입는다. 파리는 정말 섹시하다. 


 몽마르뜨 언덕 위에 앉은 많은 사람들. 연인들, 친구들, 가족들. 사람의 세상을 구성하는 필요충분적 구성요소.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앉아 있는 모양의 아기자기함.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서서히 조여 오는 너트처럼 살며시. 나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리고는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어떤 소리가 더 날까. 어떤 곳으로 움직일까. 내게로 다가올까 아니면 그대로 멀어질까.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나는 일주일 전 프랑크푸르트에서 여자 친구를 다시 만났고, 일주일 후에는 피렌체 근방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옆에 앉은 대머리에 배불뚝이, V넥 셔츠 사이로 삐져나온 가슴 털투성이 아저씨와 그의 아름다운 금발 부인은 일주일 전에 어디서 무얼 했고, 일주일 후에는 어디에 위치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어쩌다 그날 저녁 몽마르뜨 언덕 위에서 모인 것일까? 이따금 우연성에 대한 나의 놀라움이 폭발할 때, 타인에 대한 사랑이 싹틀 때, 세상과 사람이 한없이 귀여워 보일 때, 모두에게 살갑게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누구나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이야기가 끝이 없을 텐데, 나는 그 모든 걸 듣고 알고, 알아가고 싶은데 말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대체 어쩌다 우리가 여기서 만나게 되었을까요? 당신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 모두들 다른 생명에 대한 호기심이 개만큼만 있었어도 세상은 살만했을 것이다.


차도보다 인도가 넓은 것이 무척 섹시하다.

 어딘가에서 시간이 아장아장 기어간다면 어딘가에선 바람을 타고 간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오랫동안 앉아 있고 싶었는데, 시간이 씨앗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가 가로등 불빛을 밝혔다. 우리는 움직여야만 했다. 


 언덕을 내려오는 길에 케이블카가 있어 발길을 멈췄다. 한번 타고 내려가 볼까? 자기 몸만 한 첼로를 맨 사나이는 매표소 직원에게 애걸하여 공짜로 탑승하였다. 주위를 살펴보니 걸어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 그냥 걸어서 내려왔다. 채 150m나 될 거리였을까? 케이블카를 타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그것에 탑승하고자 기다리는 사람의 줄이 그 운행거리보다 길어 보였다. 

 사람들은 가끔 여행지에서 효율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무시하거나 혹은 잊고자 하거나. 그건 조금 바보 같은 일이지만 동시에 어쩌면 아주 멋진 일일 수도 있다. '여행' 자체가 효율성을 무시하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행위니까. 그런 면에서 모든 여행자들의 모든 여행 방식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돌계단 사이사이 켜지는 가로등이 아주 아름다웠다. 파리의 가로등이 까만 장막을 배경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장면을 눈 앞에 두니, 엽서 사진을 찍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파리에서 엽서를 쓴다면, 파리의
 가스등 불빛을 배경으로 아득한 누군가에게 글을 써주고 싶다. 내용이 길어서는 절대 안 된다. 아름다운 것을 봤으면 옆 사람에게 '아름답지 않습니까?' 한 마디면 충분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합니다.' 한 마디면 충분하다. 파리에서 보낼 엽서는 한두 문장이면 충분할 것이다. [많이 보고 싶네요. 잘 지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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