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only living boy Jul 11. 2019

사랑 여행기[마르세유 편]
뭘 하든 당신이 기대가 돼

 "우린 무엇이 될까?"

 "모두들 고전하고 있지요." 


 다시 마르세이유로 돌아왔다. 마르세유에 도착하여 다시 또 오래된 항구 쪽으로 나가보았다. 저녁나절이 다 지난 항구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 같다. 몹시 허기가 졌다. 우리는 저녁을 먹을 만한 레스토랑을 찾아다녔다. 

 액상 프로방스에서 마르세유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부야베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부야베스는 전형적인 해물 잡탕이다. 모든 해물탕이 그렇듯 마르세유의 어부들이 팔다 남은 해산물들을 한 데 모아 끓여 먹던 요리에서 유래가 시작한다. 모든 어부들이 그렇듯 그들은 매우 솜씨가 좋아서 이 잡탕은 계속 더 맛있어졌고 이제는 마르세유를 대표하는 요리가 되었다.  

 마르세유는 오래된 항구도시답게 해산물이 싱싱하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부야베스를 먹어야만 할까? 이제 부야베스는 서민 어부들이 끓여먹던 요리가 아니라 백작들이 휴양 와서 먹는 특산 요리가 되어버렸다. 제대로 된 부야베스 가게를 찾는 방법 중에 이런 방법이 있다. 이건 여행 가이드지에 나온 이야기다. [50유로 이하인 부야베스를 파는 가게는 가지 마세요!] 50유로가 넘어야만 제대로 된 재료를 쓰는 맛있는 부야베스라는 것이다. 음, 우리는 고민이 되었다. 

 그녀는 해산물보다 고기를 더 좋아한다. 나는 음식보다 그녀를 더 좋아한다. 우리는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 물론 부야베스를 먹는 사람들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유명하다는 요리를 먹기 위해 우리의 기호를 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다. 다만 그때는 그랬다는 거다. 우리는 제대로 된 부야베스를 먹을 수 있는 주머니 사정이 아니라서 그냥 부야베스를 먹지 않기로 했다. 살랑이는 테라스 밑에서 뻘건 부야베스를 먹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모든 가게의 메뉴판을 보았는데 그 어디에도 50유로 이하의 부야베스는 없었다. 모두들 정말 제대로 부야베스 해물탕을 끓여서 팔고 있었다. 나는 흐뭇했다. 

 우리는 놀라운 가격의 음식을 블랙 보드에 써놓은 멋진 식당을 찾아냈다. 그 식당의 테라스에서는 들불처럼 불빛이 일렁이는 항구 만으로 들어온 방수포 같은 바다가 보였다. 우리는 9유로짜리 홍합탕을 하나 시켰다. 그리고 거기에 곁들여 먹을 스테이크를 한 접시 시켰다. 커다란 냄비에 수북이 쌓인 홍합탕이 나왔다. 한국의 맑은 홍합탕이라고 해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에 모든 돈을 건다. 나는 오래전 잠실역 1번 출구의 아름다운 포장마차 거리가 생각났다. 그 홍합탕은 내게 고향의 기억을 떠올려주게 하는 탕이었다. 남프랑스 요리에 기대가 컸던 여자 친구는 조금 실망하는 기색이다. 그래서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톡 튀어나온 앞니로 고기를 잘근잘근 씹어 먹는 그녀의 모습은 내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 주었다. 


 식사 후 산책으로 석회암 언덕 위 노트르담 성당에 도보로 다녀오기로 했다. 옛 항구에서 트램을 타고 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162미터짜리 언덕을 오르려고 타기엔 너무 사치스러운 기분이다. 어쨌든 걷기에 너무도 사랑스러운 저녁이었다. 

마르세유 옛 항구 저 너머로 보이는 노트르담 성당. 요트의 도시 마르세이.

 지중해 바다와 도시의 야경을 아래에 두어보고 싶었다. 바다의 짠내가 담겨오는 바람이 강하게 분다. 여자들의 테니스 스커트도 춤추듯 하늘거린다. 

 성당까지 오르는 길은 적막하여 으스스하다. 가로등 불빛은 거의 없는 가로수 길이다. 여자 친구는 나의 손을 꼭 잡는다. 꼬옥 하고 힘이 들어가는 고 귀여운 손을 입으로 가져다 키스해 주었다. 그녀도 내 손을 가져가 키스해 주었다. 그건 우리가 가끔씩 하는 진한 프렌치 키스였다. 우리는 키스를 나누며 마르세유의 유명한 혼돈의 암흑가를 헤쳐나갔다. 다행히 그 유명한 마르세유의 마약 갱단 조직은 마주치지 않았다. 


 빙빙 돌아 겨우 다다른 노트르담 성당 앞. 문은 굳게 닫혀있지만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카르타고의 3단 노선이 지나다니던 지중해의 검은 밤바다가 보인다. 저 멀리 등대 하나가 외로이 서서 사람을 찾고 있다. 어둑어둑해진 도시는 불빛을 하나둘 내뿜고, 어느새 야경이다. 잠깐 앉아 내려다보는 도시는 훨씬 더 커 보인다. 내일 그곳을 떠날 우리는 아직 가보지 못한, 이젠 가보지 않을 외곽까지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그곳에 앉아있다 보니, 곳곳에 세워진 유럽풍의 건물들, 예를 들어 호텔과 교회, 오래된 시청사 같은 것을 빼고는 나의 고향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나의 고향은 해안가가 길게 이어지는 동해안에 자리 잡고 있다. 고지대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와 그 뒤로 이어지는 시내, 사람 사는 동네들. 그런 기억들을 복기해보니 마치 여기가 거기고 거기가 여기인 것만 같다. 나는 이렇게 멀리까지 올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종탑 꼭대기의 금빛 성모 마리아는 암흑의 마르세유를 수호하고 있다.

 하지만 마르세이 노트르담 성당 앞의 난간에 나란히 앉아 세상을 함께 내려다 보던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면, 우린 반드시 지구 반대편까지 함께 갔어야만 했다. 함께 집을 떠나야만 우리는 각자의 세상에서 서로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자주 잊고 사는, 그(그녀)가 가진 유일무이한 소중함. 

 나는 그녀의 작은 몸을 뒤에서 감싸 안고 있었다. 짧게 끊어친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녀의 목덜미에서 나는 은은한 체취가 여전했다. 나는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서 그녀가 나에게 물었던 것 같다.

 "오빠는 정말 뭐가 될까?"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자 그녀가 설명했다.

 "아니 내 말은, 정말 오빠는 대체 뭐가 될까 궁금해서 그래. 순수한 호기심에 가까운...... 정말 무엇이 되어서 어떤 일을 할까? 하는 궁금증이야. 오빠가 뭘 할지 정말 모르겠어. 그런데 기대가 돼. 무엇을 하든."

 그건 그 시점에서 내가 여태껏 여자에게 들었던 가장 기분 좋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영원히 그 시간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런 대사를 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결정적 장면을 결코 잊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희망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모두들 고전하고 하고 있지만, 나는 기대감 하나로 상황을 타개하고 있다. 누군가 내게 기대를 걸고 있었으므로.


 일전에 내가 만났던 여자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별로 그녀에게 끌리지 않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내가 그녀를 낮게 평가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배울 점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고 두드러지는 장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매우 얕잡아 보았고 나에겐 부족한 상대라고 평가절하했다. 그것이 그녀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했던 이유였을까? 자신을 얕잡아 보는 상대에 대한 이유 모를 궁금증과 복종심.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 보아도 나는 그녀를 정말 너무하게도, 평가절하해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전혀 기대를 걸지 않았다. 

 사람이 얼마나 나약하고 한심한 존재인지 나는 알 것도 같다. 어찌 보면 단지 기대감 하나로 사람과 더불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연인에게는...... 기대감이 거의 사랑의 전부다. 


 딱 지금 같은 날씨(무겁지 않은 공기, 스쳐가는 바람)에 짙은 커피 향 가득한 그리스 풍의 카페에 앉아 한 여자를 기다리던 오래전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나에 대해 그 어떤 것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궁금증이 곧 기대감이고 관심의 척도라면 그때 내가 얼마나 버려진 인간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정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그땐 그랬던 것 같다. 소품 같은 사람. 있을 땐 말도 걸고 재미도 있을 수 있지만, 정작 중요하다거나 진지할 때는 없거나 빠져주었으면 하는 사람. 


 여하튼 기대감은 곧 사랑의 전부다. 하지만 그것도 변한다. 모두가 변해가지만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서. 


 도시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웠다. 우리는 항구가 잘 보이는 테라스 바에 앉아 술을 한잔하기로 했다. 저녁 시간엔 술 마시던 사람들뿐이던 가게들에 이젠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프랑스인들은 이상해서 술을 마실 시간에 식사를 하고 식사를 할 시간에 술을 마신다. 물론 내 기준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들은 지역 맥주를 한잔씩 시원하게 들이켜고 있다. 와인의 나라 프랑스이지만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 빼고는 대부분 맥주를 마신다고 했다. 상상 속 프랑스에서는 레스토랑마다 사람들이 별이 빛나는 테라스에 앉아 우아하게 와인을 음미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지역 와인에 못지않게 지역 맥주들도 많이 생산되고 또 인기도 훨씬 좋다. 

저 위에서 서빙을 하던 포르투갈 가정부에게 당당히 사랑을 고백하던 러브 액츄얼리 영화 속의 영국인 작가.

 우리는 영화에 나왔다던 고풍스러운 복층 바를 찾아갔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콜린 퍼스가 자신의 가정부로 일하던 포르투갈 여성에게 프러포즈를 하던 바로 그 복층 바다. [Le Bar de la Marine]. 나의 여자 친구는 영화라면 끔뻑 죽는 사람이고 나 또한 러브 액츄얼리는 수도 없이 보았기 때문에 가슴이 떨렸다. 

 

Le Bar de la Marine의 아름다운 카운터. 이토록 아름다운 느낌은 대체 어떻게 낼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맥주 두 잔을 시켰다. 칵테일 잔처럼 위가 둥글게 널찍하고 아래가 아주 좁은 잔에 황금빛 맥주가 담겨 나왔다. 술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한 모금에도 얼굴이 빨갛게 타올랐다. 빨갛게 타오른 미인의 얼굴은 남자의 가슴을 불태우고, 그는 어서 술잔을 비우고 함께 집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여독이 쌓인 우리는 금방 기분 좋은 취기와 함께 엄청난 피로를 느꼈다. 항구의 불은 더욱 불타올랐다. 

 취기와 함께 잠이 별처럼 쏟아져 우리는 집으로 발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고 긴 길 위에서 그녀를 지켜내고 싶다는 취기 어린 다짐을 해보았다. 그랬든 말든 인생은 처참히 계속되고 있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 여행기 [엑상 프로방스 편] 사랑은 곧 관심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