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 소피아
그리스나 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 프랑스 남부와 같은 남부 유럽은 겨울에도 비교적 온화하여 쾌적하게 여행할 수 있다. 그러나 중부 유럽, 북부 유럽은 날도 춥고 해도 짧아 여러 모로 겨울에 여행하는 데 애환이 많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리스의 따뜻하고 조용한 섬 미코노스에서 유유자적하다가 불가리아 소피아 공항에 내렸을 때엔 확실히 다른 계절로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기온만 낮아진 것이 아니라 하늘도 우중충했고 거리의 채색은 사라졌으며 사람들 표정도 다소 얼어붙어 있었다.
그래도 소피아는 다정한 곳이었다. 소피아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시내버스 한 번 타면 금세 도착할 거리였다. 당시 내게는 불가리아 여행 정보라고는 론리 플래닛 'Eastern Europe' 영문판이 전부였다. 당시 소피아엔 여행자를 위한 숙소도 드물었을 뿐만 아니라 예약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공항을 나서던 나는 우선 론리플래닛에 소개된, 적당한 요금의 숙소로 마음을 정하고 트램을 탔다. 불가리아 트램 시스템에 무지했던 터지만 일단 시내로 가는 트램에 몸을 실은 것이다. 트램 기사는 내가 내미는 돈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환전한 돈이 트램에서 쓰기에 너무 큰돈이었던 것이다. 고마운 트램 기사는 아시아 여행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선한 표정으로 그냥 타라고 했다. 짐을 이끌고 트램의 뒷자리로 가 앉았다. 실은 크로아티아(유럽에서 '크로아티아'라고 하면, 독일인은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잘 못 알아듣는다. '크로에이시아'라고 발음한다.) 자그레브에서도 버스를 탔다가 버스 요금이 생각보다 비싸 갖고 있는 동전이 모자라 난감해하고 있었는데 기사가 그냥 나를 버스로 받아들여준 적도 있다.
좀 다른 얘긴데, 내가 일본에서 처음 간 곳은 홋카이도였다. 아사히카와 공항에서 비에이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타면서 요금을 내려 했더니 버스 기사는 그냥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낯선 곳에 가서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보고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이 방법을 나는 첫 여행 때 중국에서 터득했다. 버스기사가 승객들을 향해 무어라고 물으니 한 사내가 큰소리로 “야오!”라고 외치고 내리는 것이었다. 내가 내릴 정류장에 이르러 나도 똑같이 “야오!”를 외치니 버스가 서고 문이 열렸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나를 여행자로 보지 않았으리라. 요령을 알면 확실히 대중교통 이용에 자신감이 붙는다.
아무튼, 와, 일본에서는 버스가 공짜인가 보다, 좋네, 하고 앉아 있는데 내리는 사람들이 운전석 옆 돈통에 지폐를 넣고 거스름돈을 받아간다. 아 저거구나, 음, 됐어.
비에이에 도착하여 짐을 한가득 끌고 앞자리로 와 지폐를 넣을 수 있는 곳에 돈을 넣었다. 동전들이 또박또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는 동전들을 받아 들고 짐을 둘러메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 기사는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사는 앞문을 닫지 않고 계속 나를 노려보다가 급기야 내게 한마디 던졌다.
"선생님."
나는 처음에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몰랐다. 주워온 동전을 헤아려보니 처음에 넣었던 1000엔 그대로였다. 아차차, 순간 나는 파렴치한이 된 듯 얼굴이 붉어진 채 다시 버스에 올라 요금을 정산하고 내렸다. 여행을 하다 보면 대중교통 요금 때문에 난감해지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아무튼 시내에서 트램을 내려야 하는데 여기가 어딘지, 언제 내리면 되는지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누구에게 묻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마침 옆자리에 예쁜 여학생이 앉아 있길래 여학생에게 물었다.
"비토샤 거리에 가려고 하는데 어디서 내리면 되죠?"
여학생은 내가 내민 여행 책자의 소피아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고는 지금 위치가 어디이고 몇 정거장 더 가서 내려야 하는지 말해 주었다. 18살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은 빨간 털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있었다. 구멍이 난 장갑이 신경 쓰이는지 자꾸 왼손으로 오른손 장갑의 구멍 자국을 메우고 있었다. 그래도 구멍은 지워지지 않고 자꾸자꾸 다시 드러났다. 나는 그녀가 그럴 때마다 망연히 전차 밖 눈 덮인 비토샤 산을 내다보았다.
여학생은 내가 내릴 곳보다 세 정거장 앞서 내렸다. 전차 뒷문으로 가 손잡이를 잡고 선 그녀는 내가 염려되는 듯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세 정거장 더 가서 내려요!"
그러는 사이에도 손잡이를 쥔 그녀의 오른손 장갑은 자꾸 구멍을 드러내고 있었고 끝까지 그녀는 다른 손으로 장갑의 그 구멍을 메우고 있었다. 안쪽이 아릿해왔다.
전차 뒷문이 열리자 이윽고 그녀는 손잡이에서 손을 거두고는 책을 품고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오른쪽 눈을 찡끗 감아 내게 인사를 하고 전차에서 내렸다.
이슥한 저녁이 되어서야(그래 봐야 저녁 6시경이었지만 겨울의 유럽은 그 시간에 이미 한밤중처럼 어둡다) 어렵게 숙소에 당도했다. 숙소는 형편없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추운데 난방이라곤 전혀 되지 않았다. 그저 바깥바람을 막아주는 곳에 낮은 침대와 담요를 제공하는 정도였다. 담요를 휘감고는 "아, 추워"를 연발하다 잠이 들었다.
다정한 것은 전차 여학생뿐만이 아니었다. 소피아의 집시 소년들도 내게서 다정하게 돈을 소매치기해갔다. 이튿날 소피아엔 안개가 자욱했다. 마침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었지만, 서울에서와 같은 활기차고 들뜬(예전에 서울은 그랬다) 분위기 없이 차분했다. 나는 그저 어두침침한 거리에서 전차들이 코너를 돌 때마다 전기를 공급하는 전선에서 이는 스파크와 그로 인해 나는 펑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스파크는 때로 폭죽을 터뜨리는 것만큼 크고 화려해서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라 생각하기로 했다. 눈까지 조금씩 내려 동구의 겨울 느낌이 물씬 나는 날이었다.
막 사진기로 신나게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무리의 소년이 프레임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우리도 찍어줘요."
"뭐, 그러지."
대놓고 사람 사진을 찍지 못하는 소심한 내게 소년들이 먼저 사진을 찍어달라고 달려들어 신이 났다. 주의를 기울여 두어 장 사진을 찍었다. 녀석들은 연신 즐거운 표정으로 소란을 피웠다. 내 마음도 덩달아 더욱 즐거워졌다. 사진을 다 찍고 나서 녀석들은 내게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행 즐겁게 하세요."
다시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가는 녀석들을 향해 내 뒤에서 두 명의 소년이 뛰어가며 그 무리에 합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얼굴에서는 미소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들뜬 마음을 추스르고 이제 어디 가서 점심이라도 먹어볼까 하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주머니에 있던 돈이 사라졌다. 아침나절 현금이 떨어져 여행자수표 100불을 환전해서 입장료와 엽서 등에 이제 겨우 10불쯤 쓴 상태였다. 내가 녀석들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던 사이, 내 뒤에 있던 일행 두 명이 내 주머니를 털어간 것이다. 그때 사진에 찍히던 녀석들은 어떤 장면을 보고 있었을까? 어리숙한 아시안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즐거워하며 사진을 찍고 있고 두 명의 친구들이 각각 오른쪽과 왼쪽에서 슬며시 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장면을 보고 애써 태연한 척 즐겁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 왼쪽 주머니의 돈뭉치를 꺼내들어 노획품을 자랑하는 친구를 지켜보던 녀석들은 얼마나 즐거웠을까.
그래도 치명적인 금액을 소매치기당한 것은 아니었기에 90불이 아깝기는 했지만 그만하길 다행이라 생각했다. 녀석들이 찍힌 사진을 들고 경찰서에 찾아간들 나만 바보가 될 게 분명했다. 그 돈은 깔끔히 잊기로 했다.
소피아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다정함의 절정으로 치달았다. 추위에 지쳐갈 즈음 큰맘 먹고 조금 더 괜찮은 호텔에 머물기로 하였다. 역시 방 안은 한기로 가득한 곳이었지만 라디에이터라도 있는 게 어딘가, 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은 대이동이 있는 날이었다. 소피아에서 기차를 타고 유고슬라비아를 지나 크로아티아 자그레브까지 갈 참이었다. 호텔 방은 그리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어쩐 일인지 아침에 몸이 가뿐하였다.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호텔을 나서는데, 체크아웃을 담당하는 리셉션의 여직원이 환한 웃음으로 출입문까지 걸어 나와 인사를 해주었다. 붐비지 않는, 크리스마스 날 소피아에 오는 여행자가 아무도 없는 한적한 아침이라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네요.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어디로 가세요?"
"자그레브까지 가요."
"자그레브요? 멀리 가시는군요. 즐거운 여행 되시길요. 가는 길 조심하시고요."
호텔 문을 열고 나서자 한낮인데도 어둑어둑한 거리에는 함박눈이 펑펑 나리고 있었다. 더욱이 따뜻하고 포근한 함박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