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 - 잔지바르
기내식이 2회 이상 나오는 정도면 대체로 장거리 비행이라 할 수 있을까. 장거리 비행을 할 때마다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후면 왜 사람들은 일제히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일까. 또 몇 시간쯤 지나면 어째서 또 약속이라도 한 듯 대부분의 승객들은 눈을 떠서 부스럭거리고 옆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기내식이 나오는 것일까.
자다 깨서 기내식을 받아먹고(특히 창가 좌석에 앉아 옴짝달싹 못하는 때면 더 그렇다) 앉아 있으면 이것이야말로 비윤리적으로 가축을 가둬놓고 사육하는 꼴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축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엉덩이가 무거운 편이라 그런 긴 비행에도 제법 꾹 참고 자리에 앉아 버티는 편이다. 어떤 사람 말로는, 대여섯 시간 비행기를 타면 지겨워져서 차라리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이를테면 비행기가 추락한다든가?) 싶다고 하는데,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런 일을 겪고 싶지는 않다.
탄자니아 잔지바르까지 가는 비행편도 비행시간이 길기로 치면 빼놓을 수 없다. 인천에서 홍콩에 잠깐 들렀다가(그나저도 비행기에서 내릴 수 없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까지 열몇 시간을 날아가 우중충한 그곳에서 환승하여 또 예닐곱 시간을 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 친절한(?) 직원의 배려 덕분에 내내 창가석에 앉아 주는 밥을 꼬박꼬박 받아먹으며 이틀을 지냈더니 뱃속으로 들어간 음식물은 배출되지 못한 채 딱딱하게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단지 느낌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배며 가슴께를 손으로 만져보니 뭔가 딱딱하게 만져지는 것이었다. 그래도 좀 걸어 다니면 괜찮아지겠거니 했다.
식사를 하고 난 뒤 몸을 조금 움직이는 편이 소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나의 상식이다. 그런데 어떤 주장에 따르면 식사 후 가만히 있는 게 소화 기관이 집중해서 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소화가 잘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역시 나의 경험에 의하면, 밥 먹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몸은 그대로 굳어져갈 뿐이었다.
덥고 습하고 활달한 잔지바르에 도착해서 예약해 두었던 숙소에 들어가 별관의 멋진 방(한적하고 전통적이고 커다란 환풍기도 천장에 달려 있는)을 받고 흡족해진 나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딱딱한 가슴 아래께를 살살 문지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가슴께가 콕콕 쑤시는 느낌이 들었는데, 오랜 시간 비행기에 꼼짝없이 앉아 기내식을 받아먹은 탓이려니 했다. 그런데 이튿날도, 사흘째가 되어도 통증은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심해지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순간순간 신음을 내뱉고, 멋진 아침식사를 앞에 두고 근사하고 호젓하게 식사를 하다가도 억, 하며 남몰래 가슴을 부여잡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거동도 힘들어져 "아프다" 소리를 내뱉으며 침대에서 나뒹굴어야만 했다. 이건 단순한 소화 장애가 아니다 싶었고, 이윽고 며칠 전 접종한 황열병 예방주사가 생각났다.
옐로카드(노란색의 황열병 접종 증명서)가 없으면 탄자니아 입국이 불가능하다느니, 공항에 내려 접종할 수 있다느니, 구글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나는 한국에서 황열병 예방 접종을 하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황열병 예방 접종은 출국 열흘 내지 2주 전에 하도록 권장하고 있었고, 나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접종 신청을 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때마침 접종 백신이 바닥이 나 출국 일자 이후에야 백신이 수급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보건복지부에서 알려준 전국의 접종 가능 병원 여기저기 - 부산이며 목포까지 전화를 해 보았지만 출국일 전에 접종을 할 수 없었다. 보건복지부 직원에게 나의 사정을 설명하고 기다리다가 운 좋게도 출국 이틀 전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겨우 예방 접종을 할 수 있었다. 접종은 시시하리만치 간단했다. 심지어 주사를 두려워하는 내가 "벌써 맞은 건가요?" 하고 친절한 간호사에게 확인할 정도로 아프지 않았다.
가슴 통증은 백신 접종의 부작용이었던 것이다. 모기에 의해 전염된다는 이 황열병은 백신 한 방으로 예방이 가능한데, 이 백신의 강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하면 유효 기간이 '평생lifetime'이다. 그 정도 가슴 통증이 나타나는 게 충분히 이해가 갈 만큼 지독한 백신인 듯했다.
어쨌든 사흘째가 되어도 통증은 그대로여서 진통제라도 사 먹고 말겠다고 생각하고 잔지바르 스톤타운 골목을 헤매다가 물어물어 용케도 약국을 찾아 진통제를 샀다. 약은 Made in India였다. 문득 잔지바르 스톤타운에서 태어난 프레디 머큐리의 아버지가 인도에서 건너왔다는 게 떠올랐다. 잔지바르는 그러고 보면 인도양에 맞닿아 있다. 인도에서 인도양을 넘어 아프리카 잔지바르에 도착하는 건 이상할 것도 없다.
진통제 덕분이었는지 통증은 곧 멎었다. 이제 나는 황열병 백신의 부작용을 극복(?)하고 평생을 황열병 걱정 없이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아프리카는 고사하고 이웃나라에도 못 가고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