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순 Jul 27. 2020

다정해지는 순간 1

중국 - 리장

  중국 리장에서 비행기로 칭다오로 이동하려던 참이었다. 5시에 숙소에서 짐을 찾아 공항으로 나섰다. 먼저 충의시장 근처에서 택시를 타고 장거리 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택시기사는 10위안을 불렀는데 왜 이리 비싸냐고 투덜댔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택시비 기본요금이 7위안이었고 10위안이면 많이 바가지를 씌운 건 아니었다. 어쨌든 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공항 가는 버스를 찾을 수 없었다. 표 파는 아줌마에게 물어보니 임시매표소에 가 보란다. 임시매표소(대합실 위치)에 가니 공항 가는 표를, 과연 팔고 있었다. 표는 샀지만 버스를 찾을 수 없어 물어보니 허칭[鶴慶] 가는 걸 타란다. 허칭 가는 버스는 수시로 있었다.

  허칭 가는 버스를 타긴 탔는데 이 버스가 곧바로 공항으로 가는 건 아니었다. 중간에 리장 시내의 임시 정류장에서 한 번 더 서서 한정 없이 떠나질 않는다.


  임시 정류장에 서 있는 동안, 창밖으로 리어카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소시지며 어묵 같은 것을 튀겨 파는 아저씨의 리어카다. 챙 긴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햇볕에 드러난 그을린 얼굴, 흐뭇한 웃음 자국이 선명한 턱. 나는 그의 눈을 보지 않고도 그가 좋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버스가 들어올 때마다 아저씨는 버스를 피해 리어카를 잠시 옮겼다가 버스가 떠나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곤 하였다.


다정한 아빠 @리장 임시 정류장

  그런데 아까부터 아저씨의 품에는 꼬마 하나가 매달려 있다. 아저씨의 아이인 모양이었다. 아빠는 웃으면서 끊임없이 아이에게 뭔가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이는 이야기에 빠져 아빠 품속으로 자꾸 파고든다. 재밌어하는 아이의 반응이 흡족스러웠던지, 즐거워하기는 아빠도 마찬가지. 아빠는 아이에게 이야기로 간지럼을 태우고 있었다. 아, 저렇게 다정한 아빠라니. 시간이 지날수록 안쪽이 뜨거워졌다. 그 풍경으로 인하여 난 기약 없이 멈추어버린 버스를 잊고 있었다.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다시 출발하는 버스. 아저씨는 리어카를 옮겼다가 다시 아이를 안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아이는 다시 아빠 품속으로 자꾸자꾸 파고들고. 버스 뒤로 그들이 점점 멀어진다.      

  버스는 공항까지 들어가지 않고 공항 근처 큰길에 나를 내려주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밀밭 사이 저 멀리 공항이 보인다. 공항까지 한참을 걸어야 해서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석양의 밀밭 덕분에 그쯤 거뜬해진다. 일부러 밀밭 사이로 난 길을 천천히 가로질러 공항으로 향한다. 역시 여유 있게 오길 잘했어.


리장 공항 앞 밀밭


  공항에 들어가 표를 발급받으려는데 직원이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내 여권을 들고 말한다.


  “당신 비행기는 내일, 26일 거예요. 오늘은 25일이고.”


  지나고 나서는, 남은 좌석이 있으면 하루 앞당겨 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건 부탁을 해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그야말로 지나고 나서의 생각이다. 종종 나는 이렇게 지나고 나서야,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잠깐 마음을 말려 비튼다. 그러나 당시에는 나 자신에 대한 절망감 때문에 그런 말랑말랑한 생각을 할 여유 같은 것은 적어도 내 안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튼 그런 큰 실수를, 최소한 여행하는 동안에는 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비행기 타는 날짜를 착각한다는 것인지. 다시 버스를 타고 리장 시내로 돌아왔다.


  리장 시내에 도착하고 보니 짐을 맡길 데도 마땅치 않고, 괜찮은 새 숙소를 찾기도 번거롭다. 그래 다시 어제 힘겹게 찾은 수풍경객잔으로 간다. 객잔의 주인은 어쩐 일인가 한다.


  '내일 비행기인데 오늘인 줄 잘못 알았지 뭐예요.'


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비행기에 문제가 생겼다고만 말하는 나의 표정은 아마도 웬일로 즐거워 보였을 것이다. 날짜를 제대로 알고 다음 날 공항에 갔으면, 어쩌면 그 다정한 아빠와 아이를 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 문제는 실은 내게 있었고, 덕분에 나는 뜻밖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루 더 지내보니 이 객잔이 참 마음에 든다. 쉴 새 없이 들릴락 말락 엘리제를 위하여, 가 무한 반복된다.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알람 소리처럼 빨리 꺼야만 하는, 신경 쓰이는 소리가 결코 아니다. 그야말로 들릴 듯 말 듯, 그러나 안 들리면 아쉬울 듯. 방문을 열면 햇살이 넘쳐흐르는 작은 정원, 조용한 엘리제를 위하여.


수풍경객잔 @ 리장


매거진의 이전글 세이드 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