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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영노트 Mar 29. 2021

공항에도 나만의 아지트가 있다.

머리와 가슴을 환기시키는 나만의 공간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출근이 너무나도 하기 싫은 날이 있다. 빨리 일어나라고 머리가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몸은 도무지 일어나 지지 않는다. 그럴 때 나의 신체 회로를 바꾸는 묘책이 하나 있는데, 바로 ‘회사’ 대신 ‘공항’을 떠올리는 것이다. 직장으로써의 공항이 아니라 이 순간 진짜 여행을 떠나기 위한 공항으로 마음을 바꾼다. 공항에는 내가 만들어 놓은 ‘아지트’가 몇 군데 있다. 나의 ‘공항 아지트’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행객의 기분으로 그날의 공항 풍경을 누릴 것을 생각하면 출근 준비가 갑자기 즐거워지기 시작한다. 출근시간, 점심시간, 업무시간, 시간별 특성에 꼭 맞는 장소들이 나눠져 있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나만의 아지트를 활용한다. 오늘은 어떤 장소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첫 번째 아지트는 1 터미널 4층 한가운데 있는 카페 앞 발코니 공간이다. 무대 뒤편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끝까지 올라와 오른쪽으로 돌면 시야가 탁 트인 공간이 나오는데, 바로 그곳이다. 유리 난간을 따라 긴 테이블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의자에 앉으면 3층(출발층)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이다. 체크인 카운터와 출국장이 한눈에 들어와 어디가 덜 혼잡한지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주로 출근시간에 이 장소를 애용하는데, 시원한 아이스 카페라테와 함께 분주한 공항의 아침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나의 오감은 하나씩 깨어나기 시작한다. 나보다 훨씬 일찍 아침을 시작한 직원들이 활기차게 일하는 모습, 출국 수속을 위해 오가는 여행객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긍정의 에너지도 차오른다. 그리고 이곳은 지독했던 20대 취업 준비생 시절에 종종 다녀갔던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특별함은 더 크다. 이렇게 크고 멋진 공항에서 내가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대견하고도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여러 의미가 담겨있는 이곳에서 업무수첩을 펼쳐 오늘 해야 할 일을 확인하는 동안 나는 점점 여행객 모드에서 직장인 모드로 변화한다.



두 번째 아지트는 1 터미널 3층 한가운데 위치한 휴게 공간이다. 첫 번째 아지트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만 내려오면 바로 보이며,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공항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미디어 타워와 밀레니엄홀 무대, 계절별로 콘셉트가 바뀌는 조경까지 한 곳에서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유리 난간을 따라 수십 개의 등받이 의자가 나열되어 있는데, 여행객들 속에 파묻히기에 제격이다. 오전에 업무가 너무 많이 몰려 쉬지 않고 일을 한 날에는 팀 동료들과 점심을 먹지 않고, 책 한 권과 이어폰을 챙겨 이곳으로 나온다. 오는 길에 지하 1층 중앙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러 빵과 커피를 사고, 다시 이곳 3층으로 올라와 후다닥 먹는다. 그러고 나서는 이어폰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가져온 책을 읽는다. 사방이 트여있고 볼거리가 많아 과연 편하게 쉴 수 있을까 싶은 공간이기도 하지만, 책과 이어폰을 방패 삼아 눈과 귀를 다른 세계로 돌리면 그 작은 의자 한 칸이 아늑한 나만의 공간으로 변신한다. 업무에서 잠시 벗어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억눌렀던 감정을 해소하고 생각도 환기시키며 이 공간을 충분히 누려본다.



마지막 아지트는 2 터미널 3층 248번 게이트 옆의 탑승 라운지 공간이다. 스타벅스를 끼고 있어서 커피를 마시며 쉬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이곳은 보안검색을 받아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면세구역에 있기 때문에 현장 업무가 있는 날에 주로 이용한다. 내가 관리하고 있는 안내 시설물은 공항 전역에 설치되어 있어서 현장 확인을 해야 하는 범위는 꽤 크다. 여객들을 헤치고 이곳저곳을 누비다 보면 온몸의 에너지는 탈탈 털리고 사무실까지 걸어갈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는다. 이럴 때 이곳 아지트가 힘을 발휘한다. 이곳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비행기를 타기 전 대기하는 공간이지만, 나에게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 대기하는 공간이다. 사실 여러 아지트 중에서도 이 공간을 가장 좋아하는데, ‘공항’ 하면 바로 떠오르는 ‘비행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옆 스타벅스에서 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여정을 앞둔 사람들과 비행기를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그날의 피로가 싹 가신다. 이번 항공편은 어느 도시로 가는지 괜히 한번 보고, 그 도시를 인터넷으로 찾아보며 다음 여행을 떠올린다. 그리고 목에 메고 있는 출입증이 여권과 탑승권으로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기도 한다. 비록 일장춘몽일지라도 그 잠깐의 시간이 새로운 에너지로 나를 채워준다.



나의 공항 아지트 © 겨울향기 2021





출근과 퇴근의 틀 속에서 비슷한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직장생활과 일이 주는 기쁨을 놓치기 마련이다. 출근은 점점 하기 싫어지고, 출근해서도 퇴근만 바라보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까지 빛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이럴 때 회사 주변의 나만의 아지트를 떠올려보면 어떨까? 나의 경우는 운이 좋게도 공항이 직장이자 여행을 시작하는 관문이지만, 이곳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 수 있다. 나만 아는 잘생긴 사장님이 있는 카페가 될 수도 있고, 치맥 한잔 가볍게 할 수 있는 치킨집이 될 수도 있다. 흔한 공간이라도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 장소는 나에게 특별한 세계가 된다. 잠깐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나의 감정과 생각을 환기시키고 편하게 쉬다 보면, 한쪽으로 치우쳤던 일상의 무게중심도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아지트가 있는 공항! 나는 오늘도 그곳들을 떠올리며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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