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애보단 우정
우애는 다른 오빠들과 쌓으면 그만인 일이다
진과는 운동 모임에서 만났다. 세 살 연상인 그를 오빠라고 불러본 적은 없다. 진짱이나 진님이라고 불리는 그도 나를 수씨나 수님이라고 부른다. 주변에서는 진을 오빠라고 부르는 게 어떠냐고 하지만, 진은 그냥 진이다. 나는 그와 쌓는 게 우애나 썸이 아닌 우정이라서 좋았다. 이에 대해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진이 내 주변인 중 가장 감정표현이 적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굳이 물어보지 않으면 먼저 말하지 않는 그는 자주 골똘히 생각하고 혼자 뭔가를 계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진과 나는 무척 다른 류의 인간이다. 혼자서도 잘 떠들고, 그러다 보니 경솔한 말을 자주 내뱉는 나를 그가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우리가 함께 등산을 한 적이 있다. 둘 다 시간이 맞았고 마침 또 엄청나게 몰아치던 장맛비가 멈춘 날이어서 우린 외지로까지 영역을 넓혀보기로 했다. 진의 차를 얻어 타고 금산까지 가는 동안 나는 다리를 모은 채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본격적인 등산은 처음이기도 했고 진과는 지금처럼 친하지 않을 때라 나는 여러모로 긴장해있었다. 눈동자만 굴려 엿본 진은 티벳여우처럼 초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를 훔쳐보는 와중에 내 귓가가 살짝 간지러워졌다. 진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이돌 음악을 흥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 저래 봐도 진은 지금 기분이 좋구나.' 그제야 나는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풀 수 있었다.
진은 내가 챙기지 않았을 것을 예상했는지 여분의 손수건과 등산스틱을 쥐어줬다. 위압감을 내뿜는 돌산 아래에 서서 등산스틱을 쥐어보니 다시금 긴장이 되었다. 가방을 재정비해야 할 것 같았다. 도토리를 챙기는 다람쥐처럼 이것저것 챙기다 못해 도톰한 바람막이까지 빵빵하게 쑤셔 넣는 나를 보며 진이 예의 진중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거 입을 일 없을 텐데."
"산 정상은 춥다던데요?"
"땀나요. 안 추워."
진의 말대로 산행은 오지게 힘들었다. 등산로도 등산객도 없이 오로지 길잡이인 진의 감만 믿고 올라가는 산행이었다. 거칠고 험준한 길을 앞질러 가는 그가 간간히 뒤를 돌아보며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진은 믿음직스러운 길잡이 었으나 동행하는 내가 문제였다. 나는 흐르는 땀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지쳐 울먹일 때쯤 되면 그가 먼 곳을 바라보며 회심의 한마디를 던졌다.
"저기 토끼 있어요."
"다람쥐 지나갔는데 봤어요?"
"어, 까치다."
나는 진을 모르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그의 정보망에 걸린 작은 동물들을 보기 위해 나는 조금 더 힘을 내서 발자국을 뗄 수 있었다. 그렇게 적절한 당근을 받아먹으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서 바라본 하늘이 꾸물거리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나쁜 예감이 꼭 들어맞았다. 서둘러 하산하는 도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것에 가까운 엄청난 빗줄기가 밟아야 할 돌과 돌 사이로 흘러내렸고 나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집중해야 했다. 앞서가던 진이 발걸음을 빨리 하느라 종종 시야에서 사라졌다. 원래도 말없는 그가 더욱 말이 없어졌다. 진지한 그의 뒷모습을 보니 괜히 장난기가 돌아 나는 재난 영화의 포스터 속 문구 같은 한마디를 읊었다.
"과연 진과 수의 운명은 어찌 되는가?
진이 말을 잘랐다.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에요."
늘 차분한 그의 말투가 날카로웠기에 나는 우리의 상황이 정말로 좆됐음을 느끼며 농담을 접고 그를 따라 뛰듯이 걸었다.
"날씨가 이럴 줄은 몰랐어요."
우린 조난당하기 일보직전이 되어서야 산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은 산사태가 날까 봐 서둘렀다며 사과를 했다. 미끄러운 길을 나를 이끌며 내려오느라 기운이 쪽 빠진 진이 내게 컨디션은 괜찮은지 물었다. 나는 크게 끄덕였다. 흙물이 엄청 쏟아져내려 무섭긴 했지만 어쨌든 다친 곳 없이 잘 도착했고, 또 비에 온 몸을 적셔본 건 성인이 되곤 거의 처음이어서 묘한 상쾌함까지 느꼈다. 나는 물어본 것보다 많은 대답을 하며 내가 몹시 괜찮음을 어필했고 그런 나를 보고 다행이라며 진이 작게 웃었다. 차가워진 몸을 데우기 위해 따끈한 샤브샤브를 먹으러 가서도 나는 쉼 없이 오늘 얼마나 스릴 있었는지에 관해 이야기했고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쓸데없는 정보가 반인 얘길 진지하게 들어줬다. 국물에 바짝 존 칼국수까지 비우고서 우린 헤어졌다.
집에 와서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며 하루를 돌아보다 문득 진이 웃는 게 은근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이 틀어지면 몹시 스트레스를 받는 진이 오늘 하루 수고스러웠다는 생각도 했지만, 진은 작게 웃는 것도 귀여운데 크게 웃고 다니면 되게 귀엽고 좋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진과는 친해질 기회가 많으니 앞으로 그를 웃겨줘야겠다고 나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진은 자기가 웃고 싶을 때만 웃고 웃기 싫을 땐 억지로도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진을 웃기려는 시도는 머쓱하게 끝날 때가 많았다. 우리가 더 친해지면 성공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요즘도 이쯤 친해졌으면 진을 오빠라 불러도 되지 않냐는 얘길 듣지만, 진과는 역시 우정인 게 더 좋아서 나는 그런 질문을 들을 때면 그냥 웃어넘긴다. 우애는 다른 오빠들과 쌓으면 그만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