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무서운 건 그냥 나 자신이다
이십 대 후반이 되면 무서울 것 없는 멋진 여성이 될 줄 알았다. 낮엔 청순하지만 밤엔 섹시하고, 느슨한 듯 타이트하게 진행되는 업무를 별것 아닌 듯 처리해내며, 쿨하지만 핫한 연애를 하는, 뭐 그런 클래식하지만 모던한 매력의 여성. 직접 되어 본 이십 대 후반은 무서울 게 너무 많은 나이이다. 모아놓은 자산 없음, 하루가 다르게 저질스러워지는 체력, 결혼은 언제 하냐는 주변의 오지랖, 비혼을 외치지만 고독사 하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며 매일매일 내가 누구인지 의심하고 검열하며 살아야 하는 나. 가장 무서운 건 그냥 나 자신이다.
상상해보자.
열댓 명의 어린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노래를 부른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
그때 꽃무늬 옷을 입은 어린이가 답가를 부른다.
“나~아는 예쁜 김땡땡~”
“그~ 이~~이름 아름답구나~”
다시 노래가 시작된다. 한 명 한 명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 아름다운 이름이라 입을 모아 칭찬한다. 이제 모두 나를 바라본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
나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노래를 한다.
“나~아는…(꿀꺽)”
“~♪~”
“이- 페니드-자나팜-아빌리파이-에스벤서방정~~”
“………..?”
모두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슬금슬금 사라진다. 나를 향하던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고 완전히 암전이 된다.
-the end-
상상만으로 머리가 지끈 아파진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이 아침에 먹는 페니드정 10mg과 저녁에 먹는 자나팜정 0.25mg과 아빌리파이정 1mg, 에스벤서방정 100mg이기 때문이다. 호르몬을 조절하는 약물들이 아니고서야 나는 나를 ‘나’라고 소개할 수 없다. 약을 먹는 지금도 우울하고 신경질적이고 무기력한데, 약을 먹지 않으면 더더욱 마이너스한 내가 되고 만다.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다.
약을 타기 위해서 이주에 한번 병원에 간다. 나는 기다란 쇼파 구석에 앉아 차례를 기다린다. 조금 기다리면 따뜻하지만 사무적인 태도의 조무사 선생님이 나를 진료실로 안내한다.
“오랜만이에요, 수씨. 잘 지냈나요옹?”
“그냥 똑같죠, 뭐.”
닥터현은 내 정신과 인생 팔년 중 돌고 돌아 만난 아홉 번째 정신과 전문의였다. 그는 수더분한 외모와 말투, 격식 없는 태도의 소유자이다. 그와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1
“xx 병원에 취업했는데 월급을 백육십 준대요. (눈물을 훔친다)”
“아니, 아직도 그런 병원이 있나요? 미쳤네~ (책상을 쾅 내리친다)”
#2
“일하는데 웬 미친놈이 제 엉덩이를 만지지 뭐예요? (두 주먹을 꽉 쥔다)”
“세상에 그런 쓰레기가….? (정색하며 따라서 주먹을 꽉 쥔다)”
#3
“유튜브에서 봤는데 인류가 십년 내로 망한대요. 제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책상에 엎드려 오열한다)”
“아아~ 저 어릴 때에도 이천년이 되면 인류가 망한다 그랬거든요? 그때 공부 안 했으면 저 의사 못 했죠오~(높은 톤의 목소리로 자기 자랑을 한다)”
글로 쓰니 몹시 헐렁해 보이지만 그는 내가 갑자기 분노하거나 슬퍼해도 그 감정과 나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을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내가 누구인지 종종 잊는다는 얘길 한 적이 있다. 좋아하는 애의 이름이 갑자기 기억나지 않고 오늘 내가 아침을 먹었는지, 어젯밤에 약을 먹고 잤는지. 많은 것을 잃고 잊는 지금이 너무 두려워 눈물이 난다는 이야길 듣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워진다는 건 본능적인 거예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는 정말로 위험한 것이고요. 저도 제가 누구인지 설명하기 어려워요. 누구나 그러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조금 문제가 있네요. 스트레스가 지속된다면 그럴 수 있어요. 이주 뒤에 상태를 보고 약을 조절해 봅시다아.”
그는 운동을 열심히 하고 밥을 잘 먹고 다시 보자고 말했다. 자해와 자살을 이야기한 다음에도 그는 이주 뒤에 다시 보자고 말한다. 그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나는 어쩌다 보니 다음 예약에 늦지 않기 위해 달력에 메모를 하고 만다.
정신없이 대화를 하고 나오면 내가 무엇 때문에 고민스러웠는지 잊고 또 잃게 된다. 그것만큼은 무섭지 않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