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매월당(梅月堂)의 시집을 펼쳐든다. 두 어 편을 읽어내리며 새삼 그의 인생이 너무도 딱하고 안타깝게 여겨진다. 성균관 유생 여럿이 성균관 뒤쪽에서 공자가 태어나는 꿈을 꾸어, 다음날 아침 이를 확인해보니 김일성(金日省 ; 1435 ~ 1493)의 집에서 새벽에 아이가 태어났다는 일화로 시작된 천재. 일찍부터 신동으로 소문나 다섯 살 때 세종대왕의 부름으로 승정원에서 시를 지어 사람을 탄복케 했으며 상으로 받은 비단 오십 필을 그 양 끝을 묶어 끌고 나갔다는 일화야 세간에 널리 회자되어온 얘기다. 그런데 정작 내 눈을 깜빡이게 만드는 건 그가 태어난지 여덟 달 만에 혼자서 글을 알았고 세 살 때 시를 지었으며 다섯 살 때 「중용」과「대학」에 통했다는 역사적 기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건, 아니 이해되지 않는 건 유아기 때 각운을 맞춰 지었다는 시의 내용이다.
복사꽃 붉고 버들은 푸르러
삼월도 저물었는데 桃紅柳綠三月暮
푸른 바늘에 구슬이 꿰었는가
솔잎에 이슬이 맺혔네 珠貫靑針松葉露
운을 맞춰낸 것도 기이한 일이거니와 대체 꽃 피고 싹이 움트는 시기를 그 어린 나이에 어찌 알았을 것이며 솔잎에 맺힌 이슬을 푸른 바늘에 꿰인 이슬로 은유화시킬 수 있는 사고력이 갓 젖 떨어진 아이에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이에 대해 이율곡 선생은 이 신동이 ‘글을 보면 입으로는 읽지 못했을지언정 그 뜻은 모두 알았다’고 하면서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과 배워서 아는 사람이 있으니, 문장에도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있는’바 시습을 천득(天得)으로 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 천득이라는 단어는 ‘원래 그렇게 생겼다’는 말처럼 만족스런 설명이 되지 못한다. 이 분이 천득이란 단어를 쓴 데에는 척불유교사회의 묵시적 압박에 따른 것이 아닌가 생각되거니와 젊은 나이에 불문(佛門)에 들기도 했던 그가 정작 말하고 싶었던 건 윤회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궁금해진다. 이는 티벳의 현 달라이 라마가 세 살 때, 환생한 달라이 라마를 찾아 나선 사절단과 얘기를 나누며 자신이 들어본 적도, 배운 일도 없는 라사 말을 유창하게 구사했다는 대목과 꼭 같은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습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대단한 재능을 그 아무 곳에도 사용하지 못하고 평생을 한과 눈물, 탄식과 비분, 그리고 방황으로 보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하였으나, 애닯은 일이다. 그가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어 일생을 시와 술로 보낼 수 밖에 없었음은 물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엔 무엇보다 ‘그의 학업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이 다음에 크게 쓰겠다’고 했던 세종의 타계와 아울러 문종과 단종의 사망에 따른 조정과의 단절과 좌절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어린 시절의 불행했던 성장 환경이 보다 큰 몫을 했으리라.
이는 그의 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궁궐로 불려 갔을 때 / 세종 임금께선 비단옷을 내리셨다네” 로 시작되는 서민육수(?閔六首)․ 2나 서민육수․ 3의 “어머니를 열 세 살에 여의어서 / 외할머니가 데려다가 키워 주셨네 / 얼마 안되어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 먹고 살기가 더더욱 비참해졌네” 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의 평생의 눈물은 무엇보다 유년시절의 정서적 상처에 더욱 큰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달밤에 「이소경(離騷經)」 외우기를 즐겼고 이를 마치면 꼭 통곡하였다는 사실은, 조정에서 불러주길 바랬던 ‘이소경’의 저자 굴원(屈原)의 심사에 자신의 마음을 빗대고 읽음이니, 세종의 사랑과 관심으로부터 단절된 그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어림해보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같은 괴로움은 그의 숱한 기행으로 드러나고 있거니와 타인의 주목과 관심을 끌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유년시절에 있어서의 애정 결핍에 따른 행태로 여겨지는데 이는 경주 금오산에 머물러 있던 그가 서른한 살 때 원각사 낙성회에 참석하라는 세조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 그의 숭불사업을 찬양하는가 하면 만수무강을 비는 시를 쓴 일로 미루어 짐작되는 일이다.
그는 하늘로부터 천부적 재능 뿐만 아니라 비극적 일생 또한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나이 마흔셋에 장가 들어 아들 하나를 보았건만 얼마 안되어 처자를 모두 저승길로 보냈으니 이 천재에게 주어진 삶이란 슬프디 슬픈 방황과 액운 그 자체였던 셈이다.
그 어느핸가 부슬비 내리던 가을날, 홍산의 무량사를 찾았다가 김시습의 부도 앞에서 그의 가슴 아픈 일생을 추념해본 일이 있다. 성품이 경박하고 날카로워 남을 용납하는 아량이 없었으며 평소 하는 짓이 모두 어긋나 있었다는 매월당. 가끔은 냇가에 앉아 시를 쓰고는, 이것으로 종이배를 만들어 물에 띄워 보냈다는 청한자. 잠시 떠오른 인생이란 종이배에, 절망과 고통, 눈물과 광기를 들씌워 자신의 일생을 세월의 강물에 속절없이 띄워 보낸 설잠. 그러면서도 23권의 시문집에 2200여편의 시를 남긴 청간. 예술에도 소질을 보여 당신의 손으로 그렸다는 자신의 초상화를 남긴 동봉. 세 살 때 글을 깨우치고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 모두에 통달하여 이이 선생으로 하여금 ‘숭상할 만한 인물’이라 하면서 ‘절개와 의리를 드러내고 윤리의 기강을 떠받들어 세운 것은 가히 해,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툴만하다’는 찬사를 발하게 만든 췌쉐옹. 그리하여 쉰아홉 되던 해 봄날, 이 무량사에서 비 내리는 가운데 한 많은 인생을 마쳤다는 김시습. 그의 마음을‘가을생각’이란 그의 시로 더듬어본다.
가랑잎 지네
뜨락 가에 지네
먼 산에 우뚝 솟은 너 솔만이 푸르구나
온 누리 쥐 죽은 듯 고요하여라.
난간에 의지하여 옥피리 빗겨들고 홀로 불어보노라
달도 지고 별도 지건만
말 없이
말 없이
잠 못 이뤄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