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삶의 비율 이대일 Jul 06. 2019

괘종시계

 내 취향을 잘 알고 계신 어머니께서 괘종시계 하나를 주셨다. 어린 날 안방에 걸려 있던 것과는 달리 자그마하고 귀염성스런 놈이다. 크기나 색깔 등 형태도 많이 다르고 건들대는 추 소리 또한 옛날의 그것처럼 무게감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오일에 한 번 정도 태엽을 감아줘야 하는 것 만큼은 여전한 시계다. 게다가 며칠 지나고 보니 그 걸음이 아름찬 듯 시간이 5분 정도 뒤미끄러져 있다. 태엽 감아줄 때 분침을 제대로 맞춰줘야 하는 일 한 가지가 더 생겨난 셈이다. 


 그러나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밥을 준 것 만큼 힘을 쓰며 시간마다 댕댕거리는 것도 그러하고 아라비아 숫자 분명한 낯색이 그러하며 무엇보다 시계추 건들대는 소리가 어린 날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나를 시간의 저편으로 끌고 가니 흐뭇한 일이다. 이 때문에 괘종시계는 시간을 앞으로 몰아가는 게 아니라 되돌리는 셈이다. 그것도 조금씩이 아니라 순식간에 말이다. 특히 오늘처럼 조용한 오전 나절의 시계 소리는 이명이 울려오는 듯한 정적의 그날로, 창호문으로 배어드는 뽀얀 빛의 공간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혼자 심심하여 장롱 서랍을 열어보다가 테 굵은 안경이 모여 있는 걸 발견하곤 이것으로 또 다른 안경이나 실패 같은 걸 들여다본다. 모두가 한결같이 커보이는 게 신기하다. 할머니가 이불 시칠 때 꺼내 쓰시곤 하는 것이지만 나는 그 이름이 뭔질 모른다. 할머니는 이걸 쓰시고 양손에 든 바늘과 실을 문대기만 하시다가 곁에서 심심해하는 내게 실 좀 꿰어보라 하신다. 나는 금세 실을 꿰드리며 자랑스러워한다. 할머니가 바느질을 하실 땐 한 땀 한 땀 때마다 바늘귀 터지는 소리가 야물지다. 눈부시게 깨끗한 홑청에서 피어나는 냄새도 생그레하다. 괘종시계가 댕댕거린다. 할머니는 안경 너머로 이것을 흘깃 바라보신다. 잠시 후엔 부엌으로 나서신다.


 골목을 지나는 고구마 장사 아저씨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온다. ‘밤~고구마 사~려~!’ 귀에 익숙한 아저씨 특유의 구성진 소리다. 할머니는 바구니를 들고 대문을 나서신다. 나도  따라 나선다. 런닝셔츠 차림에 밀짚모자를 쓴 아저씨의 리어카 주변엔 벌써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서 고구마를 담고 있다. 할머니가 아저씨에게 뭐라고 불평을 늘어놓으신다. 항상 고구마처럼 불그스레한 아저씨의 얼굴빛이 이상해서 고구마보다도 아저씨를 자꾸만 쳐다본다. 하오의 햇살이 걸터앉은 대청마루에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나랑 여동생이 삶은 고구마 바구니로 모여 앉는다. 삶은 밤처럼 희고도 단 밤고구마다. 먹는 즐거움 가득한 곳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얹혀 든다. “저번엔 물큰한 게 많았는데 이번엔 제대루구먼.” 이어 시계가 댕댕거린다.


 저녁 늦은 시간이다.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높직한 축대 위로 숨어든다. 그리고는 술래 발자국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 잠시 후 어떤 아이의 달음질 소리에 이어 “야도!”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또 다시 술래 걸음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또 다른 아이의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온다. 서로 엇섞인 발자국 소리다. 갑자기 조용해진다. 어느 집에선가 괘종소리와 더불어 애기 울음소리가 나즉히 들려온다. 


 나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본다. 갑자기 놀라움이 내려온다. 완전히 동그란 달이 높다란 곳에서 온 하늘을 밝히고 있다. 숨어 있는 나를 오래도록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어찌나 밝은지 멀리 남산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고 희미한대로 시가지의 모습도 한 눈에 들어온다. 순간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그저 달 만을 바라본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밝은 밤하늘이다. 얼마 후 ‘못 찾겠다 꾀꼬리’ 술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부자리에 누워 휘영청 밝은 달을 떠올린다. 달빛 촉촉한 창호문이 투명하기라도 한 듯 귀뚜라미 소리가 선명하다. 이를 모르는 척 괘종시계 초침 소리가 저 홀로 밤길을 간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 시계 소리에 담겨 있는 나의 풍경이다. 시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던 날, 소리만의 괘종시계에 대한 기억이다. 시간이라는 녀석에게 쫓기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어린 날의 일들이다. 여기엔 모든 게 멈춘 듯했던 공간, 어스레한 다락의 풍경이 숨어 있으며 엿장수 가윗 소리가 녹아 있고 야경꾼 딱딱이 소리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시침이나 분침은 앞으로 나아간 게 아니라 그저 숫자판 위를 맴돌았고 추는 시간과 무관하게 한 자리를 오간 것이다. 할머니께서 ‘시계가 죽었네’ 하시며 태엽을 감아주었을 때도 시계바늘은 그 자리에서 여전했고 추가 다시 건들거리기 시작했을 때도 어디론가 나아가지 않는 소리가 붙박이로 반복되었을 뿐이다.


 언젠가 산골 폐가에서 안방에 그대로 붙어있는 괘종시계를 만난 일이 있다. 다섯 시 어름으로 기억되는, 초저녁인지 새벽인지 알 수 없는 시각에 멈춰선 시계를 바라보며 ‘저 큰 게 이런 산골에서 왜 필요했지? 때를 몸으로 알며 시간에 쫓길 리 없는 사람들이’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 날 쏜살같이 내달아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제는 시간 관리의 문제가 중요해졌는가 하면 분, 초 단위로 나뉜 작업 공정이 사람을 옥죄고 있기도 하다.


 이런 게 과연 잘 살고 행복하게 되는 일인줄 모르겠으나 내 방에 자리한 괘종시계는 그게 아니라고 얘길 건네 온다. 세상에 있지도 않은 시간, 사람들이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니 그 중독에서 헤어나 시간 없는 세상으로 다시 들어서라 한다. 하늘이나 들꽃을 바라보며 느긋하고 즐겁게 살라 한다. 그저 자기가 울려내는 소리나 들으며 세상일에 쫓기지 말고 편히 살라 한다. 







작가의 이전글 김시습, 그 방황의 일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