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경아 Apr 24. 2020

나의 원으로.

대구 출신인 나는 어렸을 적 무척이나 서울로 가고 싶었다. 부동산 사이트에서 매일 원룸 월세를 찾아보며 대도시 커리어 우먼으로 우뚝 선 멋진 내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어떻게 보면 소원을 이룬 걸까. 17년의 회사 생활 동안 낙성대 열 평 원룸에서 잠실, 자양동, 역삼동, 그리고 지금의 부암동까지 서울의 많은 곳을 거쳐 왔으니까. 가장 길게 머문 곳은 역삼동이다. 걸어서 회사를 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지만 강남살이에 대한 사회적 로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그곳에서 살아온 내 모습이 가장 낯설지만. 


강남살이는 퇴사와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전혀 다른 풍경이 있는 부암동으로 왔다. 끝나지 않는 장마처럼 마음이 가라앉는 때가 오면 나는 종종 어린 시절 나를 즐겁게 했던 것들을 찾았다. 파란 하늘, 구불구불 정감 있는 골목길, 담벼락에 펼쳐진 장미덤불, 동네 분식집의 할머니 떡볶이. 순수하게 충만했던 느낌을 다시 받고 싶어서, 둥지에 돌아온 새처럼 몸을 웅크리고 쉬고 싶어서. 거대한 빌딩의 유리표면에 비치는 냉랭하고 무표정한 여자는 17년 만에 자신의 원을 향해 뒤돌아 걸었다.


나의 원. 내게는 둥지처럼 동그란 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원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만 알 수 있는 소중하고 따듯한 것들을 담은.


나의 원은 열두 살 무렵까지 살았던 작은 산동네에서 시작한다. 집 옆으로 길고 굴곡진 명랑한 개울이 있었고 점잖은 자작나무 숲이 있었고 둥글고 푸근한 산이 마을을 안아주던 곳. 그곳에서 나는 햇살을 받아 싹을 틔우고 개울에서 발장구를 치며 잎을 키웠다. 가장 좋아했던 것은 집 마당을 가로질러 늘어선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들이었다. 나는 자주 나무들을 올려다봤다. 여름이면 풍성한 잎 사이사이 매미들이 노래를 부르고 겨울이면 가지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이 톡톡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키 큰 나무는 키 작은 여자 아이를 다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언제든 다시 돌아오렴, 그렇게 말하듯이. 


그 시절 나를 이루던 세상은 뚜렷하고 아름다웠다. 작은 원 안에서 넘치도록 기뻤고 즐거웠다. 하지만 몸이 커지고 커진 몸만큼 먼 곳을 보게 되면서 선명하던 원은 희미해졌고 어느 날부터 헤맸고 지쳤고 슬펐다. 서성이는 마음속에는 어둡고 깊은 수면이 생겼다. 무엇을 담아도 채워지지 않는.


검은 거울 같은 수면 위로 파동이 일 때는 오직 내 안의 뭉클한 것이 솟아오를 때다. 똑... 하고 언젠가의 기억 하나, 느낌 하나가 물방울처럼  떨어지면 나는 그곳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똑똑... 똑똑똑.  작고 동글동글한 파동들이 다채로운 원을 그리면 나는 용기를 내 그곳으로 향했다. 내가 나일 수 있었던 그리운 지점으로.


지금 사는 부암동이 산동네라서 나는 좋다. 구불구불 가파른 골목길은 어릴 적 아이들과 숨바꼭질하던 놀이터 같고 오래된 집들과 가게들은 왠지 모를 편안함을 준다. 동네 길고양이들의 생김새를 파악하기도 하고 옹기종기 핀 클로버도 보며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길이 좋다. 아침마다 창을 열어 신선한 산바람을 맞고 고요한 산에 비 내리는 소리를 듣는 일.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보고 앙상한 가지에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해졌다가 또 떨어지며 세상이 자신만의 고리를 만드는 것을 본다. 그리고 나도 그 안에 있다.


다녀왔습니다. 걷고 걸어 나는 나의 원으로 돌아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인 날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