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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지우기 Dec 16. 2021

일기 쓰기로 정원을 가꾸는 과정



 가방에 노트북이 없는 날은 있지만, 일기장이 없는 날은 없다. 차분하고 연한 미색 종이 위에 질서 정연하게 찍힌 회색 . 얇고 부드러운 검은색 표지는 편안하게 인사를 건네는 멋진 신사 같다.



'딸깍'



밴드를 풀면 책갈피처럼 꼽혀있는 볼펜을 날렵하게 잡아 초크를 누른다. 날짜를 확인한 후 어제 쓴 문장 몇 줄 아래에 오늘 날짜를 쓰고 적기 시작한다. 2-3초 밖에 안 걸리는 부팅 시간은 어떤 프로그램보다 빠르다. 편리한 어플이 넘쳐나는 디지털 세상이지만 지극히 비생산적인 이 방식을 너무나 사랑한다.



어딘가에 내보이기엔 사소하고 유치하고 조잡스러운 감정들,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 언제 이뤄질지 모르겠지만 항상 꼭 품고 있는 꿈들을 적는다. 어떤 날은 한 문장이고 어떤 날은 한 바닥이다. 형식도 없고 제한도 없다. 흰 종이 위에 내 손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쓴다.



올해부턴 일기뿐 아니라 내가 배운 내용들, 할 일, 계획, 좋은 글귀 등 수집할 가치가 있는 것들도 적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이젠 이 검은색 노트가 일기장이라기보다는 나라는 사람의 역사책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300페이지짜리의 몰스킨 노트는 보통 노트보다 두껍고 무겁지만 딱 1년 치 일기를 담기에 적합한 분량이다. 꼬박 1년을 채워진 노트는 연말쯤 되면 마치 1권짜리 책이 된다.



물론 아무도 사지 않을 책이지만 그 어떤 책 보다 나에게 귀하다. 그 안엔 오직 내가 경험한 사건들, 생각들, 어느 순간의 좌절감, 그 순간을 극복할 희망이나 용기의 말들, 똑똑하다 생각했지만 어리석었던 선택들이 솔직하게 들어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계산해보니 일기를 쓴 지 18년 정도 되었다. 놀라운 시간이다. 아무도 시킨 적 없는 이 노동을 18년이나 하다니... 나는 도대체 왜 일기를 쓰는 걸까? 일기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에 잠긴다. 곧 볼펜을 들어 일기에 적어본다.



'나는 왜 일기를 18년 동안 썼을까?'



'딸깍. 딸깍.', '툭. 툭.' 펜을 만지작 거리며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다. 곧 어떤 생각이 들어오고 그걸 받아 적기 시작한다.



가만 보면 일기 쓰기는 정원을 가꾸는 일과 참 닮았다. 갑자기 어느 날 이유 없지 주어진 삶이라는 정원. 그리고 그걸 가꾸어야 하는 나라는 정원사. 그렇다. 일기 쓰기는 나에게 삶이라는 정원을 가꾸는 일이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는 것처럼  매일 내게 일어나는 생각, 감정, 만남, 대화 속에서 불필요한 것들은 걸러내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계속 보존하는 일. 가치 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가꾸는 일. 나는 일기를 통해 그것들을 한다.



정원을 가꾼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 노동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삶의 경이로움을 맞기 위한 놀이에 가깝다. 정원사가 시린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꽃을 볼 때 느끼는 그 묘하고 신비한 감정. 일기 쓰기를 통해서 내가 느끼는 바로 그 감정이다.



가장 절망적이었던 순간들에 썼던 문장들이 그 어떤 문장보다 내게 힘이 될 때. 매일 지나다니는 길, 매일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몰랐던 가치를 발견할 때. 복잡하고 풀리지 않는 고민들이 섞이다가 예상하지도 못한 해결책이 떠오르며 풀려갈 때. 내 삶의 모든 고통과 기쁨이 뒤섞여 마치 꽃이 피어나듯 어떤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 걸 보는 바로 그 묘한 느낌. 정원을 가꾸는 일과 똑 닮았다.



올해는 쓸 말이 많았는지 저번 달에 1년 치를 다 채웠다. 새해가 오기도 전 새로운 노트를 샀다. 늘 그래 왔던 데로 광화문 교보문고 몰스킨 코너에서 익숙한 듯 300페이지짜리 노트를 집었다. 지겹고 고루한 반복 같지만 유일하게 흥미진진한 반복이다. 내년 이맘때 어떤 문장들이 이 노트에 담길지 상상한다. 정원사가 씨앗을 심으며 아름답게 피어날 꽃을 상상하듯 내년에 내가 만나게 될 경험을 기대한다. 올해와 크게 달라질 것 없는 비슷 일상이겠지만 그 안에서 어떤 새로운 꽃을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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