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발라 누레진 종이. 물을 쏟아 우글거리는 귀퉁이. 연하지만 분명하게 그어져 있는 선. 그리고 그 선을 마치 담벼락을 타고 장난스럽게 걸어가는 아이들처럼 적혀있는 문장들.
'2003년 3월 19일'
'드디어 4번째 일기장!'
일기 쓰기는 내 인생에서 밥 먹는 것 다음으로 꾸준히 했던 행동이다.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일기장의 첫 문장으로 유추해보면 일기를 써온지 18~19년 정도 되어 보인다. 하지만 공식적 자료가 2003년이니 18년 차로 했다. 왜 일기를 썼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가족 중에 일기를 쓰는 사람도 없고, 친구 중에도 일기를 쓰는 놈은 없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왜 했을까? 과제든 업무든 최대한 미루는 게으름 전문가가 일기는 꾸준히 해온 것은 도대체가 어떤 마음일까? 게다가 요즘엔 주변에 일기 쓰기를 추천까지 하고 다닌다. 과연 이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도대체 일기가 나에게 어떤 것이길래.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정말 추천할 만한 것인지.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살짝 기분 좋아짐'이었다. 복잡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우울해서 항상 제멋대로 날뛰는 내 마음이 일기만 쓰면 조용해진다. 그리곤 기분이 '살짝' 좋아진다. 살짝 좋아진다는 건 가성비가 정말 좋다. 너무 좋은 것들은 항상 심한 부작용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영화, 드라마, 유튜브, 여행, 음식 같은 것들은 기분을 확 좋게 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월요병보다 심한 우울함을 동반한다. 그래서 더 큰 자극을 찾게 만든다. 하지만 일기는 아주 살짝 기분을 좋게 한다. 꽉 막힌 답답한 공간에서 창문을 여는 정도의 기쁨이랄까? 부작용도 없고 더 큰 자극을 원하지도 않는다.
또 다른 매력은 '공간의 자유' 다. 누군가의 문장이 아닌 오직 나만의 문장만으로 마음대로 채울 수 있는 규칙으로부터의 자유. 시험이나 검열이 없는 평가로부터 자유. 과거의 내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 언제든 살펴볼 수 있는 시간으로부터의 자유.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를 메모하거나 지루한 회의시간에 귀퉁이에 "지루하다"라고 솔직하게 쓸 수 있는 자유. 무언가를 털어놓을 수도, 물어볼 수도, 자랑을 늘어놓을 수도 있는 다양한 자유를 허락하는 곳. 이 세상에서 일기 말고 또 뭐가 있을까?
300페이지짜리 몰스킨 노트에 1년 치 일기를 쓴다. 보통 책 1권이 그 정도 분량인데 그렇게 보면 책 한 권을 매년 만들고 있는 샘이다. 아무도 보지 않고, 출판할 일도 없고, 멋진 문장이라곤 없는 심심한 책이지만 나만의 1년이 들어가 있는 사적인 책. 솔직하고, 복잡하고, 나약하고, 항상 멍청하다가 가끔 똑똑한 순간들이 기록된 1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나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 같은 가치는 없겠지만 한 존재가 자신이 가진 의미를 더 발전시키고 0.1mm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돕는 한 권.
살짝 좋은 기분, 자유, 성장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오직 일기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겐 음악이나 그림, 사진, 요리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겐 일기가 다가왔고 나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