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만난 할머니
"이게... 왜 안되지?"
할머니는 당신 앞에 서있는 내 주의를 끌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어폰을 뽑고 허리를 숙여 할머니의 손이 이끄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할머니는 자기 폰 카메라를 켜놓은 상태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면 가끔 만나는 어르신 중 한 명이다. 여기저기 찾아가서 물어보기엔 마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편하게 계속 지낼 순 없으니 젊은이에게 슬쩍 물어보는 그런 어른.
할머니는 촬영 버튼을 눌러 사진이 찍히는 것을 보여주며 증상을 설명했다.
"이건 되는데... 앞을 어떻게 보지? "
"아..."
나는 촬영 버튼 옆 전환 버튼을 가리켰다. 할머니가 직접 눌러보시면 더 오래 기억하실 거라 생각했다. 할머니는 내 지시대로 한번 눌러보시더니 바로 이해하셨다. 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게 안 되가지고 아침부터... 아..."
할머니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몇 년 전에 유행한 인디언 핑크색 콜롬비아 패딩. 너무 낡아 털이 전부 튀어나와 면도 안 한 얼굴처럼 흰 털이 난 패딩. 무릎엔 더 오래전에 유행했던 밝고 쨍한 핑크색의 키플링 가방. 바지는 여름에나 입을 법한 얇은 꽃무늬 바지. 다행히 양말은 두툼한 핑크 줄무늬 양말. 신발은 나이키 러닝화였으며 나이키 로고도 핑크색이었다. 그제야 할머니가 핑크를 좋아한다는 것과 핑크 계열 옷과 액세서리를 매칭 하기 위해 짙은 보라색 꽃무늬 바지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밀라 돈나 할머니를 따라가기엔 한참 부족해 보이는 패션이었다.
'왜 셀카 모드가 필요할까?'
두 정류장쯤 간 뒤에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런 할머니가 셀카 모드를 찾는 게 너무 궁금했다.
'SNS를 하시나? 거울 대신 쓰시는 건가? 도대체 뭐지?'
(죄송하지만) 핑크 할머니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버스엔 사람들이 각자 자기 폰에 빠져 있었고 젊은 여성도 아니고 할머니를 관찰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합리화했다. 할머니는 키플링 가방에서 폰을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참고로 폰 케이스도 핑크색이었다.) 한 번은 설명하기 위해 찍은 사진 2장을 지위기 위해 꺼냈고, 잠시 후엔 유튜브를 리스트를 쓱 보기 위해, 그다음엔 은행 잔고를 확인하셨다. 어느 은행인지 모르겠으나 '국민연금 0원'은 정확히 보았다.
폰을 꺼냈다 넣었다 하는 과정에서 통장 잔고보다 더 눈이 갔던 것은 폰 배경 화면이었다. 그 연세 어르신들이 주로 해놓는 배경은 꽃, 산, 자녀들 정도인데 핑크 할머니 폰에는 흑백 사진 한 장이 보였다. 옛날 사진을 직접 찍어 배경화면으로 해놓으신 것 같은데 그 사진엔 단발머리 소녀가 보였다. 교복을 입고 있었고 아주 살짝 웃는 얼굴이었다. 그 당시 스타일은 무표정한 게 특징인데 웃는 얼굴이라 더 눈에 띄었다.
딸이라고 하기엔 사진이 너무 오랜 느낌이었고 비슷한 사진을 친할머니 앨범에서도 본 적이 있었기에 나는 핑크 할머니 사진이라 결론지었다.
'할머니도 저렇게 귀여운 소녀인 때가 있었구나'
할머니도 여자이고 본인의 셀카를 찍을 수 있지. 나는 왜 그걸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더 이상한 놈 아닌가? 인스타에 올라오는 인형 같은 얼굴, 헬스와 필라테스로 다져진 멋진 몸매만 셀카를 찍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할머니보다 먼저 내렸다. 아마 할머니는 다음 정류장에 내리 실 것 같아. 할머니가 내리기 위해 꺼내는 핑크색 카드를 꺼내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부디 예쁜 셀카를 찍길 바랬다. 수십 년 전 그 사진보다 더 예쁜 미소로 찍길 바랬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만나면 핑크 소녀님이라고 불러드려야겠네...'
(피식) 미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