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지우기 Feb 11. 2022

PD의 책상



구청 5층 안쪽, 복지과와 전산실 가운데 있는 영상 제작실. 그 안에 내 책상이 생겼다. 앞으로 이 책상에서 12월까지 구청 홍보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 내 뒤로 책상이 하나 더 있는데 그 책상엔 편집 기술이 좋은 동료 PD가 앉아 있다. 나에겐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낯설다. 왜냐하면 내가 이 책상에 앉는 과정이 단 하루 만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유튜브 채널 <신사임당> 작가 면접에 떨어진 후로 마치 시련당한 남자처럼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구직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PD', '작가', '유튜브'라는 말만 보이면 닥치는 대로 지원서를 냈다.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번번이 떨어졌다. 절망스러운 탈락이 이어지던 그날도 기대감은 없이 넣었다. 얼핏 봤던 내용은 00 구청, 유튜브였다.



"PD님. 여기 00 회사인데요. 혹시 오늘 면접 보실 수 있나요?"



주문한 라테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걸려온 전화였다.



"5시까지 오실 수 있으세요?"

"아... 네!"

"그럼 좀 이따 뵙겠습니다."



2시가 넘어갈 즈음이었다. 마시고 가려던 커피를 포장하여 카페를 나섰다. 덜컥 겁이 났다. 이력서를 오전에 넣었는데 오후에 보자고 하다니... 이상한 회사 아닐까? 얼마나 급했던지 가는 중간에 두 번이나 전화가 와서 이력과 관련된 질문들을 했다.



"대학을 오래 다니셨네요?"

"전 회사에서도 정규직 전환이 가능하신데 왜 지원하셨어요?"

"(포트폴리오를 보며) 이 기획을 혼자 다하셨어요?"



면접은 이미 시작됐다. 이렇게 질문하면 좀 이따 얼굴 보고할 얘기가 없을까 싶어  걱정이 됐다. 홍대 쪽에 있는 회사는 크진 않지만 작지도 않아 보이는 9층짜리 건물에 있었다. 오는 내내 대화를 나눈 사람은 이사님의 방으로 갔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 남성의 책상 위엔 맥북, 무선 기계식 키보드, 성경을 필사 전용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말로만 듣던 성경 필사를 하는 사람이 여기 있었다. 메인 모니터엔 될 대로 돼라 식으로 만든 내 이력서가 떡 하니 열려 있었다.



"오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사실은 저희가 급하게 사람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나에 대해서 알 것들은 이미 다 알았으니, 남은 건 그쪽 이야기다. 구청 홍보 영상팀이 필요한 상황, 당장 내일부터 일을 해야 하는데 메인 PD가 자신이 없다고 나가버린 상황에서 혜성처럼 내가 등장한 것이다. 말은 안 했지만 갑자기 포기한 메인 PD로 인해 구청 쪽은 발칵 뒤짚혀 난리가 났을 것이고 이사님은 진땀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저번 회사보다 연봉은 조금 더 드릴 수 있어요. 당장 내일부터 인데 하시겠어요?"



잃을 것이 없는 상황에선 모든 것이 기회다. 내가 원했던 직장의 모습은 아니지만 지금 내게 선택의 기회가 없음으로 수락했다. 사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파견 근무라는 점, 내가 기획하며 주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계약직이지만 1년 동안 고용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 내일 어디로 몇 시까지 출근하면 될까요?"



그래서 나는 지금 구청 5층 반은 비품창고이고 반은 사무실인 이 방안에 유행이 지난 곡선 처리된 밝은 갈색의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정오쯤 오른쪽엔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유리가 반짝거린다. 그럴 땐 책상이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늦었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작가의 이전글 '네가 좋아서' 보다는 '기억을 만들고 싶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