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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지우기 Mar 29. 2022

만년필 덕후가 아닌 사람의 라미 덕질

내가 처음을 읽어버린 만년필은 '라미 알스타 (화이트 실버)' 다. 책에 관심도 없었으면서 똑똑해 보이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이 비싼 만년필을 샀다. 가죽 노트 한 권과 이 은빛 만년필을 넣고 있으면 아이큐가 50 정도는 올라간 느낌이었다. 게다가 필기감은 어찌나 좋던지 사각거리는 소리는 연인이 귀에 속삭이는 달콤한 고백 같았고 얇으면서 진하게 써지는 글씨체는 여성의 아름다운 허리라인 같았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만의 비밀 연애는 똑같은 은빛 만년필을 만나며 깨졌다.



가방에서 짐을 꺼내다 실수로 툭 떨어진 그 녀석을 낯선 이 가 주워줬다. 스크래치 때문에 속상한 마음보다 낯선 이 가 나를 보는 묘한 눈빛이 더 마음에 안 들었다. 마치 아주 날 잘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며 내 만년필을 건네준 그 사람은 자신의 가방에서 자신의 은빛 애인을 꺼냈다. 20년 정도 차이나는 그녀와 나처럼 우리의 만년필들도 세월의 차이가 분명히 났지만 분명 같은 은빛 만년필이었다.



내 비밀 연애가 누구나 하는 흔하디 흔한 연애라는 걸 깨닫고 며칠 뒤 만년필을 잃어버렸다. 마음이 아프긴커녕 언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모를 정도로 무심해져 버린 상태였다.


 


두 번째 만년필은 독일 백화점에서 산 '라미 2000'이다. 해외여행이 아닌 일 때문에 갔던 짧은 여정 마지막 날, 허전한 마음을 뭐라도 채우기 위해 돌아다니다 더위를 피해 들어간 백화점에서 충동적으로 샀다. 왜 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거라곤 할인 행사 때문에 중국인 관광객 수십 명이 매장을 점령한 상태였다는 것. 나는 그들과 같은 부류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돈이 없었음에도 비싼 만년필을 꼭 사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10년 정도 세월이 흘렀지만 이 만년필은 아직 내 곁에 있다. 잃어버릴까 봐 잘 챙겨서 그런 게 아니라 잘 안 써서다. 그립감, 필기감, 디자인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좋은 만년필이지만 처음 샀을 때 같이 산 잉크병을 아직도 쓰고 있을 정도로 사용 횟수가 적다. 왜  그랬을까?



이 멋진 친구를 쓰면 쓸수록 손은 만족스럽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내 돈 주고 샀음에도 이걸 쓸 자격이 있는지 묻게 되고, 이런 필기기로 낙서라도 하는 날엔 지옥으로 떨어질 것은 부담감이 피어올라왔다. 결국 나는 만년필이라는 물건은 나와는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후 서랍 깊숙이 넣었다. 그리곤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저렴한 볼펜들을 잡기 시작했다.






세 번째 만년필은 선물 받은 사파리 레드였다. 눈에 띄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이 만년필을 선물 받은 것은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갑자기 받은 선물이라는 것과 만년필에 대한 어떤 감정도 없는 상태라 편하게 가지고 다녔다. 너무 편했는지 일주일 만에 잃어버렸다. 분주하고 정신없는 상황에서 정신없는 누군가가 펜을 빌려달라고 했고 절대 해선 안 되는 짓을 해버렸고 결과는 당연했다. 선물 받은 만년필이라 속상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만년필에 대한 어떤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는 것 같아 편하기도 했다. 이로써 만년필과의 인연은 완전히 끝날 줄 알았다.





몇 년이 흐른 뒤 18년 전 은빛 만년필을 샀던 광화문 교보문고 라미 매장에서 네 번째 만년필을 샀다. 테라 레드라고 부르는 이 녀석은 무광의 은은한 빛깔에 검은색과 주황색이 절묘하게 콜라보를 이루는 녀석이었다. 충동구매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놈의 연말 감성과 20퍼센트 할인 때문에 2만 8천 원을 주고 덮석 사버렸다. 위안을 삼은 것은 내가 샀던 만년필 중 가장 저렴한 모델이라는 점이다.



몇 년 만에 다시 잡는 만년필이라 어색했지만 곧 손이 그 느낌을 기억해냈다. 서걱거리는 소리, 다소 뻑뻑하지만 힘차게 뻗어나가는 필기감... 그렇다. 만년필이다. 오랜만에 서랍에서 잠든 귀하신 분을 꺼내봤다. 비싼 녀석 답게 부드럽고 물이 흐르듯 편하게 써졌다. 그에 비하면 새로 산 테라 레드는 거칠고 뻑뻑하고 가볍기 그지없다. 괜히 샀나 싶었는데 곧 익숙한 불편함이 올라왔다.



'그러면 그렇지'



 귀하신 분은 뚜껑을 고이 닫아 침소로 고이 보내드렸다.



그리곤 새로 산 이 녀석을 둘러본다. 나는 왜 불편하고, 거칠고, 연약한 이 만년필을 쓰면서 마음이 더 편해지는 걸까? 다이소에는 천 원짜리 만년필도 있다는데 그걸 쓰면 마음이 더 편해질까? 애초에 만년필을 안 썼다면 모든 게 괜찮았을까?



아마 어떤 만년필을 사더라도 완전히 편해질 수 없을 것이다. 만년필로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을 만년필로 해결하지 말자.




글쓴이 낭독버젼으로 듣고싶다면?



https://youtu.be/Zxp5E8q5G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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