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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lsson Jun 04. 2020

[Review] <트라우마 사전> 리뷰

작가는 캐릭터의 상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이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심즈라는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의 최장점은 자율성이다. 내가 직접 캐릭터의 외형과 성격, 거주환경 등을 설정하고 그들의 행동을 맘대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수년 전, 지금은 1인 미디어계의 유명인사가 된 모 BJ의 심즈 플레이 영상을 보고서 몇 날 며칠을 심즈에 푹 빠져 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처럼 크리에이터들의 영상에 홀려 게임을 시작해 본 사람이라면 그들처럼 재밌게 플레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무리 심을 예쁘게 꾸미고, 온갖 자극적인(?) 상황에 빠뜨려 봐도 심의 반복적인 행동 패턴에 질려 그만두기 일쑤다. 그러니까 심즈 플레이의 재미는 바로 편집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심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네 삶을 보는 것처럼 지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단편적으로 편집한 영상을 보고 있으면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 


게임 <심즈(The Sims)> 이미지


실제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한 캐릭터의 일생을 어떤 빨리감기도 편집도 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그다지 극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어떤 핵심 사건을 중심으로 인물들과 복선을 엮어가다 보면 하나의 서사가 완성되곤 한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줄거리가 존재하는 모든 예술작품에는 크고 작은 갈등과 해결(혹은 해결 실패)의 과정이 등장한다. 


책 <트라우마 사전>에서는 이처럼 인물들이 겪는 수많은 갈등이나 고통의 상황에서 반응할 수 있는 행동들을 일러준다. 물론 하나의 정해진 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우의 수를 제시하고 있다. 가령, 악의적인 소문이라는 트라우마 상황에 맞닥뜨린 인물은 '사람들을 멀리하고 집에 처박혀 사교 모임을 피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소문을 퍼뜨린 사람을 맹렬하게 보복하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작품의 장르, 분위기, 인물의 성격 등에 따라 가능한 행동은 달라질 수 있지만 어느 쪽이든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처럼 독자들의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맥락을 제시하는 게 이 책의 역할이다. 


책을 읽기 전 나에게 떠올랐던 의문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하나의 트라우마 사건에 반응하는 경우의 수를 제한하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둘째는, 한 개인에게 평생의 상처로 기억될 수도 있는 소재를 이처럼 사전화하는 것이 (비록 허구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답으로 저자는 이 트라우마라는 주제에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한다. 하나의 사건이 개개인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다름을 인정하고, 알고리즘이 아닌 가능성 제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트라우마 사건을 다룰 때에 그것을 읽는 독자나 혹은 작가 본인에게 트리거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명확히 주의를 주며 글을 시작한다.


영화 <가타카> 중

여기서 제시되는 트라우마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하고, 세세하다. 제목 그대로 사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챕터를 골라 읽으면 될 것이다. 정말 어떤 시나리오에도 다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영화 <가타카>의 빈센트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SF작품인 본 작에서 주인공 빈센트는 인공 수정을 통해 우성 인자만을 선별적으로 보유하고 태어난 동생 안톤과 달리, 자연적인 수정을 통해 탄생된 '보통 인간'이다. 그는 안톤과 어려서부터 꾸준히 담력 내기를 하는데, 그것은 해안선에서 최대한 멀리 수영하다가 먼저 두려워 되돌아가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다. 당연히 체력이 우월한 안톤이 언제나 이겼지만, 하루는 놀랍게도 빈센트가 이긴다. 빈센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그 동안 꿈만 꿔 왔던 우주비행사라는 직업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게 된다. 


<가타카>에서 빈센트와 갈등을 빚는 대상은 우생학이 만연한 사회적 가치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월한 형제인 안톤 개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책에서 제시한 트라우마 중 ‘성공한 형제, 자매의 그림자 속에서 자라다’라는 트라우마 상황에 비추어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캐릭터에게 생길 수 있는 잘못된 믿음 중, 빈센트는 ‘경쟁해 봤자 실패할 테니 노력해도 소용없다’라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제롬의 신분을 빌려 가타카에 잠입하는 일에 성공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자신감을 잃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또한 그는 성공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하고, 언제나 필사적이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우월한 형제와 함께 자랐다는 그의 성장 배경을 미루어 보았을 때, 관람객들에게 빈센트라는 캐릭터에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 같은 캐릭터의 인과 관계를 직접 서술이 아닌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다. 작중에서 빈센트가 성인이 되어서도 안톤과의 수영 내기에 집착하는 장면은 책에서 제시한 바에 따르면 ‘한 분야에서라도 형제에게 이기고 싶어 끊임없이 경쟁하는’ 모습에 해당한다. 아마 이런 빈센트의 심리 묘사를 무성의하게 나레이션으로 직접 읊는 방식을 택했다면, <가타카>를 상징하는 중요한 수영 내기 장면은 존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관람객들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결국 이야기를 만들 때 <트라우마 사전>은 길잡이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이 책이 그 이상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려고 했다면 아마 클리셰 모음집이 되었을 때지만, 듀나 평론가가 말했듯이 다행히 거기에 그치지만은 않는다. 독자들의 집중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당위성만을 제시할 뿐, 캐릭터의 행동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보여주기’를 통해 매력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역량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캐릭터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흥미로운 서사를 엮어내고자 하는 작가라면, 혹시 이 책이 작가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은 접어두어도 될 것 같다. 다만 자율성이 부여된 만큼 책에서 제안하는 경우의 수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점에서, 시놉시스를 고민하는 작가들에게 대단한 도움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작업에는 이런 사전 한 권보다는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고, 여러 개의 트라우마가 엮여 있는 경우에는 더욱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민감한 트라우마를 다루어야 하는 입장에 놓인 작가라면 일종의 지침서 정도로 이 책을 이용하면 좋겠다. 못해도 독자들이 당신이 만들어낸 캐릭터의 심리 묘사를 이해하지 못해 책을 덮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트라우마 사전 - 작가를 위한 캐릭터 창조 가이드>

 

-지은이 : 안젤라 애커만, 베카 푸글리시

-옮긴이: 임상훈

-분야: 글쓰기, 창작 작법

-펴낸곳: 윌북

-발행일: 2020년 4월 20일

-면수: 508

-판형: 152 * 220

-정가: 22,000원




출처: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8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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