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를 보다가
계급은 언제든 뒤바뀌어야 제맛이듯 듣보잡인 흑수저 셰프들이 인지도 높은 백수저 셰프들을 순전히 '맛'만으로 이길 때는 짜릿한 재미도 있다. 과연 여타 요리 대결보다는 확실히 몰입감이 있다.
하지만 나는 여타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처럼 흑백요리사를 결국 완주하지 못했다. 경쟁에 뛰어들고 윗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이기고 생존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저 재미로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현실이 이미 그런 생존 싸움인데 또 그런 경쟁을 봐야 한다니 좀 피로한 감이 있다.
게다가 맛이란 건 굉장한 스펙트럼이 있고 각자의 취향에 기반한 것인데 이것을 두고 우열을 매기는 게 난센스 같다. 물론 맛없는 것은 비교적 명확하다. 재료에서 냄새가 나고 간이 맞지 않고 덜 익거나 너무 익은 것을 굉장히 맛있다고까지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맛있다고 인정받은 수준 이상의 음식들을 어떻게 줄 세울 수 있을까. 결국 마지막은 그저 취향에 기댈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심사위원으로 등장한 백종원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의 입맛까지 사로잡을 것인가 하는 대중성을 기준으로 심사하고 안성재는 미슐랭 셰프답게 미슐랭적인 기준, 얼마나 온도와 간이 적절한지, 풍미가 다양하고 조화로운지와 같은 기술적인 면을 측정하는 것 같았다. 제작진들은 이것을 척도라고 내세웠고 대중들은 납득한 모양이다. 이렇게 성공한 걸 보면.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특징이 그래서 결국 1위가 누구냐도 중요하지만, 진행 과정에서 드러나는 출연자들의 캐릭터가 흥행에 더 관건이다. 능력을 펼치되 인성도 중요하고 멋진 말을 날리는 것도 무시 못할 요소다.
가만 보면 대결을 펼쳤던 셰프들보다 더 인기 있는 사람이 안성재가 아닌가 싶다. 백종원과 달리 그들만의 리그에 있던 안성재의 평은 좀 신선하다. 영어도 익숙한 사람이라 리그 용어들을 정확한 발음으로 써주다 보니 그중 '이븐(even)하게'는 아예 밈이 되었고 우리가 너무나 중시하는 '있어빌리티'를 자극해 곳곳에서 멋있다고 난리가 났다.(나도 써봤다. 물수건 이븐하게 데워졌나요?) 국내 유일 미슐랭 쓰리 스타의 위엄에다 출연 셰프들 역시 인정하는 셰프요, 쇼맨십도 있고 영향력 있는 언변까지 더해 스타성이 확실하다. 그래선지 파인다이닝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늘어난 것 같다.
우리 가게는 스시오마카세를 하고 있는데 역시 파인다이닝 범주에 있어 감사하게도 그 여파를 조금은 받는 듯하다. 주변만 봐도 처음엔 식사 가격을 얘기하면 "밥 한끼에 그렇게나 주고 먹는다고?" 했던 사람들이 태반이었는데 요즘은 "언제 한번 먹으러 가고 싶다"고 말한다. 게다가 마니아들 중에는 그 금액이 아깝지 않다고 말해주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 만족감을 주기 위해 우아한 자태의 백조가 물밑에서 그렇게나 발을 버둥거리듯 심신을 갈아넣어야 한다. 음식의 맛만 중요한 게 아니다. 가격이 높은 탓에 그날의 접객과 분위기에 따라서도 "이 집은 맛이 없다. 기본기가 안돼 있다"는 혹평을 듣기 쉬워 이 역시 섬세하게 신경써야 한다.
가게를 오픈하고 본격적으로 관여도 하고 직원 공백이 이어지던 혹독한 시기를 거치면서 이런 가게는 2년 운영할시에 국가에서 공인된 자격증을 줘야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열심히 일한 만큼 통장에 차곡차곡 돈은 쌓였지만 고공행진하는 물가와 인건비 그리고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세금을 제하면 J의 시급은 처참한 수준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안성재가 운영하는 바로 그 '모수'도 사실상 폐업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는 렌탈, 관리비도 만만찮았을 것이다.
낑낑거리고 욕을 해도 J가 이 일을 좋아하는 것은 너무 확실하다.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불태우는 건 그 자체로 납득되는 성질이 있다. 그러니 같이 고달파질 것을 알고도 반대하지 않은 것이다. 출연진 가게들 예약이 폭주한다며 흑백요리사2 나가보라는 말에 J가 그런다.
"광탈할 거예요. 그리고 시간도 없고."
그렇다. 문을 며칠 간 닫으면 소는 누가 키우나? 그 짬이 있으면 고망이랑 놀아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