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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재희 Apr 17. 2019

축구기자, 종합격투기 경기를 제안 받다!

16년 전 수습 시절 겪었던 이색 경험, 종합격투기 취재기

종합격투기. 각종 격투기를 수련한 선수들이 땀을 흘리며 서로 부둥켜안고 뒹구는 스포츠. 맨주먹의 파워가 그대로 느껴지는 '오픈 핑거 글러브'(open finger glove)를 끼고 펀치와 발차기, 꺾기, 조르기, 비틀기 등 매우 '위험한 기술'을 쓰며 피까지 튀겨가면서 겨루는 승부. 이런 무시무시한 스포츠에 선수로 나설 뻔한 기자가 있다. 바로 현재 축구기자 겸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가 그 주인공이다.


2003년 2월. 호랑이 같은 사수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름 모를 경기도 구석의 한 체육관에 가서 격투기 대회 취재를 하라! '1년 동안 축구기자가 되기 위해 유럽 현지에서 뒹굴었는데, 또 다른 종목 취재인가?' 허탈한 생각도 잠시. 사수의 "빨리 안 가나"라는 호통이 귓가에 들렸고, 당시 '수습' 딱지를 떼지 못했던 필자는 카메라와 취재수첩을 부랴부랴 챙겨서 취재 현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거기는 어디고 무슨 대회가 열린다는 것인가? 당시에는 이동하면서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전화를 이리저리 돌려서 알아낸 정보. '제2회 무규칙격투기 대회'라는 이름과 경기도 외곽 지역의 체육관이라는 장소가 전부였다. 영하의 추운 날씨가 이어졌던 어느 겨울날, 이제는 기억도 잘나지 않는 경기도 용인시 외진 곳에 자리한 한 체육관을 찾아나섰다. 버스에서 내려서 20분 이상을 걸어올라가니 천막을 친 듯한 곳이 하나 보였다. '혹시 여기인가?' 조심히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니 링이 설치되어 있었다. "찾았구나!"를 외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환영합니다. (참가비는) 2만 원입니다. 마우스피스는 꼭 챙겨오셔야 합니다!" 진행요원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필자를 보자마자 건넨 말이다. 평소에 꾸준히 운동을 하긴 했지만 격투기 선수로 오해를 받다니…. "저 취재하러 온 기자입니다!" 신분을 밝혔지만 되돌아오는 말은 퉁명스러운 "네"였다. 그리고 대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참가여부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더 질문을 받았다. 계속해서 '취재'가 목적임을 밝혔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필자의 외모는 '기자'가 아니라 '격투가'에 가까웠나 보다.


대회 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경량급(75kg 이하)과 중량급(75kg 초과)으로 나뉘어 신청자를 받았고, 대진 추첨이 시작됐다. 그런데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하는 대회의 한 자리가 비었다. "부전승을 줄 수는 없는데…." 덩치 좋은 한 남자가 중얼거리듯 말하며 필자를 쳐다봤다. 마법에 걸린 것일까. 기에 눌린 것일까. 필자는 순간 몇 초 동안 얼음이 됐다. 고개를 빨리 가로젓지 못해 하마터면 그대로 선수로 등록될 뻔했다. "아, 아니에요. 저 기자라니까요!" 힘겹게 의사를 표시하자, 덩치 좋은 남자는 지긋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필자를 살려줬다.


무규칙격투기대회 강제 데뷔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필자는 취재에 집중했다. 지금 종합격투기 경기는 등장부터 화려하고 관중들고 많고 시설도 매우 좋지만, 당시 무규칙격투기대회는 이름만큼 배경도 '무규칙'이었다. 음향 시설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고 관중석은 전혀 없었으며 대진표도 종이에 써서 '급조' 하는 수준이었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하얀 링 위에 선수들이 올라가서 승부를 겨뤘는데, 마우스피스를 챙겨오지 않은 선수들이 꽤 있어서 경기가 끝나면 '소독 돌려막기'를 할 정도였다. 전문 코치와 함께 온 선수는 1/3도 되지 않았으며, 동네에서 싸움 좀 한다는 '자칭 파이터'들이 참가해 남은 자리를 채우는 것 같았다.


솔직히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규칙을 가리지 않고 싸운다'는 것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대회 정보도 선수 이름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글을 써야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경기가 진행될수록 생각이 바뀌었다. 링 위에 오른 선수들은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술들을 쓰면서 흥미로운 경기를 이어갔다. 서서 싸우는 것만큼 누워서 싸우는 것에도 뭔가 세밀한 기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암바'와 '초크'라는 기술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이런 스포츠가 있었구나!' 잘 알지도 못하고 관련 정보도 전혀 없었지만, 선수들이 흘리는 땀방울과 멋진 기술에 매료되어 신나게 취재수첩에 글을 채워나갔다. 1건도 만들기 어려울 것 같았던 기사는 술술 써졌다. 기본 상보를 비롯해 현장메모, 화보, 취재기, 인터뷰까지 마감했다.

 

대회가 끝나고 집중해서 기사를 열심히 정리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대회 시작 직전에 필자에게 선수 참가 사인을 보냈던 그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말했다. "고맙습니데이. 기사 좀 잘 써주이소!" 대회 심판을 맡았던 그가 걸죽한 부산 사투리로 좋은 기사를 부탁해오면서 필자의 경계심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마감을 다 한 뒤에 그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저도 부산이 고향입니다. 다음에 만나서 소주나 한잔 하시죠!" 그렇게 '무규칙격투기' 취재는 무규칙으로 시작해 무규칙으로 끝났다.


기사 마감을 보고하고 사수에게 엄청 깨진 뒤 여러 건의 기사가 이틀 동안 나의 바이라인을 달고 세상에 공개됐다. 그리고 다음날 반가운 메일이 왔다. 보낸 사람이 무섭게만 보였던 '부산 심판 아저씨'였다. 말투와 다른 '애교 섞인 글'로 고마움을 표시하며 '소주 한잔 사겠다'는 그를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격투기 이야기에 빠져들며 어느새 친한 사이가 됐다. 그 인연이 16년이나 이어지고 있다. 그 심판 아저씨는 바로 MBC 스포츠 플러스의 이동기 해설위원이다.


무규칙격투기는 서로 다른 종목을 수련한 선수들이 승부하는 '이종격투기'로 불려지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 '종합격투기'로 자리를 확실히 잡았다. 표도르 에밀리아넨코, 미르코 크로캅 등이 펄펄 날았던 2000년대 초반 일본 프라이드 FC 시절을 거쳐, 최근에는 미국을 주무대로 삼는 UFC가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로드FC'와 '탑FC' 대회 등이 개최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놀라운 것은 현재 UFC에서 아시아 최고 선수로 주가를 드높인 김동현이 '무규칙격투기대회' 챔피언(4회 대회) 출신이라는 점이다. 무규칙격투기대회에서 우승하며 국내 강자로 떠올랐고, 일본 무대를 접수한 뒤 미국 무대에서 '스턴건'으로 거듭난 파이터가 바로 김동현이다. 여기에 김동현이 다가 아니다. 임재석, 남의철, 권아솔, 김창현, 송언식 등 무규칙격투기대회는 김동현 외에도 좋은 선수들을 많이 배출하며 우리나라 종합격투기대회의 산실 구실을 톡톡히 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는 철없던 수습 시절 '축구 외의 스포츠도 저마다 매력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고마운 대회이기도 하다.


무규칙격투기대회 취재 후 필자는 곧 수습 딱지를 뗐고, 축구를 중심으로 스포츠 취재를 열심히 했다. 오랜 꿈이었던 '축구기자' 타이틀을 달았고, 여전히 부산 사투리가 섞여 있지만 현재 축구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스포츠경제>의 스포츠부장으로서 후배들과 호흡하고 있다. 축구뿐만 아니라 야구, 농구, 배구, 골프, 그리고 격투기까지 종목을 가리지 않고 아이템을 잡고 기사를 쓰며 지시를 내린다. '초짜 시절' 취재한 무규칙격투기대회가 필자에게 확실히 심어준 '편식하지 않는 버릇'이 제대로 몸 속에 자리잡고 있다. 후배들은 다소 괴롭겠지만, 예전 사수가 필자를 무규칙격투기대회에 보냈던 것처럼 항상 다양한 취재와 글쓰기를 '무규칙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스포츠 기자가 된 후 '세상은 넓고 재미 있는 스포츠는 참 많다'고 항상 느끼고 있다. 365일 24시간 멈추지 않고 달리는 게 바로 '스포츠 세상'이다. 그것을 알기에 오늘도 열심히 새롭게 재미 있고 깊이 있는 스포츠 소식을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만약 16년 전에 필자가 실제로 무규칙격투기대회에 참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엄청나게 얻어맞고 1회전에서 탈락했겠지만, 선수로 경기에 나섰다면 또 다른 좋은 경험이 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즐거운 상상은 조만간 이동기 해설위원을 만나서 다시 안줏거리로 삼아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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