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육두문자가 필요해
중딩 시절, 도서실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아이가 있었다. 여느 학생처럼 규정에 따라 똑단발을 하고 교복 치마 밑에 한 짝으로 체육복을 받쳐 입은 아이.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호기심은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건 장소와 상관없이 어디서나 발휘됐는데 정숙함을 요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이 인소(인터넷 소설)를 찾아 '소설' 칸에 몰릴 때, 그 애는 루틴처럼 '000' 번으로 시작하는 총론부터 시작해 서가를 천천히 훑고 다녔다. 아무래도 난 그 시절부터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이 많은 ENFP였나 보다.
그날은 유난히 햇볕이 좋았고, 남향인 도서실은 볕을 누리기 딱 좋은 장소였다. 한낮에 베란다를 뒹굴거리는 고양이처럼 바닥에 퍼질러 앉아 책꽂이를 살피던 중, 눈을 의심케 하는 제목이 띄었다. '비속어 사전?' 펼치기도 전에 알았다. 옛적부터 내려오는 찰진 욕들의 모음집이라는 걸. 신박한 것은 얼른 공유해야 하는 법, 인소에 빠진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야, 봐봐. 욕이 천지삐까리 아이가?"
세상에는 알지 못했던 육두문자가 참 많았다.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개삐삐'를 시작으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장문의 욕까지. 사전은 암울한 뜻이 넘치는 것과는 달리 꽤 친절했다. ㄱ~ㅎ까지 순서대로 나열하여 의미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도와줬다. 우리는 사전의 배려에 따라 익숙한 것부터 시작해 낯선 것까지 찬찬히 읽으며 의미를 탐독했다. 하지만 열중할수록, '헉'하고 입이 벌어졌다. 무심코 뱉은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 거다.
사춘기 친구들과 어울리려면 그것 몇 개는 기본기로 장착해야 했다. 우리는 조금 나쁜 일에도 불친절한 말들을 섞어가며 친목을 도모했다.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지만 없으면 왠지 서운했다. 말에 감칠맛을 더하는 부사와 같았다고 할까. 하지만 뜻을 알고서 다시 입에 담지 않았다. 부모님을 흉보고 상대 인격을 모독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우리 입술은 세례라도 받은 마냥 성스러워졌다.
서른이 넘은 나는 그때의 거듭남을 벗어던지고 깜박거리는 커서를 따라 깨알 같은 8포인트로 욕을 쓴다. 실은 깜박임을 느낄 틈도 없이 손가락이 마구잡이로 움직인다. 중딩 타이틀을 벗은 지 16년이 지났는데, 시험까지 쳤던 수학, 과학은 떠오르지 않아도 기억 속 어딘가 남아있던 비속어들을 끄집어 내 끝도 없이 화면에 퍼 나른다.
난 분노한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아 남아 있는 울분을 표한다. '그런 모욕적인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삐삐삐', '마지막까지 솔직했던 나를, 붙잡히기도 했던 나를 그렇게 떠나냐 삐삐삐삐삐' 상한 마음이 한 쪽, 두 쪽을 넘어가도 손가락이 멈추지 않는다. 살풀이를 추는 무용수는 이런 마음일까? 춤으로 쌓인 액운을 푸는 것처럼 악한 기운을 컴퓨터에 흘려보냈다.
윤홍균의 <사랑수업>에는 이별의 5단계가 있다고 한다. 이별이 아니라고 저항하는 '부정' 단계,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긴 거냐며 화를 내는 '분노' 단계,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는 '협상' 단계, 부정적인 생각과 무기력이 찾아오는 '우울' 단계,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비로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는 '수용' 단계에 이른다고 한다. 분노와 우울 단계에서는 전 단계로 역행하기도 하지만, 이때 감정을 잘 추스르며 수용에 이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191쪽 인용).
그렇다면 나는 어디쯤 일까? 책에 나온 말처럼 분노와 우울을 오가며, 가끔 부정과 협상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협상하려 들 때는, '그런다고 달라질까?' 생각하고, 우울해질 때는 무조건 밖으로 나가 걷거나 뛴다. 문득 그리우면, '아 내가 그때 행복했구나, 지금은 이별했지만!'하고 그런 마음을 타박하지 않고 인정한다. 자책만 하던 시간을 지나,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니 나름 발전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이별을 완전히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겠지.
비속어를 쓴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놨지만, 뭐, 나쁘긴 한 거다. 그렇지만 가끔은 필요한 것도 같다.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는 데 직빵이니까! 어린 내게 비속어 사전은 입에 세례를 내려 정결함을 주었고, 지금은 나쁜 마음을 흘려보내는데 도움을 주었다. 어쨌든 인생에 소소한 도움을 준 널 이렇게 칭하련다. '세상에서 가장 다이내믹한 말 모음집', '내겐 아름다운 비속어 사전'이라고.
추신. 묵묵히 버텨준 튼튼한 자판에게 감사를 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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