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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Sep 25. 2022

괜찮아질 수 있나요?

난 너무 유별난 거 같아요

"다음 주 목요일에 상담 괜찮으세요?"

"가장 빠른 날이 언제일까요? 그날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작 이틀 차이도 길게 느껴졌다. 뭐라도 해서 '빨리' 나아지고 '빨리' 벗어나고 싶은 조급함이 날 재촉한 거다. 느긋하게 기다리는 건 원래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던 인내를 찾을 수 없다. 마음은 조절할 수 있다는데, 내 마음은 꼭 남의 것 같다. 괜찮아질 거라고 다스려봐도 좀처럼 잘 되질 않는다. 긍정 회로를 돌리면 도움이 된다기에 '오늘도 행복한 일이 일어날 거야!' 순간마다 다짐도 했다. 그런데 일하다 뚝뚝, 집에서 뚝뚝.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건드리지 않아도 툭하면 줄줄 샌다. 몸의 90%를 차지한다는 물의 절반이 눈으로 나가는 것 같다. 거기에 불안, 분노까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격동적으로 타니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빠른 예약을 요청한 또 다른 이유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도 한몫했다. 나아지기 위해 '정신건강의학과'와 '상담' 중 하나를 택해야 했는데, 전자는 선입견 때문에 가는 게 겁났다. 우울증이나 조현병 같은 드라마에 거론되는 것 정도는 돼야 가는 곳이라는 게 당시 생각이었다. 병원 기록이 남으면 승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카더라'도 주저하게 했다. 각종 영상에 나오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마음도 병에 걸릴 수 있다며 왜 몸만 크게 생각하느냐 말했지만,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다가가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상담을 받고 많이 좋아졌다는 지인이 있으니,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상담’이다.  

   

드디어 첫 상담, 바로 상담사를 만날 줄 알았는데 주어진 건 4장의 상담지다. 이름, 나이, 직업, 가족관계 등을 적는 내담자 조사서, 우울감 및 스트레스 지수 체크리스트, 상담 이유와 나아지길 바라는 점 등을 묻는 설문지까지. 생각보다 쓸 게 많다. 체크리스트는 익히 아는 것처럼 5단계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인데, 나는 펜으로 양극단인 '매우 그렇다'와 '전혀 그렇지 않다'를 오갔다. 작성하고 보니 '보통'이 없다. 정녕 지난 한 달 동안 보통의, 평범한 기분이 없었나? 되돌아보니 그런 기분을 느꼈던 게 까마득하다.

    

"제인님, 평화방으로 들어가세요."

    

방 이름이 '평화'다. 아무런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나와는 이질적이다. 방문을 여니 이름처럼 안정감을 주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반가워요. 제인님이시죠?" 상담 선생님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상담에 들어갔다. 그는 상담지를 눈으로 훑고 나에 대해 질문했는데, 대답하면 ‘그랬구나’라는 말을 꼭 덧붙였다. 학부생 때 배운 얕은 지식에 따르면 ‘그랬구나’는 내담자에게 안정감을 주어 라포를 형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말이다.


그런데 나는 뭐 때문인지 괜한 심술이 나서 그에게 '그랬구나무새 선생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말은 나도 하겠다며 비뚤어진 마음을 속으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질문지만 읽고도 문제를 바로 알아차려 신통방통한 해답을 주길 바랐다보다. 여긴 점집이 아닌데, 꼭 그걸 원하는 사람처럼 알아서 날 맞추라며 마음에 빗장을 걸었다.

   

"상담으로 해결하고 싶은 것에 '불안 해소'라고 적으셨네요. 어떤 점이 불안해요?"

"현실이 다 불안해요. 그래서 잠도 못 자요."

"그랬구나, 불안이 무엇 때문에 찾아왔을까?"

"최근에 헤어졌거든요. 기대를 많이 했는데, 제 잘못으로 헤어진 것 같아서 자책해요."

"기대를 많이 하셨군요. 헤어지고 많이 힘드셨겠어요. 잠도 못 자면 일상도 힘들 텐데..."

     

또 눈물이 뚝뚝이다. 이상한 별명까지 지으며 마음을 걸어 잠겄는데, ‘힘들었겠다’는 한마디에 모든 게 풀렸다. 경계는 어느새 사라졌고, 선생님이 질문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이어갔다.

    

"헤어질 수 있는 건데, 누구나 겪는 일인데, 나는 너무 유별나요. 심장 두근거리고 불안한 느낌이 한 달을 넘어가니까요. 이제는 예전처럼 괜찮아질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나아질 수 있어요. 괜찮아질 거예요. 오늘은 좀 잘 잤으면 좋겠네요. 지금 기분은 어때요?"

     

50분이 빠르게 지나갔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꺽꺽'거리다 보니 손에 다량의 휴지가 뭉쳐져 있었고, 눈물이 안 나올 즈음 상담이 끝났다. 선생님의 마지막 질문, "지금 기분은 어때요?"라는 말에 "조금 괜찮아졌어요."라고 답했다. 상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감정을 소나기처럼 퍼붓고 나니 마음이 전보다 한결 나았다.


Photo by Noah Blaine Clar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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