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와 유모차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살면서 보약을 먹은 기억은 딱 두 번이다. 고3 때 수능을 준비하면서, 졸업 후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할미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보약을 지어주셨다. 거기에는 '좋은 대학에 가라', '꼭 공무원이 돼라'는 모종의 압박도 같이 다려져 있었다. 나는 유난히 왜소한 동생의 녹용도 몰래 뺏어 먹다가 맞을 만큼 약을 좋아했기에 이번에도 한약방 가는 날을 기대했다. 보약의 달달하면서도 쓰고 깊은 맛, 금방이라도 원기가 뿜뿜할 거 같은 건강한 냄새를 참 좋아하는 아재 취향이다.
단, 한약방까지 아무리 힘들어도 걸어가야 하는 게 할미의 철칙. 택시는 바닥에 돈 뿌리는 기계라며 극도로 싫어하는 할미에게 "택시 타자."라고 말했다가, "길바닥에 돈을 칠칠 깔고 간다."라며 아침부터 한소리 들었다. 등짝 스매싱은 운 좋게 피했는데, 이미 눈빛으로 몇 대 맞은 기분이다. 할미의 강력한 째림에 '쫄은' 나는, 물주인 그의 말을 따라 아침 8시부터 40분을 걸었다. 그것도 경보에 버금가는 최고 속도로 말이다.
할미는 평소에는 쩔뚝거리며 걷지만, 유모차가 있으면 레이싱 선수가 따로 없다. 그때만큼은 튼튼한 다리를 가진 나보다 걸음이 배로 빨라진다. 분명 어디서 주워온 평범한 유모차인데 바퀴에 모터라도 단 것처럼 부앙 부앙 앞으로 잘도 나간다. 내 귀에는 딸깍 딸깍 플라스틱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만 들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장치가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노화로 인한 체력 격차를 이길 수 없는 노릇이다. '유모차와 함께라면 거칠 것이 없지' 유모차에 손을 올리는 순간, 할미의 마이웨이가 시작된다. 잠깐의 정지도 머뭇거림도 없는 레이스. 그 속도에 발맞추려면 나도 부지런히 다리를 굴려야 한다.
이 걸음 끝에 보약이 있다
보약아 날 살려라
자본주의적 생각으로 걷고 또 걸었다. 하루에 만보 걸으면 캐시워크로 100원밖에 못 버는데, 칠천보를 걸어서 20만원을 번다는 건 얼마나 생산적인 일인가. 난 걸어서 보약을 벌기로 했다. 아침부터 이게 웬 고생인가 싶지만, 비싼 한약 지어준다는데 아침잠을 줄여서라도 가야지. 공짜는 그냥 얻는 게 아니다.
"퍼뜩 안 따라 오냐?"
"가고 있다. 쫌."
성질 급한 할미는 달달 거리는 유모차를 밀고가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본다. 휴일 아침, 최선을 다해 열심히 걷고 있는데 할미 눈에는 영 시원치 않은가 보다. 바뀐 고향 풍경을 보며 '그땐 그랬지' 회상도 하고 오랜만에 주변도 둘러보고 싶은데 그런 여유는 사치다. 레이싱하는 우리 할미, 얼른 쫓아 가야지. 이러다 우리 할미 답답병 도지면 또 잔소리를 '시게'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