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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07. 2023

한의원에서 성격도 바꿔 주나요?

요즘 약은 성격도 바꿔준대요

시장 입구부터 풍기는 약재 냄새,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한약방에 다 달았다. 처음 본 게 9살이니까 생긴 지 족히 20년은 더 됐다. 그동안 내 얼굴은 시간의 흐름을 직격탄으로 맞아 이마도 주름지고 거뭇한 기미도 생겼는데, 신기하게 한약방은 외관도 내부도 그대로다. 혼자만 시간 속에 멈춘 것 같다. 정자로 정직하게 적힌 간판을 지나자 꼭 오길 기다렸다는 듯 활짝 열린 문, 뒤이어 반갑게 맞이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할매, 약 지으러 왔습니꺼?"

"내 말고 우리 손제."

"아이고, 손녀는 좋겠네. 할매가 약도 다 지어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싱긋 웃었다. '그게 말이죠 제가 이 약을 먹기 위해 아침부터 어떤 노력을 했냐면요' 구구절절한 말은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거두절미하고 '보약=할미의 통 큰 사랑'이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한약방 곳곳이 눈이 부시게 번쩍 거린다.   


세기말에나 봤을 법한 번쩍번쩍 니스가 칠해진 의자와 가구들, 90년대로 돌아간 듯 넓은 자리를 버티고 있는 흔들의자까지. 시간 여행을 온 것만 같다. '진료실은 세련됐으려나' 그런 생각으로 들어가자마자 앉은 곳은 빤딱 거리지만 수많은 엉덩이가 스친 자리만 해진 의자다. 그리고 왜 아직도 바뀌지 않았는지 알 수 없는 천리안식 푸른 컴퓨터 화면이 책상 위를 떡하니 버티고 있다.


딱딱하지만 느낌이 나쁘지 않은 나무 의자에 몸을 맡기고 선생님과 짧게 인사를 나눴다. "손 내미세요." 오래된 편안함을 추구하는 실내 인테리어와는 달리, 쾌속 진료에 임하는 선생님. 그 속도감은 21세기 같아 꽤나 마음에 든다.


손목 위에 선생님의 두 손가락이 올라간다. 이내 고요해지는 진료실.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뗐다 할 때마다 눈썹을 움찔움찔 거리신다. 뭐라 말씀하실까?


"아, 몸이 많이 안 좋네. 심장에 열이 많네요. 홧병인데, 보니까. 요즘 잠도 못 자죠? 두통도 있고. 심장 두근거림도 좀 있겠는데."


역시 명의다. 내 깊은 속까지 알아보다니.


"타고난 성격이 남성스러워요. 그런 말 많이 듣죠? 성격 급하고 남자 같다고. 타고난 게 그래요."


읭? 이건 무슨 소리야. 타고났다니. 어떤 반응을 보여야하는 걸까. 당최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아 우물쭈물거렸다. 성격이 급한 건 맞는데, '타고났다'라고 하니 왜인지 기분이 나빴다. 성격은 타고난 기질의 영향이 있긴 하지만 그 외에도 사회적 환경에 의해 구성되는 건데, 타고났다니. 이렇게 태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괜히 억울했다.


선생님은 그후에도 몇 번을 성격에 대해 이야기했다. 타고난 체질 영향이라면 폐가 안 좋아야 하는데, 지금의 성격이 심장 혈을 막아서 위도 안 좋고 허리도 안 좋고 다 안 좋다고 했다. 계속 그 말이 콕 박혔다. 타고난 성격 때문에 안 좋다는 말. 그래서 급발진을 했다.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저는 못된 성격을 타고나서 성질이 나빠 홧병이 왔다는 말씀이세요? 그럼 저는 참 운 없는 사람 아닌가요? 저는 이 성격이 마음에 안 들거든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억울한데, 이거 어떻게 바꿔요?"


따지듯이 물었다. '누군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났나요'라는 일종의 시위이기도 했다. 대단한 답변을 기대한 건 아니다. 병증만 알려주면 됐는데, 자꾸 말 끝마다 '성격 성격'을 운운하시는 선생님께 뿔이 났다. 그는 나를 빤히 한 번 보더니 확신에 찬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한약을 먹는 겁니다. 부족한 기운을 보강해주면 조급하고 남자다운 성미가 좀 가라앉을 거예요. 한 번 먹고 안 되면 한 번 더 지어드세요."


한의원에서 성격 개조도 해주는구나. 씁쓸하면서도 웃픈 마음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눈과 입꼬리가 계속 삐죽인다.


한 달간 꾸준히 약을 먹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남성스러운 성미가 할 말 다하는 성격을 뜻하는 거라면 한약은 나를 하나도 고치지 못했다. 오히려 한동안 아파서 조용히 살았는데, 입이 살아 돌아온 걸 보고 동료들이 '드디어 제인이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올해 부임한 관리자는 조용한 내 모습만 봐서 정체를 모르다가, 생기에 차 할 말을 다 하자 따지지 말라고 했다. 한의원에 고맙다. 성격 개조는 못 했지만 원기를 충전해 원래대로 돌아가게 해 줬으니까. 그 공은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


+ 사진은 한의원에서 집중력과 불안 해소에 좋다며 서비스로 준 향 주머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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